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세탁해 14년 간 도피한 LA갱단 조직원

영어만 잘하면 신분은 몰라도 그만?

[일요시사=최형호 기자] 미국 갱단 조직원으로 살인미수 범죄를 저지르고 국내로 도피해 신분을 세탁한 뒤 서울 강남의 영어학원장으로 활동하던 30대 남성이 14년 만에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김모(33·남)씨는 서울 강남의 한 에스에이티(SAT·미국의 대학입학 자격시험)학원 원장으로 일해 왔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이었으나,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신분을 도용해 ‘유학파 한국인’으로 살았다.

살인미수 후 국내로 도피한 한국계 미국인 범죄자 
강남에서 어학원장으로 연 1억 4000만원 벌어들여

사건은 1997년 5월2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었고, 필리핀계 갱단인 FTM(FLIP TOWN MOB) 조직원이었다. 당시 그곳에는 경쟁관계에 있던 지역 갱단들끼리 세력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멕시코계 갱단 2명에게 권총을 쏜 뒤 경찰의 추격을 피해 도망쳤다. LA경찰국은 이 사건 이후 김씨를 1급 살인미수 혐의로 수배했다.
 
김씨가 한국에 들어온 건 사건이 일어난 지 두 달이 채 안 된 7월 초였다. 김씨는 수배를 피해 몰래 한국으로 입국했다. 그리고 영어학원 강사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이 1급 살인자라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김씨는 LA에 있던 삼촌 문모(54)씨에게 부탁해 신분을 세탁했다. 삼촌인 문씨는 김씨에게 같은 마을에 살다 미국으로 이민 간 이모(31)씨가 그와 같은 나이란 사실을 알려줬다.

인터넷에 덜미 잡혀

김씨는 가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는 과정에서 문씨의 동네 사람인 최씨의 도움도 받았다. 최씨는 주민센터에서 김씨와 이씨가 동일인물이라고 속였다. 주민센터는 당시 마을의 반장이었던 최씨를 믿고 별 의심 없이 주민등록증을 발급해줬다. 김씨는 2002년 3월 지문등록까지 마친 뒤 이씨 이름으로 강남지역에서 영어 강사로 활동해왔다.

또한 이씨의 이름으로 여권과 운전면허증을 새로 발급받거나 수차례 갱신하면서 중국, 대만, 홍콩 등지로 34차례나 해외여행까지 다녀왔다.

신분을 세탁한 김씨는 강남 일대 어학원에서 영어학원 강사로 일했고, 이 과정에서 알게 된 강모(36·남)씨와 2008년 12월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SAT 어학원을 설립했다. 재미교포 2세로 LA의 고등학교 중퇴자인 김씨와 강씨는 자신들을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UCLA)와 샌디에이고주립대 출신이라고 속이고 학원생을 모집했다.

그것도 모자라 직접 강의까지 했다. 그들의 수입은 1년에 1억4000만원이었다. 또, 자격증이 없는 영어강사를 고용해 초, 중,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김씨는 학원 운영에 성공하자 지난달 결혼까지 했다.

탄탄대로를 걷는 듯하던 김씨의 삶은 미국에 사는 교포가 지난 6월 한 인터넷 카페에 “미국 수배자가 영어강사로 활동한다”는 글을 올리면서 과거의 범죄행위가 발각됐다.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최근 미국 수배자가 신분세탁을 거쳐 영어강사로 활동한다는 첩보를 접한 뒤, 이 제보를 바탕으로 미 수사당국과 공조해 이씨 이름으로 살아온 김씨가 미국 수배자임을 밝혀냈다.

또한 실제 인물인 이씨가 미국 플로리다주에 거주하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하지만 신분 위장 과정에서 도움을 준 문씨와 최씨는 각각 공소시효가 만료되거나 사망해 처벌하지 못했다.

서울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지난 8일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 등의 혐의로 김씨를 구속했다. 경찰 관계자는 “김씨는 국내에서 무허가로 학원을 운영한 죗값을 먼저 치른 후 미국 사법당국에 넘겨질 것”이라고 밝혔다.

신분세탁 너무 쉽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정확한 통계는 나타나지 않지만 신분세탁으로 적발된 건수는 연평균 500여건 이상 발생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현재 국외로 이주해 지문등록을 하지 않은 사람은 그 지역의 통장, 반장, 혹은 이장에게 간단한 신분 확인만 받으면 지문등록은 물론 재등록까지 할 수 있어 얼마든지 제3자로의 신분세탁이 가능하다. 따라서 제2의 김씨가 생겨나지 않으려면 철저한 제도 보완이 시급하다.

경찰은 “김씨가 어렸을 때 국외로 이주하면 행정당국에서 본인 여부를 확인할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과, 간단한 신분확인 절차만 거치면 지문을 등록할 수 있어 신분세탁이 가능하다는 점을 노렸다”며 “신분세탁을 너무 쉽게 할 수 있는 사회제도가 개선될 필요성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김씨같이 신분세탁을 하고 한국에 버젓이 사는 이들이 있을 거라고 판단해 수사를 계속해 나갈지 고려중”이라고 밝혔다.

