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져가는 공안정국 시그널 5

복면만 쓰면 선량한 국민도 'IS'?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사회 곳곳에서 포착되는 신호가 예사롭지 않다. 특히 1980년대 대한민국을 휘감았던 ‘공안 만능주의’가 다시 살아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노동계 쪽에서 확산되고 있다. 테러리즘에 대한 공포가 전 세계로 확산된 지금, 대한민국 지도부는 테러와 국민의 연결고리를 찾기 바쁜 모습이다.

공안정국의 전조가 보인다. 정부와 시민이 강대 강으로 맞섰던 지난 14일 민중총궐기대회 현장,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던 그 곳 상황에 대해 정부와 보수언론은 집회 참가자의 잘못으로 결론짓고 있다. 정부·여당은 앞선 시위를 ‘폭력행위’로 규정하고 관련법들을 쏟아내는 중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심지어 자국민을 ‘IS’에 비유하는 등 강경대응에 나설 뜻을 전했다.

민중총궐기는
폭력집회

지난 24일 박 대통령은 해외순방 후 첫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당초 황교안 국무총리 주재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알려진 바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직접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작심한 듯 강경한 발언을 쏟아냈다. 회의장에서 박 대통령은 “오늘 예정에 없던 국무회의를 긴급히 소집한 이유는 이번 순방 직전과 도중에 파리와 말리 등에서 발생한 연이은 테러로 전 세계가 경악하고 있고, 이에 어느 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는 급박함 때문”이라며 “테러단체들이 불법시위에 섞여 들어올 수 있다. 복면시위는 못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슬람국가(IS)도 지금 그렇게(복면 쓰고) 하고 있지 않느냐”며 관련법안 발의를 정치권에 촉구했다.

또한 박 대통령은 수사기관의 휴대전화 감청을 가능케 하는 ‘통신비밀보호법’을 비롯해 ‘테러방지법’ 등의 조속한 처리를 주문했다.

이후 야당은 물론 사회 각계에서는 박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다. 박주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변호사는 지난 25일 PBC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윤재선입니다>에 출연해 “민주국가의 지도자로서 적절한 발언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치연합) 유은혜 대변인은 발언이 있었던 지난 24일 국회 정론관에서 현안브리핑을 갖고 “대통령은 지난 14일 집회에 대해 언급하며 집회 참가자를 IS에 비유하기도 했다”며 “아무리 못마땅하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이 국민을 IS에 비유하는 것은 정말 충격적”이라고 비판했다.

진보성향의 언론은 한 외신기자들의 반응을 전하며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다. 미 <월스트리트저널>의 알라스테어 게일 한국지국장은 지난 24일 개인 소셜네트워크(SNS)를 통해 의견을 남겼는데, “한국대통령이 마스크를 쓴 자국의 시위대들을 IS에 비유했다. 이건 정말이다”라고 놀라움을 표했다.

복면 쓰면
국민도 IS?

민중총궐기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반응은 어떨까. ‘경찰의 과잉진압’과 ‘불법폭력 시위’ 사이에 의견이 팽팽한 상황이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지난 20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폭력상황이 발생한 책임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경찰의 과잉진압이라고 답변한 사람이 전체 40.7%, 불순선동세력의 책임이라는 응답은 38.2%로 나오는 등 오차범위 내에서 존재했다(둘 다의 책임이라는 의견은 15.8%, 잘 모르겠다는 5.3%. 성인 500명을 대상,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4.4%포인트).
 

그 중 과잉진압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공안정국을 우려하고 있다. 특히 대외적으론 ‘프랑스 테러’, 대내적으론 ‘민중총궐기’를 전후로 공안이 강화될 것을 알리는 신호들이 곳곳에서 잡힌다고 주장한다.

그 첫 번째 신호는 ‘복면금지법’이다. 새누리당 소속 정갑윤 국회부의장은 지난 25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하 복면금지법)’ 발의를 알렸다. 정 부의장을 포함해 새누리당 소속 의원 32명이 발의한 이 법안의 핵심은 집회 또는 시위장소에서 신원확인을 어렵게 하는 복면 등을 착용하는 행위를 금지하자는 것이다.

사회 곳곳서 포착되는 공안 신호들 추적
테러와 국민 연결고리 찾으려는 대통령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해당 법안 제안 이유를 보면 “집회 및 시위의 자유는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으로서 적극 보호 받아야 하나, 매년 집회·시위가 불법적이고도 폭력적인 시위형태로 변질함으로써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사회질서를 혼란케 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해당 법안에 대한 전문가들 견해는 찬반으로 갈린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연합뉴스>를 통해 “복면을 쓴다는 건 불법적인 행위를 은폐하고 수사기관의 검거를 피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 반면,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복면금지법은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해하는 결과를 야기할 우려가 있다”고 내다봤다. 찬성과 반대가 팽팽히 맞서고 있어 해당 법안이 실제 국회를 통과할지는 미지수다.

두 번째 신호는 ‘민주노총 압수수색’을 꼽는다. 지난 21일 해당 집회에서 과격·폭력 시위 여부를 수사 중이던 경찰은 민주노총 사무실을 전격 수색했다. 이는 지난 1995년 민주노총이 설립된 후 처음 있는 일이다.
 

경찰이 공개한 시위물품들이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손도끼, 해머, 밧줄 등 상대방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도구들이 사무실에서 나옴으로써 여론은 민주노총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이는 알려진 사실과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당사자의 주장에 따르면 시위용이 아닌 퍼포먼스용이라는 것이다.

