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1주년 특집5> ‘지난 21년’ 재계서열 변천사

셋 중 한명은…자주 바뀌는 재벌 자리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돌이켜보면 <일요시사>가 막 태동했던 1996년은 폭풍전야나 마찬가지였다. 곳곳서 불거졌던 사건·사고는 이듬해 닥칠 외환위기의 전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판 거품경제’의 끝물서 재벌기업들은 나태함에 빠져있었다. 거품이 꺼지자 진면목이 드러났다. 신문 경제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던 재벌기업 대다수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상태였다.  
 

기업집단은 ‘동일인이 사실상 사업내용을 지배하는 회사의 집단’으로 정의된다.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는 매년 동일인의 지분율과 지배력을 기준으로 기업집단과 여기에 속하는 계열사의 공정자산을 평가한다. 이 기준에 따른 기업집단 순위는 국내 재벌 순위로 공인되고 있다. 

잘 나가더니
거덜난 재산

공정위는 1987년 공정거래법을 개정하고 기업집단을 규정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자산총액 4000억원이 기준이었다. 초대 10대 기업집단에 선정된 것은 현대와 대우, 삼성, 럭키금성(LG), 쌍용, 한진, 선경(SK), 한국화약(한화), 대림 등이었다. 

이때부터 1991년까지는 현대, 대우, 럭키금성이 빅3를 형성했다. 2001년 재계 1위에 등극한 뒤 올해까지 한 번도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는 삼성은 당시만 해도 4위에 그쳤다.

매년 발표된 대규모 기업집단 규정은 1996년 10번째를 맞이했다. 대림이 10대 기업서 빠진 자리를 기아가 대체하고 현대가 굳건히 1위 자리를 수성했을 뿐 나머지 기업들의 순위 변화는 그리 크지 않았다. 


11~30위에는 금호, 두산, 대림, 한보, 동아, 한라, 효성, 동국제강, 진로, 코오롱, 동양, 한솔, 동부, 고합, 해태, 삼미, 한일, 극동, 뉴코아, 벽산이 자리 잡는 구도였다. 

IMF 직전 폭풍전야 ‘죽느냐 사느냐’
흥청망청 쓰더니 순식간에 부도 처리

21년의 간극을 감안하더라도 1996년 재계 순위는 올해 공정위가 발표한 것과 현격한 차이를 나타낸다. 지난 1일 공정위가 발표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지정현황을 보면 상위 10대그룹은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롯데, 포스코, GS, 한화, 현대중공업, 농협 순이었다. 
 

11∼30위에는 신세계, KT, 두산, 한진, CJ, 부영, LS, 대림, 금호아시아나, 대우조선해양, 미래에셋, S-OIL, 현대백화점, OCI, 효성, 영풍, KT&G, 한국투자금융, 대우건설, 하림이 포진해 있다.

최상위권은 물론이고 중하위권 기업의 순위도 크게 요동쳤다. 21년 동안 큰 풍파없이 30대 기업에 꾸준히 이름을 올린 곳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다. 

삼성, LG, SK, 한진, 한화, 롯데, 금호아시아나, 두산, 대림, 효성 등 10개 기업에 불과하다. 대우, 쌍용, 기아자동차, 한보, 동아, 진로, 동양, 고합, 해태, 삼미, 한일, 극동, 뉴코아, 벽산은 공중분해 수순을 밟았다. 현대, 한라, 동국제강, 코오롱, 한솔, 동부는 30대 기업서 밀려났다.    

모진 풍파에
속속 공중분해


1996년과 올해 재계 순위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는 건 1997년 11월 불어닥친 외환위기(IMF구제금융)의 여파 때문이다. 외환위기 전까지 대기업들은 설비를 수입해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제품을 생산하고 이를 싼 가격에 수출하는 방식을 썼다. 

