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한국만…’ 살인 형량 낮은 이유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7.10 14:20:29
  • 호수 14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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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 아냐” 깎아주고 “심신 미약” 낮춰주고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살인범죄 재판서 가해자들은 모두 “고의가 아니었다” “심신미약 상태였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대부분 재판 과정서 형량이 줄어든다. 이 문제는 한국의 살인 범죄 유형이 세분화돼있지 않기 때문이란 의견이 있다.

살인 범죄가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주요 강력범죄 신고접수 건수가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10% 이상 늘어났다. 살인·강도·성폭력 등이 모두 두 자릿수 증가율을 보였다. 이는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로 시민들의 외출이 늘어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물가 상승·자산 가격 하락 등 경기 불안도 범죄 증가에 한몫했다. 

점점 느는
강력범죄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12월31일 기준 112 신고에 접수된 5대 강력범죄가 작년 동기 대비 각각 10% 이상 증가했다. 살인 범죄는 585건으로 전체 증가율이 23.4%에 달했다. 5대 강력범죄 중 가장 높은 증가율이다. 지난해에는 제주 유명 식당 대표 살인 사건, 이기영 살인 사건 등 흉악범죄가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범죄는 점점 잔혹해졌고, 발생 건수도 많아진 셈이다.

이처럼 살인 범죄가 증가하는 한편, 살인 범죄 양형기준은 모호해서 피해자 유가족들이 눈물 흘리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살인 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은 매우 중요하다. 살인 범죄는 다른 범죄에 비해 발생 건수가 상대적으로 낮지만,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가장 극악한 범죄고, 피해를 돌이킬 수 없는 만큼 기준도 명확해야 한다. 살인은 피해를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가장 높은 형벌이 부과돼야 하는 범죄다.


이런 이유로 살인 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은 다른 모든 범죄의 양형기준을 설정하는 하나의 기준점이 된다. 양형위원회서도 가장 먼저 의결한 1기 대상 설정 범죄 7개 범죄군 중 하나가 살인 범죄 양형기준이다. 7개 범죄군은 ▲살인 ▲뇌물 ▲성범죄 ▲강도 ▲횡령‧배임 ▲위증 ▲무고 범죄다. 

살인 범죄 양형기준은 2009년 7월1일 시행된 이후 지난 1일까지 네 차례 수정돼 현재 5개의 범죄 유형으로 나뉜다.

유형별로는 ▲참작 동기 살인(기본: 4~6년, 감경: 3~5년, 가중: 5~8년) ▲보통 동기 살인(기본: 10년~16년, 감경: 7년~12년, 가중:1 5년 이상, 무기 이상) ▲비난 동기 살인(기본: 15년~20년, 감경: 10년~16년, 가중: 18년 이상, 무기 이상) ▲중대범죄 결합 살인(기본: 20년 이상, 무기 감경: 17년~22년, 가중: 25년 이상, 무기 이상) ▲극단적 인명경시 살인(기본: 23년 이상, 무기 감경: 20년~25년, 가중: 무기 이상)이다.

이 같은 기준은 시대 흐름에 따라 변하는데, 살인 범죄 유형을 나누는 것 자체가 모호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부분의 살인 범죄의 형량이 너무 낮고, 1심서 높은 형량이 나오더라도 2심서 형량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타국에 비해 현저히 낮은 살인 형량
“범행 동기 이외 범죄유형도 구분해야”

실제로 중년 남녀를 연달아 살해한 혐의로 1심서 사형을 선고받았던 권재찬이 항소심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그는 2021년 12월 인천시 미추홀구의 한 건물서 50대 여성 A씨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후 A씨의 신용카드서 현금 수백만원을 인출하고 1100만원 상당의 귀금속도 빼앗았다.

권재찬은 A씨를 살해한 다음 날 인천시 중구 을왕리 야산서 공범인 40대 여성 B씨를 살해한 혐의도 받고 있다. 당시 권재찬은 B씨에게 A씨 시신이 부패할 수 있으니 야산에 땅을 파러 가자며 야산으로 유인한 뒤 살해했다. 경찰은 권재찬이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공범 B씨를 살해한 것으로 봤다.


서울고법 형사7부(이규형·이지영·김슬기 부장판사)는 지난달 23일 오전 권재찬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1심서 인정한 기획 살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강도 범행은 기획적 강도에 해당하나 살인은 기획 살인으로 보기 어렵다”며 “누구라도 사형이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을 만큼 특별한 사정이 존재하는지 의문”이라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다른 중대 살인 사건과의 비교도 필요해 보인다. 20년간 법원서 사형이 선고된 사건은 18건인데, 피해자가 불특정 다수거나 중대범죄 결합사건으로 미리 계획한 살인죄에 해당한다. 원심의 사형 선고에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피해자 유족들은 “저런 사람에게 인권이 있느냐”고 소리치며 법정 밖으로 나갔다. 해당 사건은 연쇄살인을 했지만 ‘기획 살인’이 아니기 때문에 사형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것이다. 사형 판결에 대한 부담감도 같이 작용했다.

유형 분류
모호 지적

또 다른 사건도 있다. 자신의 딸에게 신내림을 강요한다는 이유로 무속인 친누나를 폭행해 숨지게 한 혐의로 1심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60대 남성이 2심서 감형받았다.

