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갤러리현대가 김아영 작가의 개인전 ‘문법과 마법’전을 준비했다. 김아영은 한국 근현대사, 지정학, 이송, 초국적 이동 등 역사적 사실과 동시대의 첨예한 이슈에 대한 방대한 리서치를 통해 복합적인 내러티브로 재구성한 작업을 선보여 국내외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다.
김아영은 영상·사운드·퍼포먼스·소설·텍스트 등 매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변서사·픽션 만들기, 내러티브성, 세계 구축, 신화 짓기 등의 전개 방식을 통해 다차원적이고 유동적인 이야기를 창조한다. 그의 작품은 기존의 영상 미학에서 벗어난 독창적 접근과 상상력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다.
사실?
김아영은 개인전 ‘문법과 마법’ 전시에서 여성 배달 라이더 에른스트 모(Ernst Mo)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에른스트 모는 Monster(괴물)의 철자를 재배치한 이름이다. 에른스트 모는 테크노 오리엔탈리즘과 아시아 퓨처리즘 사이에 놓인 가상의 도시 ‘서울’에 산다.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배달 플랫폼, 딜리버리 댄서의 소속 라이더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라이더는 댄서로 지칭되는데, 일반-파워-마스터-신-고스트 순으로 계급화돼 구분된다. 에른스트 모는 최상의 능력자인 고스트 댄서다. 댄서에게 무한 수신되는 배달 콜과 배달경로는 정신착란증을 부르는 미로와 같다. 이들은 앱 디바이스의 명령에 따라 도시의 구역을 춤추듯 쉴 새 없이 질주한다.
어느 날 에른스트 모는 또 다른 가능세계에서 자신과 완벽하게 닮은 엔 스톰(En Storm, Monster의 철자 재배치)을 만난다. 동일한 시공간에서 공존 불가능한 사태와 관계의 다면을 마주하며 혼란을 겪는다. 이후 엔 스톰과 조우를 반복하면서 라이더에겐 치명적인 페널티 누적을 받게 된다.
그동안 김아영은 경계를 넘는 다양한 주체와 사건에 관심을 가져왔다. 국경을 넘어 발생하는 생태·정치·경제·사회적 관점의 비자발적 이주에 관한 작품을 발표했다. 이 같은 관심은 팬데믹 시대에 사람 간의 단절된 관계를 연결하는 배달 라이더와 같은 플랫폼 노동자에게로 이어졌다.
단어 재배치한 이름
가능세계론 배경으로
김아영은 특히 바이크를 몰고 다니는 여성 라이더의 삶에 집중했다. 베테랑 여성 배달 라이더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실제 현장에 동행했다. 그러면서 라이더가 배달 과정에서 겪는 앱과 연동된 기이한 신체감각, 뒤틀린 시공간의 개념을 가능세계론과 접목했다.
가능세계론은 현재 존재하는 세계가 무수히 많이 존재하는 세계 중 하나라는 이론이다.
무수히 많이 존재하는 세계의 논리에 따라 완벽하게 동일한 세계가 둘 이상일 가능성이 있다. 이 동일한 세계에서는 개별적 구성원조차 완벽하게 동일할 수 있다. 김아영은 가능세계론을 적용한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여성 배달 라이더 에른스트 모가 자신과 동일한 존재를 만나 발생하는 사건을 사변적 픽션으로 완성했다.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이 존재하는 다중적 시공간의 세계, 서로 싸우고 연민하거나 사랑하는 그들의 복잡 미묘한 관계, 비논리적이고 비선형적인 이야기의 구조 등을 배경으로 제작된 영상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여기에 월페이퍼 설치, 조각 작품 등 총 11점의 신작으로 이번 전시를 구성했다.
1층 전시장 중앙의 ‘고스트 댄서 A’ 작품은 천장에 매달린 두 헬멧이 대적하듯 노려보는 작업으로, 전시의 배경이 되는 세계관 속 두 주인공을 상징한다. SF영화에 등장하는 절단된 기계 신체의 일부를 떠올리듯 척수나 내장이 늘어진 것처럼 검은 전선이 바닥까지 이어진다.
인터뷰하고 실제 동행
팬데믹 이후 배달 늘어
두 헬멧의 얼굴에서 배달 라이더가 도시의 도로와 골목을 경쟁하듯 질주하는 장면을 게임 엔진으로 구현한 영상이 상영된다.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의 바이크는 엄청난 속도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아슬아슬하고 현기증 나는 레이스를 펼친다.
지하 전시장에서 상영되는 24분가량의 영상작품 ‘딜리버리 댄서의 구’는 전체 작품을 아우르는 세계관을 종합적으로 담고 있다. VR(가상현실) 등을 활용해 영상 제작 문법과 매체적 전환에 관해 고민해온 김아영은 혼합현실 혹은 다중현실의 물리적 지지체와 가능세계의 수많은 가능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듯 혼종적 이미지 제작 방식을 도입했다.
2층 전시장의 양 벽면을 뒤덮은 가로 20m, 세로 3m의 거대한 월페이퍼 작품 ‘다시 돌아온 저녁 피크 타임’은 웹툰 작가 1172와의 협업으로 완성됐다. 2층 전시장 안쪽에는 3개의 조각 ‘궤도 댄스’ 연작이 매달려 있다. 이 작품은 이번 전시의 주요한 내용과 개념을 구조적으로 완성한 상징물이다.
진실!
갤러리현대 관계자는 “김아영은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 이면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이동하고 전복되는 여정을 통해 들려주고 있다”며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왔던 모든 사실이 흔들리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전 지구적 위기 상황에서 그의 작업은 우리의 사변적 사상을 자극해 누락되고 잊힌 이 세계의 진실을 마주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다음 달 14일까지.
[김아영은?]
1979년 서울 출생으로 한국에서 시각디자인, 영국에서 사진과 순수 미술을 전공한 후 주로 유럽에 체류하며 작품 활동을 해왔다.
물리적·비물리적으로 장소를 떠나거나 이동하는 모습, 바다를 건너고 국가를 넘나드는 초국가적인 사건 등에 관심을 가져온 작가는 실제로 한동안 유럽의 여러 도시를 떠돌아다니면서 불안정한 생활을 경험했다.
예측 불가능한 프레카리아트의 삶, 불안정과 우발성이 내면화된 삶을 경험하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주민 특유의 정서와 그에 따른 지정학적 배경에 대해 관심을 갖고 특유의 사변적 픽션을 더해 무한한 상상력으로 작품을 구성한다.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