사업 확장을 위해 대기업들은 주저 없이 금융권에 손을 벌렸다. 당시 은행권 전체 대출 중 30대 기업 대출이 3분의 2에 해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1996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국가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고 자금 융통에 어려움을 겪던 시중은행들은 재빨리 기업 대출 회수에 나섰다. 때마침 동남아발 외환위기가 먼저 촉발되면서 외부의 도움을 구하기도 힘든 여건이었다.

일본 금융기관들은 동남아시장에 투입했던 자금을 회수하기 바쁜 상황이었다. 결국 시중은행들의 대출금 회수는 대기업 줄도산으로 연결됐다. 여기서부터는 악순환이었다. 대기업의 부실채권이 궁극적으로 금융기관 부실화를 야기했다. 

철강사업에 손대면서 대규모 차입을 했던 재계순위 14위 한보가 1997년 1월 도산한 것을 시작으로 4월에는 삼미가 부도나고 진로는 부도유예협약이 결정됐다. 7월에 기아 역시 부도유예협약이 적용됐다. 10월에는 뉴코아, 해태, 동아 등이 부도처리 되면서 한 달 동안 30조의 부실채권이 발생했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한국은행과 시중은행 간 금융 프로세스마저 단절되면서 시중은행의 파산도 가시화됐다. 사실상 외환시장은 폐쇄됐고 정부는 외환보유고서 달러를 배급하기에 이르렀지만 결국 1997년 11월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IMF’라는 생소한 이름이 전 국민의 머릿속에 각인된 순간이다. 
 

외환위기 전후로 대기업들이 줄줄이 파산하면서 재계 순위는 본격적으로 요동쳤다. 은행 돈으로 문어발 확장에 집중하던 대기업들은 유동성 위기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대마불사’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았다.  

‘세계경영’을 외쳤던 대우가 공중분해 수순을 밟은 것도 이 무렵이다. 외환위기 당시 대우는 확장전략을 전개했다. 이 과정서 자금난을 겪던 대우는 현금 확보를 위해 총 100억달러에 달하는 채권을 발행했고 이는 1999년 3월에 부채비율 400%로 되돌아왔다. 

차입의존도가 높았던 대우는 연 20%를 넘는 고금리를 감당하지 못했고 빚을 얻어서 빚을 갚는 악순환이 되풀이됐다. 결국 같은 해 8월 대우에 대한 워크아웃이 결정되고 12개 계열회사가 채권은행단의 관리로 들어갔다. 

쌍용을 필두로 고합, 해태, 한일, 극동, 벽산 역시 대우와 비슷한 시기에 차례로 무너졌다.

시멘트, 해운, 제지 기반서 정유, 중공업, 자동차 부문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던 재계 6위 쌍용은 외환위기 후 구조조정을 실시하며 해체 수순을 밟았다. 1997년 쌍용제지를 미국 P&G에, 1998년에는 쌍용자동차를 대우그룹에 넘겼다. 

1999년과 2000년에는 쌍용정유와 쌍용중공업에 팔려나갔다. 쌍용건설과 모기업인 쌍용양회공업은 기업재무구조 개선(워크아웃) 절차에 들어가 채권단이 지배주주가 됐다. 


고합은 지나친 사세확장으로 금융위기 직후 워크아웃 1호 기업으로 전락했다. 당시 고합의 부채 규모는 3조5000억원, 부채비율은 424%에 달했다. 

고합은 68개 채원금융기관으로터 2430억원의 협조융자를 받으면서 13개 계열사를 ㈜고합으로 합병하고 3400억원의 유가증권과 부동산을 매각하면서 정상화를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했다. 장치혁 회장은 2001년 채권단의 결정으로 경영 일선서 완전히 퇴진했다.

제과업을 주축으로 성장했던 해태는 1997년 11월 주력기업인 해태제과 부도를 시작으로 이듬해 15개 계열사 중 해태상사와 해태타이거즈만 남고 해체됐다. 
 

