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어느 덧 한국 영화계에서 정통 멜로는 죽은 장르가 됐다. 이제는 쉽게 볼 수도 없다. 파격적이고 자극적인 소재와 빠른 속도감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느린 전개를 바탕으로 절절한 감정을 내세우는 정통 멜로는 손익분기점을 넘기기도 어려워졌다.
멜로 계보가 끊겨가는 가운데 한 우물만 파고 있는 김종관 감독이 출사표를 냈다. 배우 한지민과 기대주 남주혁과 함께 만든 <조제>다. 일본 원작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리메이크했다.
정통 멜로의 계보를 이어가는 유일한 감독이라는 점과 영화 <미쓰백> 이후 강력한 연기력을 장착한 한지민, 수려한 외모에 이어 다수의 작품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는 남주혁의 만남은 기대를 모았다.
지난 2일 언론시사회가 진행되며 베일을 벗은 <조제>의 결과물은 아쉽게도 기대 이하다. 원작의 묘미를 살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기본적인 스토리의 개연성이 어긋난 모양새다. 배우들의 열연이 영화의 작품성을 높이는 기능을 하는데는 실패했다.
영석(남주혁 분)은 우연히 쓰러져 있는 조제(한지민 분)을 발견한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 조제가 휠체어에서 떨어진 것을 보고 황급히 달려간다. 리어카에 조제와 휠체어를 태우고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준다. 조제 입장에선 연신 고마움을 표현할 법한데, 반말을 일삼다가 그저 밥이나 먹으라고 한다.
영석은 지방대 학생이지만 장기가 많다. 성격이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덕에 교수에게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여성을 꼬시는 데도 남다른 능력이 있다. 젊은 교수의 ‘섹스 파트너’이며, 자신을 좋아하는 후배의 마음을 훔치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서글서글한 성격이기에 가능한 장기다.
그런 좋은 성격으로 조제의 할머니를 돕다 다시 조제와 마주한다. 이후에는 휠체어를 고쳐주겠다고 조제의 집을 찾고, 조제의 집을 보수해주는 복지관을 직접 연결해주며 꾸준히 연락을 이어간다. 여러 명목을 만들어 조제를 만난다. 고아 출신이지만 자신만의 세계에서 깊은 지식을 드러내는 조제를 사랑하게 된다. 사랑에 빠진 영석은 현실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
장애인과 졸업을 앞둔 대학생의 사랑은 원작에서도 나온다. 김종관 감독의 연출작 <조제>와 원작의 가장 큰 차이는 조제의 성격이다.
원작의 경우 조제(아케와키 치즈루 분)는 날카로운 면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밝고 긍정적이다. 요리를 하면서 넘어지기 일쑤지만 그녀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언제나 당차면서 희망적이다. 섹스에 대한 생각도 굉장히 개방적이다. 장애인이기 이전에 매력적인 여자다.
조제를 사랑하는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 분)는 다소 지질하다. 수려한 외모는 갖췄지만 사회에 낙오된 이미지로 부정적이며 어두운 면이 있다. 몸은 성하지만 마음이 성치 않다. 그런 츠네오가 다리만 없을 뿐 당차고 똑똑한 조제를 사랑하는 건 자연스럽다.
<조제>의 조제는 원작과 반대로 너무 어둡다. 세상과 단절돼있을 뿐 아니라 사람을 대할 때 일부 무례하다. 낮은 자존감으로 상대를 불편하게 하기도 하며, 부정적이다. 마음은 심하게 상처를 입은 듯하며, 힘이 없다. 동정심이 생기기는 하나 매력을 느끼기엔 부족한 요소가 많다.
그러다 보니 영석이 조제를 사랑할만한 이유는 보이지 않는다. 영석은 여성과 만남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비교적 좋은 일자리도 얻을 수 있다. 굳이 몸도 성치 않을 뿐 아니라 감정 소모를 해야 하는 성격의 조제를 만날 이유가 보이지 않는다.
사랑을 하는 계기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보다보면 ‘영석은 왜 저러고 있나?’하는 의문이 생긴다. 영석이 왜 지극정성으로 조제를 대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현실성이 떨어진다.
인물의 감정선이 전달되지 않다 보니 하이라이트에서 인물들이 보이는 절절한 감정신도 이입되지 않는다.
멜로 장르의 특성이 감정이 켜켜이 쌓다가 후반부에 터뜨리는 게 일반적인 공식인데, 불발된 느낌이다. 모호하고 흐릿한 감정선만 이어지다 갑작스럽게 터뜨리는데, 여운이 남지 않는다. 관객이 감정에 이입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 또 이야기 전개 속도는 매우 느리다. 집중하고 몰입해서 보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저 빼어난 영상미에만 감탄할 뿐이다.
작품은 호평하기 어렵지만, 이상하게도 배우들의 연기는 잔상이 많이 남는다. 한지민의 경우 나약한 조제를 훌륭히 표현한다. 애초에 설정대로 쭉 밀어붙인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흠이 없다. 다만 인물의 방향성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남주혁은 매력적인 영석을 안정적으로 묘사했다. 인물이 가진 건실함이 전반에 드러나며, 여자의 마음을 훔칠 때는 귀엽고 섹시하다. 다만 그 매력이 이야기의 개연성을 방해한다.
조복래가 연기한 점봉의 설정은 아쉬운 대목이다. 내면에 쌓인 불편함을 무례하게 표현하는데, 그 근거가 없다. 혹시 고아라는 설정이 이유라면, 너무 어리석은 선택이다.
또 영석과의 식사 신에서의 웃음 연기는 불필요해 보인다. 개성 강한 배우 조복래의 연기력이 제자리걸음 중인 것 같아 걱정이 든다.
장애인을 대하는 연출진의 태도가 통념에 치우친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장애인이면 외롭고 슬프며, 피해 의식이 가득하다는 일반적인 통념이 보인다. 굳이 밝고 활달했던 조제를 나약하게 묘사할 이유가 있었을까.
육체가 정상적이지 않더라도 긍정적이고 밝게 살아가는 사람이 적지 않다. 육체와 무관하게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도 많다. 천체물리학을 통해 인류 발전에 기인한 사람도 몸이 성치 않다. 혹시 사랑이라는 감정에 과몰입하던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편협한 태도를 드러낸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불편함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