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특집> 끌려간 소년-소녀병들은 지금…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6.19 11:12:33
  • 호수 14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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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그들은 버려졌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6‧25전쟁 발발 73주년. 현재 한국은 전쟁의 참사를 찾아볼 수 없다. 박물관 정도 가야 확인할 수 있을까? 참사가 현실서 사라지듯, 같이 사라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6‧25전쟁 참전 소년-소녀병이다. 이제 이들도 백발 성성한 노인이 됐다. 이렇게 긴 세월이 흘렀지만, 소년-소녀병들은 6‧25전쟁 참전병으로 인정받기가 힘든 상황이다.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 4시. 한국의 역사를 가르는 6‧25전쟁이 발발했다. 6‧25전쟁은 북한이 기습적으로 한국을 침공하면서 발발됐다. 미국과 중국이 참전해 세계적 대규모 전쟁이 될 뻔했으나, 1953년 7월27일 오후 9시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에 따라 일단락됐다. 세계적 대규모 전쟁을 피했다 뿐이지, 6‧25전쟁은 한국이 치른 전쟁 중 가장 피해가 큰 전쟁이다.

“끌려가…”
강제 징병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한국군 전사자 13만8000명과 민간인 사망자 24만5000명, 피난민 651만명으로, 베트남 전쟁이나 2차 세계대전에 비해 6‧25전쟁은 민간인 사망자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을 정도로 처참한 전쟁이었다.

전쟁으로 발생한 이재민도 1000만여명이 넘었다. 이는 전체 인구 절반 이상이 피해를 본 것으로 가족을 잃거나 헤어진 사람들은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다. 

재산 피해는 추산이 어려울 정도다. 북한군에 밀려 마지막 교두보로 삼았던 부산을 제외한 전 국토가 초토화됐다. 국내 제조업의 42%가 파괴됐고, 군사작전에 이용될 수 있는 도로뿐만 아니라 철도, 교량, 항만, 학교 등은 물론 개인 가옥도 대부분 파괴됐다.


6‧25전쟁으로 집을 잃거나 고향을 떠난 피란민은 거처를 마련하기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미군 부대서 나오는 포장지와 통조림 깡통 등을 모아 엮어서 판잣집을 지어 살았다. 당시 대부분 국민은 우방국이 원조한 구호 식량과 나무껍질, 풀뿌리로 연명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서 끓인 꿀꿀이죽이 피란민의 주요 영양 공급원이었다. 어린아이들은 초콜릿을 얻기 위해 미군 병사의 꽁무니를 따라다녔고, 시장에나 거리에서는 담배를 팔거나 구걸하는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피해 규모를 비교할 순 없으나, 가장 큰 피해를 본 이는 6‧25전쟁 소년-소녀병이었다. 소년-소녀병은 18세 미만의 미성년자 군인이나 이들로 이뤄진 군대를 뜻한다. 이런 이유로 학생 때 자진해서 군에 입대한 학도의용병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10대에 전쟁 참여…지금도 강제 징집 논란
UN “미성년자 군사 목적 동원은 절대 금지”

하지만 학도의용병은 학생 신분으로 자진해 지원한 비정규군으로, 그 업적과 존재를 인정받았지만 소년-소녀병은 아니다.

소년-소녀병은 병역의무를 지우면 절대 안 되는 17세 이하의 아동임에도 현역병으로 징집돼 군번을 부여받아 정규군으로 참전했다. 국방부 군적에 남아 있는 인원만 무려 3만여명에 달한다. 그 속에는 소녀군도 500명이나 포함돼있다.

UN은 미성년자를 군사적 목적으로 동원하는 것을 ‘가혹한 형태의 아동노동’으로 판단해 엄격히 금지한다. 중대한 인격침해라는 것이다. 국제노동기구(ILO)의 협약서도 이를 금지하고 있다. 18세 미만을 소년-소녀병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6‧25전쟁 때 소년, 소년들은 어떻게 징집된 것일까? 15세에 대구서 중학교를 다니다 6‧25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2달 만에 징집된 생존 소년병 윤한수씨는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윤씨는 “(학교에 온 군인들이)‘제군들, 장교나 일반 병사로도 지원해서 모두 가거라, 나라가 이리 위중하다’며 징집을 권유했는데 법률적으로 우리는 병역의무를 이행할 나이가 안됐으니까, 그건 이제 설사 지원한다고 해도 안 받아 주는 게 원칙”이라며 “그런데 자고 나면 학생이 하나씩 없어졌다. 그때 방위군, 경찰관들이 와서 강제로 데리고 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전쟁 탓에 평범한 학생들이 강제적으로 군인이 된 것이다. 당시 윤씨는 키 160㎝가 안 됐다. 이때부터 책가방 대신 24㎏ 군장을 들어야 했다. 총 쏘는 법도 몰랐던 윤씨는 지옥 같은 전쟁터에 내던져졌다.

그리고 
버려지다

윤씨는 “전쟁터서 다친 아이들을 들것에 담고 내려왔다. 생명이 붙어 있는 놈들은 고함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몸 전체에 소름이 끼쳤다. 나도 곧 저리될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어린 소년병에게 담력을 키운다며 실험을 했다. 실험은 제네바 협정에 의해 포로를 잡으면 즉결심판 같은 것을 못 시키는데 즉결심판을 시켰다. 그 즉결심판 처형 사수를 소년병에게 시켰다. 나는 총 쏘는데 안 맞았다”며 “떨려서 잘 안 봤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고, 좌우간 내가 그걸 했다. 너무 무서웠다. 이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한다”고 하소연했다.