1999년 해태산업의 제과사업부문과 해태가루비는 해태제과에 흡수·합병됐고 해태상사, 해태중공업, 대한포장, 해태텔레콤, 해태I&C 등은 파산했다. 1999년 12월 법원으로부터 재산보전 처분이 결정된 해태상사는 2000년 5월부터 법정관리에 돌입했고 11월 시장서 퇴출됐다. 

이외에도 외환위기 발발 2년 전 우성건설을 편입시키던 한일그룹은 1998년 모기업이었던 한일합섬과 주력기업인 국제상사가 부도를 내면서 그룹이 사실상 해체됐다. 

극동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7년과 1998년에 동서증권과 국제종합건설이 잇따라 부도를 내면서 경영난에 빠졌다. 건축자재를 주력으로 하던 벽산은 1998년 외환위기 직후 경영난에 빠지면서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대마불사 옛말
새로운 얼굴들

외환위기와 상관 없이 최근 30대기업 명단서 제외된 기업도 제법 눈에 띈다. 현대, 동양, 동부 등이 이 부류에 포함된다. 

현대는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겪으며 현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백화점 등으로 쪼개졌다. 그룹의 모체였던 현대는 2001년 유동성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현대건설, 현대전자, 현대투자신탁, 현대정유 등 우량 계열사를 채권단의 손에 넘겨야 했다.

 2003년에는 정몽헌 회장의 자살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지난해 현대상선 분리와 함께 대기업 집단서 제외됐다. 

2006년부터 자금난을 겪던 동양은 2013년 9∼10월 주요 계열사인 동양, 동양레저, 동양시멘트, 동양네트웍스, 동양인터내셔널 등 5개 계열사가 연달아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해체의 길을 걸었다. 

이 과정서 2013년 2월부터 9월까지 동양증권을 통해 4만여명의 개인투자자들에게 기업어음(CP) 및 회사채를 불완전 판매한 이른바 ‘동양사태’가 불거지기도 했다. 

철강, 반도체, 금융, 농업, 물류 분야를 아우르던 동부는 부채비율 급증을 비롯한 악재가 겹치면서 2015년 전자·금융을 축으로 그룹이 재편됐고 지난해부터 대기업집단서 빠졌다.

M&A 따라…요동치는 순위 
뒤안길로 사라진 기업도

몰락한 30대기업의 빈자리는 새로운 얼굴로 채워졌다. 1968년 포항종합제철로 설립돼 2002년 3월 지금의 사명으로 변경한 포스코는 2000년 10월 민영화 완료 후 2001년 재계순위 7위로 대기업집단에 편입됐다. 지난 1일 발표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 의거한 재계순위는 6위.

1981년 12월 세워진 한국전기통신공사를 모태로 하는 KT는 2002년 5월 정부가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전량 매각함에 따라 완전 민영화됐다. 2003년 대기업집단에 포함되자마자 재계순위 5위에 이름을 올렸다. 
 

부영은 주택건설 및 임대주택업을 주축으로 하는 기업이다. 1983년 삼신엔지니어링으로 설립해 1993년에 현재의 상호로 변경했으며 2010년 재계순위 24위로 대기업집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외에도 2000년에 30위로 대기업집단에 편입된 영풍은 2004년 30대기업서 자취를 감췄다가 2013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미래에셋(2014년·29위), S-OIL(2010년·26위), OCI(2009년·27위), KT&G(2016년·30위), 하림(2016년·28위)등이 30대기업 명단에 이름을 올린 상태다. 한국투자금융은 올해 처음으로 30대기업에 포함됐다. 

어제의 가족이
오늘의 경쟁자

그룹사와 우산을 공유하던 계열사가 계열분리를 거쳐 30대기업에 합류한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삼성그룹서 떨어져 나온 신세계와 CJ는 각각 2000년, 2003년부터 30대기업에 포함됐다. 

과거 LG그룹의 일원이던 GS와 LS는 2003년에 30대기업에 함께 이름을 올렸다. 범현대가의 일원이던 현대차, 현대중공업, 현대백화점은 30대 기업서 제외된 모기업(현대)보다 재계순위에서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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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