한편 경찰은 “무자격 강사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고 한국에서는 영어만 하면 돈 벌기 쉽다는 인식이 외국인들 사이에 팽배해 무자격 외국인 강사가 공공연히 수업을 하고 있다”며 “교육 당국의 철저한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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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눈 뜨고 당하는’ 임차권등기 말소의 이면

[단독] ‘눈 뜨고 당하는’ 임차권등기 말소의 이면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잘못된 판단이 불러온 후폭풍은 엄청났다. 생전 걸음할 일 없다고 생각했던 경찰서를 드나들었고 송사를 치르느라 법정을 오갔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발이 닳도록 돌아다녔지만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 모든 일은 법원에서 날아온 문서 한 장에서 시작됐다. 어떤 실수는 손쓸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당시에는 실수인지조차 모르고 넘어갔다가 뒤늦게 알아채는 경우도 허다하다. 모든 상황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수습하기 어려운 일도 있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계약이 이뤄진 상태라면 더더욱 원상복구가 쉽지 않다. 김모씨가 처한 상황이 딱 그렇다. 놀라서 해줬다가 사건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7년 7월 김씨는 경기도 광주의 한 빌라에 거주할 목적으로 전세 계약을 맺었다. 계약 기간은 2017년 8월부터 2019년 8월까지 2년, 보증금은 2억200만원으로 했다. 해당 빌라의 등기부등본을 보면 김씨가 전세 계약을 맺은 후 임대인이 바뀌었다. 문제는 새로운 임대인이 계약 기간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김씨에게 전세보증금을 반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씨는 전세 계약 기간 만료 후인 2019년 9월 해당 빌라에 임차권등기를 마쳤다. 임차권등기명령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가 임차주택에 대한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유지하면서 이사할 수 있는 제도다. 엄정숙 법도 종합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임차주택에 거주할 때는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로도 대항력이 발생한다. 하지만 계약 기간이 끝나 퇴거하게 되면 이사하는 곳으로 주소를 옮겨야 하니 임차권등기명령을 통해 대항력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임차권등기명령은 등기부등본에 기재되는 만큼, 강한 대항력을 가진다”고 부연했다. 다시 말해 등기부등본에 임차권등기명령이 기재돼있다는 것은 세입자는 더 이상 그 집에 살지 않지만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상황임을 의미한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김씨가 주택도시보증공사(이하 HUG)에서 운영하는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 상품에 가입해 뒀다는 사실이다.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 상품은 전세 계약이 종료됐을 때 임대인이 임차인에게 돌려줘야 하는 전세보증금을 HUG가 대신 돌려준다는 내용이 골자다. HUG가 임차인에게 먼저 전세보증금을 대위변제한 뒤 임대인에게 구상권을 행사해 청구하는 방식이다. 김씨는 2019년 10월 HUG로부터 전세보증금 전액인 2억200만원을 받았다. 전세 살다 보증금 못 받아 전세보증금 보험으로 구제 이후 김씨는 경기도 안양으로 이사했고 해당 빌라와 관련한 일은 새카맣게 잊고 지냈다. 그는 <일요시사>와 만난 자리에서 “HUG에서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았으니 모든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제 2019년 이후 5년여 동안 해당 빌라와 관련해 김씨에게까지 영향이 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사이 해당 빌라의 주인이 바뀌는 등 소유권 변동이 일어났지만 김씨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던 것. 그러다 지난해 11월 김씨에게 임차권등기명령 취소 신청서가 날아들었다. 김씨는 “법원에서 문서가 송달돼 크게 당황했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려고 문서에 기재된 번호로 연락했더니 7년 전 전세로 살았던 빌라의 집주인이라고 하더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집주인이 임차권등기를 말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지 않으면 소송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며 “갑자기 법원에서 종이가 날아오고 소송을 제기한다는 말에 덜컥 겁을 먹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씨는 임차권등기 말소를 위한 서류를 직접 떼 서울 서초동의 한 법무사 사무실에 가져다줬다고 했다. 그 결과 지난해 11월20일 김씨가 해당 빌라에 걸어놨던 임차권등기가 말소됐다. 해당 빌라에 김씨가 행사할 수 있던 권한이 소멸한 것이다. 