“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선착장에서 마을 입구로 들어가다가 당산으로 빠지는 기슭에 성황당과 성황나무가 서 있었다.
오래된 성황당은 낡아서 쓰러질 듯했으나 그 속에 신령한 기운이 감돌았다.
대대로 마을의 안녕을 빌고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며 집안의 행복을 기원하던 성황나무엔 붉고 흰 헝겊 조각이 걸렸고 그 옆엔 돌무더기가 탑처럼 높게 쌓여 있었다.
성황당 무당
작업조는 먼저 그 돌탑부터 허물어 냈다. 긴 세월 한 개 한 개 소망을 담아 쌓아올렸던 탑이 한꺼번에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꼴을 마을 사람들은 멀찍이서 애잔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어 성황당의 문짝을 떼어내고 황토벽을 허물었다. 제단에 놓여 있던 신불상(神佛像)과 퇴색한 탱화, 제기, 종이꽃 따위를 끄집어내어 불태웠다.
불길이 활활 솟구쳐 오르고 있을 때였다. 마을 구석의 샛길 쪽에서 어느 늙수그레한 여인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엔 흰 옷을 입은 젊은 여자가 절뚝거리며 따라왔다.
“아, 누나!……”
용운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늙은 여인은 헝클어진 반백의 머리카락이 어지러운 이마에 주홍색 띠를 두르고 있었는데 첫눈에 봐도 병색이 완연했다.
그래도 그녀는 타오르는 불꽃보다 더 붉게 충혈된 두 눈을 이글거리며 외쳤다.
“천벌을 받으려고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제발 그만둬!”
그녀는 허물어져 버린 성황당을 쳐다보며 통곡을 내뽑더니 곧 눈길을 돌려 불길 속에서 일그러져 가는 신불상을 구하기 위해 불속으로 뛰어들려 했다.
톱으로 성황나무를 베던 원생들도 잠시 손을 놓고 바라보았다.
“저까짓 게 뭐가 중요하다고 그러쇼? 낡은 것은 다 태워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마을을 건설해야 한단 말이오!”
왕거미 사장이 늙은 여인을 휙 밀쳐내며 말했다.
그녀는 쓰러져 성황당 담벽에 머리를 찧었다. 피가 흰 머리카락을 붉게 물들이며 흘러 내렸다.
흰 옷을 입은 절뚝발이 여자가 “엄마!”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절뚝절뚝 뛰어가 노인을 감싸안았다. 흰 저고리와 치마에 선혈이 떨어져 번졌다.
그녀는 의식을 잃은 엄마를 흔들며 뒷산의 두견새보다 더 서럽게 울었다.
용운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곤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였다. 한쪽에 서 있던 백곰이 성큼 왕거미 사장 앞으로 다가갔다.
“이 일이 얼마만큼 중요한지 잘 모르지만 사람을 저렇게 해도 되는 거야?”
“뭐라구? 흥, 그래 네 놈도 같이 미쳤나 보구나. 병신 같은 계집년에게 홀리면 뵈는 게 없나 보지? 흐흐흐…….”
“뭐?”
백곰의 눈이 잠시 땅바닥에서 흐느끼는 여인에게로 갔다가 곧 왕거미 사장을 쏘아보았다.
“어? 이 새끼가 어따 대고 눈깔을…….”
“욕하지 마!”
“뭐, 뭐야. 이 새끼가?”
“천벌을 받으려고 이런 짓을…”
여기 있을 필요가 없는 암세포
“욕하지 마라!”
“아니, 이게 뒈질라고 환장을 했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장은 백곰의 턱을 정통으로 걷어찼다. 짧게 터져나오는 백곰의 비명이 메마른 바람소리 같다고 느껴졌다.
그것도 잠깐, 백곰은 상의 앞섶을 확 풀어 젖혔다. 단추가 후드득 뜯기며 사방으로 튀었다.
“개새끼, 이런 데 와서 같은 처지에 사장질 해 처먹는 게 무슨 큰 출세라도 한 걸로 아나 보군. 이 새끼야, 너도 똑같은 원생 신세란 걸 알아?”
“이 새끼, 죽어!”
사장이 번개같이 달려들어 백곰의 목을 찔렀다. 백곰이 몸을 구부리는 순간 사장은 그의 사타구니께를 힘껏 걷어차며 몽둥이로는 뒷덜미를 후려갈겼다. 급소를 연타당한 백곰은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땅에 손이 닿는 순간 곧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동시에 왕거미의 복부와 면상을 양발로 연속적으로 후려치곤 제자리에 우뚝 섰다.
“저 새끼를 잡아라! 목줄기를 따서 잡아 오는 자에게 사흘간 특식을 내리겠다! 어서 잡아와!”
원장의 명령이 내리자 수십 명의 원생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며 백곰에게로 달려들었다. 귀뚜라미에게 달려드는 개미떼와 비슷해 보였다.
결국 백곰은 제압당해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원장 앞으로 끌려갔다. 그 모습을 절름발이 처녀가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원장은 다짜고짜 백곰의 초췌한 뺨을 연거푸 올려붙이고 나서 말했다.
“넌 이곳에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는 암세포다!”
붉은 완장을 찬 대원들이 원장의 지시에 따라 백곰을 끌고 갔다. 백곰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걸었다.
용운은 망설이다가 저도 모르게 뒤따라갔다.
“반장님!”
“걱정 마, 임마.”
백곰이 말했다. 이어 그는 용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더니 작게 속삭였다.
“잘 있어.”
그는 말은 용운에게 하면서 눈길은 절름발이 처녀에게로 가 있었다.
그 후로 어디서도 그를 볼 수가 없었다. 머나먼 고하도 감호소로 이송되었다고도 하고 군대로 끌려갔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그런데 그 이후로 마을에서 외떨어진 방파제 쪽에 다시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리가 들렸다. 흰 소복 차림으로 밤바다를 바라보며 슬프게 흐느낀다는 것이었다.
방파제 귀신
용운은 얼마 후 어렵사리 기회를 잡아 무당집의 누나를 한번 찾아가 보았는데, 쇠락한 초가집 한 구석에서 박꽃 같은 미소를 희미하게 지었긴 해도 용운이 누군지 알아보지는 못했다.
용운은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젠 백곰 반장의 옅은 후광마저 없었으므로 오래 머물지 못하고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급히 선감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