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킹정국 정치권 7인3색 동상이몽

위기일발 박근혜·이병호, 이환위리 안철수·원유철·이종걸, 천재일우 김무성·문재인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국정원 해킹사태’가 점입가경이다. 민간을 대상으로 해킹을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됨은 물론, 느닷없이 국정원 직원이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정치권은 이해득실을 따지기 바쁘다. 관계가 얽혀있는 이들의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꿈보다 해몽이 큰 7인의 제각각 속내를 <일요시사>가 들여다봤다.

국정원 불법 해킹 의혹이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다. 지난 13일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으로 추정되는 육군 5163부대가 이탈리아 해킹업체로부터 국내 유력 메신저인 카카오톡 해킹 기술 등을 문의한 내용의 문서가 인터넷에 나돌면서 민간에 대한 사찰 의혹에 휩싸였다. 이후 해킹 소프트웨어 ‘리모트콘트롤시스템(이하 RCS)’을 구입한 정황이 알려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국가정보원
민간 사찰?

하루가 지난 14일 이병호 국정원장이 RCS구입 및 문의사실을 시인하면서 공론화됐다. 이 원장은 북한의 해킹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량 구매했으며,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해킹은 일절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 원장은 국회 정보위원회(이하 정보위) 전체회의에 참석해 “국민을 대상으로 해킹했다면 어떠한 처벌도 받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치연합)은 RCS 불법 구매 및 운영 의혹을 제기하며 지난 15일 안철수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진상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정치권의 본격적 움직임이었다.

안 위원장은 진상조사위원회 명칭을 국민정보지키기위원회(이하 국정위)로 변경하고 국정원에 RCS 사용내역을 제출하도록 요청했다. 안 위원장은 “정쟁을 위해 이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국정원은 로그(RCS 사용기록)를 제출해야 한다. 떳떳하다면 공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국정원을 압박했다.


이에 국정원은 이례적으로 보도자료를 내며 반박했다. 핵심은 현재 보유한 20대의 해킹장비로는 민간인 사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국정원은 “기밀자료지만 불필요한 논란을 없애기 위해 야당이 요구한 자료를 공개하고 방문조사도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새누리당도 가만있지 않았다. 새누리당은 안 위원장이 보안업체의 대주주라는 점을 들어 국정위 위원장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새정치연합을 압박했다. 여권 일각에서는 안 위원장에게 “(국정원 사태를 조사하는 위원회의 장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백지신탁과 주식을 팔기 바란다”고 주문했다.

여·야의 단순 공방으로 끝날 것 같던 이번 사태는 그러나 예기치 못한 곳에서 뇌관이 터져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박근혜정부
이병호 원장

지난 18일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한 야산에서 국정원 직원 임모씨가 마티즈 승용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우고 숨진 채 발견됐다. 차량에서는 시신과 함께 A4용지 3장 분량의 유서가 발견돼 과연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다.

하루가 지난 19일 가족의 동의하에 유서가 공개됐다. 유서에는 “내국인에 대한, 선거에 대한 사찰은 전혀 없었다”며 “대테러·대북공작활동 자료를 삭제했다”고 나와 있다. 또한 자신이 오해를 살 만한 자료를 삭제한 것은 ‘실수’였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자살사건은 국정원 직원의 공동 성명서 발표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 성명 발표가 오히려 논란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됐다. 성명에는 임모씨의 자살 책임을 야당과 언론에게 돌리는 듯한 문구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국정원 일동’이라고 적혀 있지만, 직원이 모두 회람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병호 국정원장이 직접 결재해 발표된 것으로 알려져 후폭풍이 거세지고 있다.

국정원 바라보는 여의도, 제각각 속내
박근혜정부 위기, 이병호 기름 붓나?

소위 ‘해킹정국’ 속에서 이 원장과 박근혜정부는 위기를 맞게 됐다. 그 중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상 초유의 국정원 성명 발표를 승인한 이 원장은 자격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더불어 법률전문가들이 이번 성명 발표를 두고 국가공무원법 66조(집단 행위의 금지), 국가정보원법, 국가정보원직원법 등의 법률을 위반한 행위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어 이 원장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다.

청와대 입장에서는 사태가 최악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고 있다. RCS 구입과 직원 자살, 국정원 성명 발표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에 외신까지 관심을 보이며 이번 사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번 사태뿐만 아니라 지난 대선개입 의혹 건까지 함께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박근혜정부는 정체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됐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9일 국정원 직원 자살소식을 전하는 기사에서 “2012년 대선에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박근혜 대통령의 상대 후보에 대해 비밀 온라인 비방 캠페인을 주도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영국 국영방송인 BBC는 한국의 정보기관이 과거 납치와 살인사건에 연루되는 등 국민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부분을 언급하면서 대선개입 의혹도 같이 다뤘다. BBC는 더 나아가 최근 원 전 원장이 증거불충분으로 파기환송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박근혜정부 입장에서는 가장 민감할 수 있는 부분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위기일발’이 아닐 수 없다.


