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9부 능선 넘은 유명희 산업 통상자원본부장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20.10.26 11:10:27
  • 호수 12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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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모두가 응원합니다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한국인 최초 세계무역기구(WTO) 수장이 나올 수 있을까.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사무총장 선거에서 결선에 진출에 성공했다. 그는 과거 통상 분야에서 폭넓은 경험과 전문지식을 쌓아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1967년 울산에서 태어난 유 본부장은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했다. 1991년 제3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전부터 통상 분야에 관심을 두고 노력한 결과다. 

여성 1호
협상 전문가

그는 지난 1995년 통상산업부의 여성 통상 협상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선발한 ‘정부 공인’ 제1호 여성 통상 협상 전문가다. 1998년 통상 기능이 외교통상부로 이관되면서 통상산업부에서 외교통상부로 자리를 옮겼다. 외교통상부에서 자유무역협정(FTA)정책과장, FTA 서비스교섭과장, 주중국대사관 1등 서기관과 참사관 등을 거치며 여러 협상에서 중요한 실무자로 참여했다. 

통상 업무가 외교부에서 다시 산업부로 통합 이관된 이후엔 산업부에서 FTA 교섭관 겸 동아시아 FTA 추진기획단장, 통상정책국장, 통상교섭실장 등 통상 현안을 진두지휘했다.

1948년 상공부(현 산업부) 설립 이래 여성 공무원으로서는 역대 최초로 실장급(1급) 고위 공무원에 오르면서 공직 사회의 ‘유리 천장’을 넘어선 인물로 주목받았다. 2014년 박근혜정부 때는 청와대 홍보수석비서실에서 외신 대변인으로 일한 이력도 있다.


그는 2018년 11월 돌연 사표를 제출했다. 문재인정부가 출범하면서 당시 그는 “더 승진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일각에선 ‘남편 리스크’도 제기했다. 그의 남편은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정태옥 전 의원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그의 사표를 반려하고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승진시켰다. 전임 김현종 현 국가안보실 2차장의 추천이 있었다고 한다.

여권 핵심 인사는 “2017년 민유숙 대법관을 지명할 때도 남편이 안철수 전 대표의 최측근인 문병호 전 국민의당 의원이라는 점 때문에 논란이 됐지만 문 대통령은 민 대법관을 임명했다”고 전했다.

당시 청와대는 유 본부장에 대해 “공직생활 초기부터 통상 분야에서 활동해온 최고의 통상 전문가”라며 “굵직한 통상 업무를 담당하면서 쌓아온 업무 전문성과 실전 경험, 치밀하면서도 강단 있는 리더십으로 당면한 통상 분야 현안을 차질 없이 해결해나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최초의 여성 본부장이 된 유 본부장은 일본 후쿠시마산 농수산물 수입금지 문제를 둘러싼 WTO 2심에서 승소했다. 1심에서 패소한 사건을 뒤집으면서 그 능력을 입증해보였다.

여성 최초 실장급 고위공무원 이력
일본 농수산물 2심 승소…능력 입증

무역 분쟁의 최종심 격인 상소기구는 한국의 수입금지 조치가 자의적 차별에 해당하지 않으며 부당한 무역 제한도 아니라고 판단했다. 1심에서 일본의 손을 들어줬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결정을 뒤집고 모두 한국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상소기구는 세슘 검사만으로 적정 보호 수준을 달성할 수 있는데도 수입금지와 기타 핵종 추가 검사를 요구한 조치는 무역 제한이라고 본 1심 패널 판정을 파기하면서 과도한 조치가 아니라고 봤다.

앞서 1심 패널은 한국의 수입 규제 조치가 WTO 위생 및 식물위생(SPS) 협정에 불합치된다며 일본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SPS 관련 분쟁에서 1심 결과가 뒤집힌 것은 처음이다. 다만 상소기구는 한국 정부가 수입금지 조처와 관련해 일본에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며 절차적인 부분만 일본의 손을 들어줬다. WTO 상소 기구가 우리 정부의 일본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에 대해 판정한 데 대해 시민단체들이 “환영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 ▲ 유명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일본산 수산물 수입 대응 시민 네트워크’ 측은 “국민 안전이 승리했다. 1심 패소라는 불리한 상황을 뒤집기 위해 노력한 정부에 감사한다”고 밝혔다.

지난 6월24일 당시 유 본부장은 WTO 차기 사무총장에 도전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유 본부장은 당일 세종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공식 출마를 선언했다.

유 본부장은 “WTO 사무총장이 되면 국익에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출마의 변을 밝혔다. 한국은 이번이 세 번째 WTO 사무총장 도전이다.

1994년 김철수 상공부 장관과 2012년 박태호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이 출마했으나 최종 선출에는 실패했다. 차기 사무총장 선출 레이스는 브라질 출신 호베르투 아제베두 현 사무총장이 임기 1년을 남기고 지난달 돌연 사임 의사를 밝히면서 본격화됐다.