동시에 집주인으로서는 등기부등본이 깨끗해지는 효과를 얻게 됐다. 이렇게 되면 세입자를 구하는 일도 수월해진다. 줄줄이 꼬였다 이때 김씨가 간과한 사실은 HUG의 존재였다. 김씨가 해당 빌라의 집주인으로부터 전세보증금을 돌려받고 임차권등기를 말소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보증금을 반환받지 못한 세입자가 돈을 받은 뒤 임차권등기를 말소해주는 게 실제 일반적인 절차다. 이 과정에서도 공인중개사 등 부동산 전문가는 보증금을 돌려받기 전까지 임차권등기를 말소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김씨는 전세보증금을 HUG에서 받았다. HUG 입장에서는 해당 빌라의 집주인에게 2억200만원 즉, 돌려받아야 할 돈이 있는 상황에서 김씨가 임차권등기를 무단으로 말소해버린 것이다. 동시에 김씨가 배당 순위에서 밀리게 되면서 HUG는 대위변제한 보증금을 회수할 방법이 요원해졌다. 여기에 은행, 지자체 등 후순위 채권자들도 있는 상황이다. 김씨 사건을 들여다보고 있는 HUG 경기관리센터(이하 HUG 경기센터)는 “모든 임차인은 HUG에 대위변제를 받으면서 대위변제증서를 작성한다”고 말했다. 실제 김씨가 HUG로부터 전세보증금에 해당하는 돈을 받았을 당시 작성한 대위변제증서에는 ‘본인(김씨)은 HUG가 대위변제금 및 제반 비용을 회수할 때까지 HUG의 동의 없이 주택임차권등기를 말소하지 않겠으며 본인의 주택임차권등기 말소로 인해 HUG에 손해가 발생할 경우 배상할 것을 확약한다’는 문구가 기재돼있다. HUG 경기센터는 “HUG는 대위변제 물건을 경매에 넘겨서 배당을 회수하는데 임차권등기명령을 무단 말소하면 경매에서 배제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HUG에 연락했으면 대신 응소해 임차권등기를 지켰을 텐데 당시 김씨가 연로해 이런 생각을 못한 것 같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낙장불입 그러나… 김씨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집주인이) 내가 전세보증금을 반환받았기 때문에 임차권등기를 말소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 본인(집주인)이 손해를 보고 있다. 임차권등기를 말소하지 않으면 손해배상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나를 속였다”며 “내 입장에서는 전세 사기를 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집주인 말에 속아 임차권등기를 말소해줬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은 김씨가 집주인과 해당 빌라의 채권자들에게 제기한 ‘임차권등기 말소 회복 청구 등’ 소송에서 “피고(집주인)가 원고(김씨)가 주장하는 것처럼 고의적인 기망행위를 했다거나 그로 인해 김씨가 신청 취하 행위 자체에 착오에 빠져 있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김씨의 “속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현재 김씨의 상황은 여의치 않다. HUG 경기센터는 대위변제한 보증금 회수를 위해 일단 김씨의 부동산 등에 가압류를 걸어둔 상태다. 그러면서도 김씨의 상황을 참작하고 손해를 회복하기 위해 ‘임차권등기 무단 말소 무효 소송’을 추진하고 있다. HUG 측 관계자에 따르면 그동안 한번도 진행한 적 없는 소송이라고 한다. “억울하다” 법원 인정 안 해 HUG, 구제 위해 소송 제기 HUG 경기센터는 “그동안 임차권등기가 말소되면 복구할 가능성이 없는 것(낙장불입)으로 보고 임차인 손해배상 청구로 업무를 진행해 왔는데, ‘임차권등기 말소 무효 소송을 통해 원상복구 가능성이 있다’는 법률 자문이 있어 소송을 진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소송이 HUG의 승소로 종결돼 임차권등기가 부활하면 김씨에 대한 구제가 가능하다. 이때 김씨는 소송 실비만 부담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HUG 경기센터가 제기한 소송은 김씨에게 해당 빌라에 걸려 있던 임차권등기를 말소할 권한이 없다는 취지인 것으로 알려졌다. HUG가 김씨에게 전세보증금을 대위변제한 만큼 임차권등기를 말소할 권한도 HUG에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니 김씨의 임차권등기 말소 행위는 무효라는 게 골자다. HUG 경기센터는 “김씨가 임차권등기를 무단 말소하면서 채권 선순위로 올라온 은행, 세무서, 지자체 등이 김씨의 억울함을 헤아려 대승적인 차원에서 응소하지 않길 기대하고 있지만, 이들은 김씨가 별도로 제기했던 소송에 모두 대응한 전력이 있어 HUG가 제기한 소송에도 응대할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판단 중”이라고 밝혔다. 이어 “HUG가 김씨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대신 구제를 위해 소송을 진행하는 것처럼 이들 후순위 채권자들도 집주인의 허위 소송에 안타깝게 속아 임차권등기를 말소한 김씨를 구제하는 방향으로 업무를 진행하기를 바라는 입장”이라고 전해왔다. 실제 김씨가 제기한 ‘임차권등기 말소 회복 청구 등’ 소송에서 은행 한 곳은 대응하지 않았다. 순간 실수 인정될까? 김씨는 집주인과 채권자들을 상대로 한 소송의 항소심을 준비하고 있다. 동시에 HUG와도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법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일이 벌어지고 HUG로부터 연락을 받고 난 뒤에야 상황을 파악했다”며 “재산은 (가압류로) 묶였고 소송비용도 만만찮다. 무엇보다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다. 다른 사람에게는 나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한탄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