6‧25전쟁 당시 무려 1만2000명의 소년병이 가장 치열하고 위험했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 최전선에 투입됐다. 이때 전체 소년병 3만명 가운데 10%인 3000명이 전사했다.

6‧25전쟁 소녀병이었던 김명자씨는 이후 한국 최초의 여군이 됐다. 김씨는 한 방송 프로에 나와 “6‧25전쟁 당시 소녀 첩보원으로 활동했다. 16세에 군대에 들어가서 3년7개월 있다가 왔다. 어느 날 갑자기 비행기가 와서 폭탄이 떨어지면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며 “난리가 났었다. 그때 여군을 모집했다. 우리 동네서 여자만 20명이고 다른 동네 합쳐서 40명 넘게 트럭을 타고 갔다. 죽을 각오로 간 거다. 가서 싸우다 살면 살고, 죽으면 죽고. 정말 죽으러 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특수부대서 활동했다.

잊혀져 가는
그들의 고통

그는 “켈로 8240부대였고, 작전명이 ‘래빗’이었다. 당시에는 이게 뭔지 몰랐다. 중3이 ‘켈로’가 뭔지 어떻게 아느냐. 아군서 파악하지 못한 걸 보고 알리는 일이었다. 첩보활동이라 비밀을 알아와야 했다. 각자 맡은 게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맡은 임무는 비밀이었다”며 “나는 먼 곳으로 파견돼 100리, 200리를 걸어갔다. 산속이니 엄청 힘들었다. 치마저고리 입고 고무신 신고 다녔다. 겨울에는 발이 얼어서 말도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게 하다가 도중에 시체도 못 찾고 죽는 사람이 허다했다. 50명 모집해서 나처럼 임무를 하다 30명쯤 죽으면 또 가서 모집했다. 나는 죽으러 왔는데 왜 살고 살려고 바둥댄 사람들은 다 죽었다. 울적하면서도 슬프고 이게 인생인가 싶었다. 떠난 동료들이 생각나 잠도 못 잔다”고 토로했다.


이 같은 트라우마로 소년-소녀병들은 일생을 고통 속에서 보낸다. 이유는 참혹한 전투서 동료들을 두고 혼자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소년병 참전자로 강제 징집된 장성곤씨는 3주간의 훈련을 받고 곧바로 전투에 투입됐다. 장씨는 “바로 시체를 넘고 다니는 그런 상황이었다. 지금까지도 그 광경이 뇌리에 박혀서 떠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전투 중 머리에 포탄 파편을 맞는 등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남은 건 정신적‧물질적 상처뿐이다.

그는 “피해는 말도 못한다. 거지가 됐다. 당연히 학업을 못 했는데, (군대에)3~4년 있다가 나오니까 다른 사람들은 졸업을 했다. 우리는 군에 갔다 왔기 때문에 졸업장이 없으니 대학을 가지 못했다”고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고 일어나면 사라진 동네 아이들
“폭탄 떨어져 죽고, 총 쏴서 죽이고”

이런 상황 속에 ‘6‧25전쟁 참전 소년-소녀병 명예선양법이 더 이상 미뤄지면 안 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소년-소녀병이 나라 존망 위기서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집중 투입되는 등 희생됐지만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바른미래당 전 유승민 의원이 19·20대에 걸쳐 두 차례 ‘6‧25전쟁 참전 소년-소녀병 보상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으나 끝내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21대 국회서도 국민의힘 강대식·임병헌 의원이 2020년과 지난 3월 각각 관련 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현재 국회 국방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 계류돼있다.

이 법안의 목적은 ‘6‧25전쟁 당시 병역의무 대상 연령이 아닌데도 징집 또는 소집돼 참전한 소년-소녀병 및 그 유가족의 특별한 희생과 공헌에 합당하게 예우하고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해당 법안에는 ▲소년-소녀병 및 그 유족에 대한 위로금 지급 등에 관한 사항을 심의‧의결하기 위해 국방부 장관 소속으로 소년-소녀병 위로금 지급심의위원회를 설치 ▲6‧25전쟁 당시 병역의무 대상 연령이 아닌데 참전해 희생한 소년-소녀병과 그 유족에 대한 예우에 관한 사항을 규정 ▲소년-소녀병의 희생을 보상하기 위해 소년-소녀병 또는 그 유족에게 위로금 지급 ▲위로금 지급 심사를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위원회가 검증 또는 조사를 할 수 있도록 함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소년-소녀병을 추모하고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 및 추모기념관 건립 등 기념사업을 추진하도록 함 등의 내용이 들어가 있다.

임 의원은 “소년-소녀병들의 특별한 희생과 공헌에 합당한 예우가 시급하다. 소년-소녀병들의 명예회복은 물론 국민의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일익이 될 것인 만큼 조속한 법안 통과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강 의원은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어린 소년-소녀병들이 이제는 백발의 노인이 됐다. 남은 분도 2000여명이 되지 않는다. 21대 국회에서는 반드시 6‧25전쟁 참전 소년-소녀병들의 헌신과 희생에 대한 합당한 예우가 이뤄질 수 있도록 여야가 한마음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정부 조사기관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소년-소녀병 강제징집 사건을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만 17세 미만 소년-소녀들이 강제 징집되는 과정서 인권침해가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늦었지만…
시작된 조사

정영훈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국 국장은 “아동 소년병에 대해 법적 근거 없이 입대 혹은 징집시켜서 군 복무를 시킨 점은 인권을 침해한 것으로 봐 조사 개시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진실규명 신청인인 하경환 변호사는 “지금이라도 대통령께서, 국무총리께서, 국방부 장관께서 어르신들을 직접 찾아뵙고 ‘너무나 죄송하고 감사하다’ 이 말씀을 꼭 드려주셨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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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