지난달 16일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판사 이규홍)는 살인 혐의로 기소된 이모씨에게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징역 12년을 선고, 5년간의 보호관찰을 명령했다. 또 원심서 내려진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명령 청구도 기각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를 계획적으로 살해할 목적이나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가 신을 모시는 문제로 피고인의 가족을 괴롭혔고 범행 당일에도 딸에게 무당을 하라고 하자 우발‧충동적으로 살인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피해자의 상처와 사인 등을 종합할 때 피해자는 저항 없이 피고인에게 일방적인 폭행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굉장히 횟수가 많고 강한 힘으로 폭행을 가한 사실이 인정된다. 피해 사망 예견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피해자가 동생인 피고인으로부터 부당하게 죽음에 이르는 과정서 느꼈을 정신적 고통은 가늠하기 어렵다. 피고인은 이전에도 종교 문제로 처를 사망에 이르게 한 처벌 전력이 있다. 친족 생명을 두 번이나 빼앗은 것은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범행이 고의가 있어 보이지 않고 우발적으로 보이는 점, 유족인 딸이 처벌을 바라지 않는 처벌탄원서를 제출한 점, 피해자 사망을 발견한 직후 119에 신고한 점, 자백하고 반성하는 점 등을 고려해 피고인의 양형부당 주장을 일부 받아들였다”며 “폭행치사 전력을 고려해도 불특정 시민이 아닌 가족 간 신을 모시는 특이사항서 일어난 범죄다. 재발 위험성 평가서도 일반인 수준의 점수가 나왔다. 향후 일반인을 살해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잘못을 깊이 인정하고 있다”고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명령 청구를 기각했다.

반성하고 
뉘우치면?


부모가 자녀를 출산한 후 자녀를 버리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검찰이 남자친구와 강릉 여행을 갔다가 몰래 출산후 사흘 뒤 병원서 아이를 데려와 영하의 날씨 속에 길에 내다버린 20대 친모에게 실형을 구형했다.

인천지검은 지난달 20일 오전 인천지법 제14형사부(재판장 류경진) 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서 이같이 구형했다.

검찰은 “피해 아동을 출산한 지 3일이 지난 시점서 주거지에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고 남자친구와 양육 문제를 상의했다. 이후 다시 병원에 가서 범행을 저질렀는데,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이어진 상황서 범행한 것이라고 전혀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친모로서 보호의 의무를 저버리고 생후 3일 된 피해자를 살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범행으로 사인이 중대하다. 피해 아동을 양육할 의지도 보이지 않았고 범행 전후의 태도도 불량한 점을 고려해달라”고 구형 이유를 밝혔다.

친모 측 법률 대리인은 “피해자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서 범행한 것으로 영아살해죄가 인정돼야 한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강조했다.

친모는 최후진술을 통해 “진심으로 반성하고 뉘우치고 있다”고 말했다. 친모 측은 앞선 공판서 검찰이 기소한 죄명인 살인미수가 아닌 형량이 낮은 영아살해죄로 처벌해달라고 주장했다. 갑작스러운 출산으로 불안정한 정신 상태가 유지된 상태서 저지른 범행이라는 취지였다.


가해자 “계획한 범죄 아니다”
유가족 “살인자가 무슨 인권”

영아살해죄는 분만 중 또는 직후의 영아를 살해하면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돼있다. 영아살해죄보다 실인죄의 형량이 높아서, 영아살해죄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같이 살인범죄는 1심서 나오는 형량보다 감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양형위원회서 발간한 <2021 양형위원회 연간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살인범죄는 전체 473건 일어났다. 이 중 양형기준이 적용된 사건은 전체 428건인데, 살인 189건 중 제2유형 보통 동기 살인이 157건으로 가장 많았다. 그 외 제1유형 참작 동기 살인은 17건, 제3유형 비난 동기 살인은 8건, 제4유형 중대범죄 결합 살인은 7건이었다.

살인미수 사건은 전체 239건으로 살인과 마찬가지로 제2유형 보통 동기 살인이 212건으로 가장 많았다. 제1유형 참작 동기 살인은 14건, 제3유형 비난 동기 살인은 9건, 제4유형 중대범죄 결합 살인은 4건이었다. 

즉, 살인미수를 포함한 살인범죄 양형기준 적용 대상 범죄의 대부분이 제2유형인 보통 동기 살인으로 그 비중이 가장 높았다. 이 같은 결과는 양형기준의 범죄유형 세분화에 문제가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2010년 10월, 우발적 살인 대신 ‘살인에 대한 제한적 방어’를 인정하는 ‘자제력 상실에 의한 고의적 살인’ 조항이 ‘검시관 및 사법법’에 신설됐다. 영국은 고의적 살인과 우발적 살인을 구분하고, 구체적인 양형기준을 만들었다.

그러나 한국은 이런 구분이 없기 때문에, 피해자의 귀책사유가 인정되면 일반적인 살인보다 약하게 양형이 적용될 수 있다. 

우발적이냐
계획적이냐

<살인범죄 양형기준 고찰> 논문을 발표한 이재방 홍익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는 논문을 통해 “영국 살인 범죄 평균 형량은 20~25년으로 한국은 이보다 훨씬 낮다. 이는 한국 살인 범죄 대부분이 제2유형인 보통 동기에 속하게 때문”이라며 “양형기준 적용 대상의 80%가 제2유형에 해당된다면, ‘동기’ 이외의 새로운 기준에 의해 유형을 분류하든지, 아니면 현재의 유형 내에서 추가로 하위 세부 유형을 분류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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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