선거 초반 구도는 흥미진진하게 짜였다. 입후보자 8명 중 미국·유럽연합·중국·일본·인도 출신은 없다. 세계무역기구 총장 선출 규정에 지역 안배가 ‘고려사항’으로 돼있으나 특정 지역마다 순번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국익에
도움될 것”

외신과 세계무역기구 본부가 있는 스위스 제네바 안팎에서는 사실상 여성 후보 간의 대결로 압축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세계은행에서 25년 근무한 이력을 발판으로 국제사회에서 ‘정치적 헤비급’으로 평가받는 오콘조이웨알라가 먼저 등록을 마쳤고, 이어 유 본부장이 도전장을 낸 뒤에 모하메드가 막판 가세했다. 유 본부장이 모하메드의 출마를 사전에 감지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모하메드는 2015년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 의장을 맡는 등 막강한 ‘국제통상 헤비급’으로 불린다. 일각에서는 “모두 특유의 언변과 뛰어난 조직 장악력을 갖춰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분석하고 있다. 우리 정부 선거캠프도 ‘여성 후보 3파전’을 선거판 형세로 판단하고 전략을 짜는 분위기다.


일본 정부는 유 본부장에 대해 명확한 찬반 의사 표명을 하지 않고 있지만, 수출규제를 놓고 갈등을 겪고 있는 한국의 사무총장 후보를 향해 경계심을 갖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이에 따라 WTO를 둘러싼 한-일 정부의 신경전이 거세지고 있다. 한국이 일본의 대한국 수출규제를 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한 데 이어, 일본은 한국의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 도전을 적극적으로 저지할 태세다.

일본 정부는 지난 7월 유 본부장이 도전하는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 선출에 관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가지야마 히로시 경제산업상은 이날 정례 기자회견에서 “사무총장은 코로나19 대응과 세계무역기구 개혁 등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인지가 중요하다”며 “그런 관점에서 일본도 선출 프로세스에 확실히 관여해 나가고 싶다”고 강조했다.

마감 전날 오후까지 유 본부장을 포함해 멕시코, 나이지리아, 이집트, 몰도바 등 5개국 후보가 출사표를 던졌다. 가장 유력한 주자였던 필 호건 유럽연합(EU) 무역 담당 집행위원은 최근 출마 포기 의사를 밝혔다.

‘한국인 첫 사무총장 배출’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점쳐지는 가운데, 일본의 견제도 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도 전 세계 외교망을 총동원해 ‘중견국·중재자론’을 앞세워 회원국 공략에 나설 방침이다.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 선출은 164개 회원국별로 후보 선호도를 조사해 지지도가 낮은 후보부터 탈락시켜 한 명만 남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최종 선출까지 통상 6개월이 걸리지만, 현재 사무총장이 8월 말에 사임한다고 밝힌 만큼 리더십 공백을 줄이기 위해 절차가 앞당겨질 가능성도 높다.


일본 언론도 유 본부장의 출마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는 눈치다.

정부도 
대통령도

<요미우리신문>은 유 본부장에 대해 “한국과 수출관리 강화를 놓고 대립하는 일본이 어떻게 대응할지 관심거리”라고 보도했다. 앞서 <지지통신>은 “일본 정부가 한국에서 사무총장이 나와 국제적 발언력을 높이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산케이신문>도 “한국 출신 사무총장이 탄생할 경우 일본의 통상정책에 불안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WTO에 제소된 일본의 대한국 수출규제 문제가 본격적인 심사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한국과 일본의 기싸움도 치열하다. 세계무역기구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회원국의 무역정책 전반을 논의하는 회의를 진행했고, 지난 6일 일본 차례가 됐다. 

40여개 국가·지역 대표들이 참여한 자리에서 한국 대표는 “일본 정부가 지난해 7월 한국에 대한 반도체 원자재 등 수출관리를 강화한 조치는 정당한 이유가 없어 모두 무효라고 주장했다”고 일본 방송 NHK가 보도했다. 일본의 조치가 부당하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호소한 셈이다.

결국 유 본부장이 WTO 사무총장 선거에서 최종 라운드 진출에 성공했다. 지난 8일 <로이터통신>과 <블룸버그> 등 외신에 따르면 유 본부장은 최종 결선에서 나이지리아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후보와 일대 일 대결을 펼친다.

최종 결선에서 오콘조이웨알라 후보와 유 본부장 여성 후보 두 명이 맞붙게 되면서 ‘새로운 여성 리더십’이라는 구호는 이제 무의미해졌다. 유 본부장이 결선 무대에 내세울 두 개의 칼날은 현직 통상 장관이라는 점과 상대적으로 우위인 국력이다.

유 본부장은 처음부터 후보 8명 중 유일한 현직 장관이라는 점을 어필해왔다. 특히 WTO가 각종 갈등으로 위기에 봉착해 난관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 이 무기는 그를 최종 관문으로 끌어올리는 데 빛을 발했다.

WTO는 세계 경제 1·2위 국가인 미국과 중국 간 무역전쟁, 짙어지는 보호무역 색채, 코로나19 세계적 대유행에 따른 통상 차질과 경기 침체 등 난제에 직면했다. 여기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분쟁 해결 방식이 지나치게 중국에 친화적이라며 사실상 WTO를 보이콧하고 있다.