노조 법률원인 송영섭 변호사는 지난 23일 국회 인근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경찰이) 관련 없는 물품을 압수했다”고 주장했다. 송 변호사는 “해머는 퍼포먼스용으로 사용해온 것이며 밧줄은 경찰버스 당기기에 사용된 것과 전혀 다른 모양으로 체육대회 줄다리기용”이라고 반박했다. 이어서 그는 절단기·폭죽 등 경찰이 제시한 물품들은 모두 개인 또는 퍼포먼스용, 아니면 혐의사실과 관련이 없거나 사용된 사실이 없는 물건들이라고 강조했다.

한상균 포위
백남기 위중

세 번째 신호는 국민에 대한 ‘과잉 공권력’ 문제다. 지난 14일 현장에서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씨는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 쓰러진 다음날 수술을 받았지만,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지난 25일 백씨의 큰딸 백도라지씨는 가톨릭농민회,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등 단체들과 함께 청와대 근처 청운·효자동 주민센터를 찾아 박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한 상태다.

관계자들은 면담요청 사유를 밝히면서 “총궐기 전부터 집회를 폭력시위로 규정하며 평화행진을 차벽으로 막고 물대포를 쏜 경찰의 살인적 폭력진압은 이미 동영상이나 사진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고 있는 실정”이라며 “대통령은 백남기씨에 대한 공권력의 폭행에 대해서는 외면하면서 국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것”이라고 입장을 전했다. 앞서 백씨 가족과 농민단체 회원들은 지난 18일 강신명 경찰청장 등 경찰 관계자들을 살인미수와 경찰관 직무집행법 위반죄 등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네 번째 신호는 정부의 ‘테러마케팅’이다. 정부가 테러를 홍보도구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지난 20일 국회에서 열린 새정치연합 최고위원회의 당시 전병헌 최고위원은 “국정원이 테러마케팅으로 공안정국화 시도에 앞장서고 있다”고 주장했다.

과잉 공권력 문제, 뜨거운 감자로 급부상
양지로 나선 국정원, 음지로 숨는 국정화

전 최고위원은 국정원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시리아 난민 200명의 입국사실을 발표하는 등 전면에 나서는 모습을 보고 이같이 지적했다. 이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양한다’는 국정원의 설립취지와 대치되는 부분이다.


시점 자체도 미묘하다고 봤다. 최초로 해당 소식이 알려진 것은 지난 18일,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정원은 소속 의원들에게 이같이 보고했다. 민중총궐기가 있은 후 ‘과잉진압’이냐 ‘과격시위’냐를 두고 사회가 사분오열 갈라져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또한 국정원이 발표할 성질의 것도 아니라는 지적이다. 난민 문제의 경우 외교통상부나 출입국을 담당하는 법무부가 맡아서 해야 할 일이라는 주장이다.

앞서 테러마케팅을 지적한 전 최고위원은 이어 “(국정원이) 정제되지도 않은 IS관련 첩보들까지 쏟아냈다”며 “‘테러모드형 신 공안정국’이다”라고 비판했다.

공안정국을 알리는 또다른 신호는 ‘국정화 여론몰이’다. 최근 야당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관련해 찬성여론이 조작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여당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차떼기’ ‘명의도용’ 등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지난 22일 새정치연합 박수현 원내대변인은 국회 정론관에서 브리핑을 가지고 이같이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행정예고 여론수렴 마감일인 지난 2일 찬성의견서 수만 장이 서울 여의도의 대형 인쇄소에서 대량으로 인쇄돼 밤 11시쯤 정부세종청사에 배달됐다”고 전했다. 즉 교육부로 전해진 국정화 찬성의견서가 사실은 신원을 알 수 없는 몇몇 사람과 단체에 의해 대량으로 만들어 진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국정원 권한 ↑
국정화 여론 ↓

결국 테러와 집회의 연결고리 찾기, 그리고 국정화 여론몰이를 통해 정부·여당이 ‘반대의견=전복세력’이라는 프레임을 짠 것 아니냐는 지적이 가능하다. ‘공공의 안전’을 뜻하는 단어가 공포의 대상이 된 부분이 아이러니하다.



<chm@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대통령의 정치인 혼내기
“국회가 립서비스만 하고 있다”

지난 24일 국무회의를 주재한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가) 맨날 앉아서 ‘립서비스’만 하고 자기 할 일을 않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위선이다”라고 한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다. 야당은 박 대통령의 해당 발언에 대해 ‘부적절하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해당 발언이 있은 지 하루가 지난 25일,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는 광주에서 열린 ‘아시아문화전당’ 개관식에 참석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이 국회를 탓하고 야당 탓을 하는 것이 너무 잦고 지나치다”며 “비판하는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열고 경청하는 자세를 가져야지 국민들을 적처럼 생각하는 자세로 국정을 이끌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대변인들 또한 같은 날 브리핑을 통해 ‘유체이탈 화법’ 등을 거론하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박 대통령의 발언을 지적하는 이들 중에는 시점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 중이었기 때문이다. 새정치연합 전병헌 최고위원은 지난 25일 YTN라디오 <신율의 출발 새아침>에 출연해 “국가장례 중 여야도 정쟁을 삼가고 있는데, 대통령이 야당을 향해 매도하는 수준의 비난을 한 것은 부적절하다”며 “행정부 입장에서 보면 국회의 견제가 때로는 방해처럼 생각되고, 발목을 잡는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원망과 탓만으로는 그 어떤 문제든 해결되기 어렵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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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