이에 유 본부장은 미국과 유럽을 잇달아 순방하며 “다양한 국가와 통상 협상을 타결시킨 경험을 갖고 있으며 현직 통상장관으로서 정치적 역량을 지닌 본인이 이 같은 WTO 개혁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적임자”라고 지지를 호소했다.

경쟁자인 오콘조이웨알라 후보는 비록 현직은 아니지만, 나이지리아 재무장관과 외무장관을 역임했으며 세계은행에서 오랜 기간 근무해 인지도가 높다는 부분을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한국인 세 번째 WTO 사무총장 도전
나이지리아 후보와 2파전…가능성은?

둘째는 국력이다. 전 세계에 뻗은 한국 인맥과 자원을 총동원해 ‘아프리카 대세론’을 무너뜨린다는 복안이다. 당초 이번 선거는 아프리카에서 아직 한 번도 사무총장이 나온 적이 없어 아프리카 두 후보 간 결선 대결이 펼쳐질 것이라는 분석도 많았다.

결선까지 가게 된 유 본부장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7월부터 최근까지 스위스, 미국, 프랑스, 스웨덴 등을 방문해 각국 대사와 주요 인사를 만나 활발한 유세 활동을 벌였다. 
 

물론 아직은 낙관하기 어렵다. 최대 투표권을 보유한 아프리카 대륙이 결선 과정을 거치며 2명의 후보 중 오콘조이웨알라 후보로 자동 단일화가 이뤄져 표가 집중될 수도 있다. 또 한국과 무역분쟁이 얽혀 있는 타 국가들이 아프리카를 선호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일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이집트 정상과 잇따라 정상 통화를 하고 WTO 사무총장 선거 결선에 진출한 유 본부장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문 대통령은 먼저 이날 오후 5시30분에 자비에 베텔 룩셈부르크 총리와 통화한 데 이어 오후 6시에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와 통화했다.

문 대통령은 통화에서 “지난 1∼2차 라운드에서 보여준 유 본부장에 대한 유럽연합(EU)의 단합된 지지에 감사하다”며 “차기 사무총장은 WTO를 개혁해 자유무역 체제를 수호하고 다자무역 체제의 신뢰를 회복할 역량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모든 대륙에 걸쳐 폭넓은 지지를 받는 유 본부장이야말로 WTO 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최적임자”라며 지지를 당부했다.

이에 베텔 총리와 콘테 총리는 유 본부장의 결선 선거 진출을 축하하면서 뛰어난 역량과 WTO 개혁 비전, 통상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을 갖춘 유 본부장의 선전을 기원했다고 청와대는 전했다.

문 대통령은 오후 10시에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과도 통화했다.

앞서 유 본부장의 WTO 사무총장 선출을 위해 총력 지원을 약속한 문 대통령은 지난 7월부터 뉴질랜드를 시작으로 호주, 러시아, 독일, 브라질, 말레이시아 등 정상과 통화하고 지속해서 유 본부장에 대한 지지를 요청해왔다. 

일본 경계
지원 총력전

문 대통령은 코로나19 재확산 우려를 표하며 국제사회의 연대와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베텔 총리와 콘테 총리는 한국의 모범적인 코로나 대응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정세균 국무총리도 마힌다 라자팍사 스리랑카 총리, 세사르 기예르모 카스티요 레예스 과테말라 부통령과 통화를 하고 유 본부장을 지지해 달라고 당부했다.
 

<9do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유명희 남편 과거 막말 논란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의 남편 정태옥 전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의원의 과거 막말 논란이 재조명되고 있다. 

정태옥 전 의원은 제 20대 국회 초선 국회의원으로서 당시 새누리당 경선에 당선돼 정치에 입문해 2014년 8월부터 2015년 10월까지 대구광역시 행정부시장을 역임했다.

이후 2016년 5월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 체제가 출범하자 새누리당 원내부대표에 임명됐다.

같은 해 12월 정우택 원내대표 체제에서도 유임됐다.

그는 지난 2018년 6월 지방선거에서 “이혼하면 부천 가서 살고 망하면 인천 가서 산다”는 발언을 해 부천 및 인천 시민들에게 큰 질타를 받았다. 

자유한국당 대변인을 맡았던 그는 “서울 사람들이 양천구 목동 같은 곳에서 잘 살다가 이혼 한 번 하거나 하면 부천 정도로 가고, 부천에 갔다가 살기 어려워지면 인천 중구나 남구, 이런 쪽으로 간다”며 “지방에서 생활이 어려울 때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은 서울로 온다. 그런 일자리를 가지지 못하지만, 지방을 떠나야 할 사람들이 인천으로 오기 때문에 실업률, 가계부채, 자살률이 높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해당 발언은 ‘이부망천’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여야 모두에게 큰 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정 전 의원은 사과와 함께 자유한국당 대변인직에서 물러났다.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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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