안·원·이
반등 기회

반면 위기이자 기회를 맞은 사람들이 있다. 국정위 장을 맡고 있는 안 위원장은 물론 새누리당 원유철·새정치연합 이종걸 원내대표에게는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라”는 ‘이환위리’ 전략이다.

안 위원장은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됐다. 알려진 바대로 국내 최고의 보안전문가인 안 위원장은 19대 국회 입성 후 이렇다 할 존재감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과거 유력 대선주자였음에도 좀처럼 힘을 못 쓰는 모습에 야권 일각에서는 보건복지위원회(이하 복지위)라는 맞지 않은 옷 때문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실제로 안 위원장은 복지위 소속 위원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인 바 있다. 메르스 사태가 한창일 때 복지위 소속 의원들이 긴급 기자간담회를 가진데 반해 안 위원장은 한 라디오에 출연, 대선 출마를 선언하는 등 엇박자를 내기도 했다.

위기는 기회, 기회는 위기? 안·원·이
하늘이 준 기회, 리더십 다잡아 GO~


해킹정국이 도래하자 안 위원장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광폭행보를 보이고 있어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 17일 안 위원장은 국회에서 문재인 대표와 이종걸 원내대표가 지켜보는 가운데 해킹 시연회 및 악성코드 감염검사를 실시해 화제가 됐다. 안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카카오톡 메시지 감시, 스마트폰 카메라를 통한 도촬 등 해킹과 관련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점쳤다. 이후 안 위원장은 중앙당에 검사센터를 설치, 일반 국민들의 휴대폰도 검사해 주겠다는 방침을 세우는 등 활동 영역을 넓히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광폭행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새누리당 김영우 수석대변인은 안 위원장이 시연회를 하던 날 현안브리핑을 통해 “수권정당임을 자부하는 제1야당이 뜬금없이 국회에서 해킹 시연회까지 하는 것은 국민의 불안감만을 조장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여겨진다”며 “새정치연합의 이번 시연회는 의혹 해소를 위한다기보다는 정쟁용 이벤트에 가까운 퍼포먼스에 그쳤다”고 평가절하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역풍을 얘기하기도 한다. 만약 전문분야에서 안 위원장이 확실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새누리당의 말처럼 정치적 쇼에 그치게 될 공산이 크다. 더군다나 ‘해킹’에 ‘인권’ 프레임을 씌운 상황이라 자칫 큰 역풍에 휘말릴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과연 해킹정국이 안 위원장의 지지율로 이어질 수 있을 지 귀추가 주목된다.

원유철·이종걸 원내대표의 협상력 또한 주목받는 대목이다. 그 중 원 원내대표 입장에서는 유승민 전 원내대표로부터 자리를 이어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라 경우에 따라서는 협상력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 내지는 자질 논란에 휩싸일 가능성이 있다.


특히 유 전 원내대표가 불명예 사퇴한 이후 당 내에서 원 원내대표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의원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이번이 원 원내대표 입장에서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종걸 원내대표 또한 마찬가지다. 당내에서 친노-비노 간 갈등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이 원내대표가 국정원 사태, 나아가 추경을 유리하게 이끌어 낸다면 자신의 입지뿐만 아니라 향후 친노 및 혁신위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밀리지 않을 수 있다. 이 원내대표는 원 원내대표와의 협상에 있어서 ‘소득세·법인세 정비’ 문구를 이끌어내는 등 수완을 발휘했다. 그러나 해킹정국과 관련해서는 청문회를 두고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김무성·문재인
박근혜 탈출구

새누리당 김무성·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 입장에서는 이번 해킹정국이 박 대통령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란 게 정치평론가들의 분석이다. 당직 개편으로 수족이 묶였던 김 대표에게는 다시 본인의 입지를 다질 수 있는 전환점이, 문 대표에게는 그간 자신을 괴롭혔던 국정원에 대한 아픔을 씻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됨은 물론 계파 갈등을 일시적으로나마 잠재울 수 있는 국면 전환용으로 활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문 대표 입장에서는 최근 탈당으로 어수선했던 분위기를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된 해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에게는 이번 해킹정국이 흔들렸던 지도력을 회복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chm@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침묵하는 박근혜, 소리치는 국정원
침묵이 금? 무언의 압박에 국정원 갈팡질팡

국정원 해킹사태가 터진 가운데 논란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어 화제다. 박 대통령은 이번 사태와 관련해 어떤 목소리도 내지 않고 있는 반면, 음지에서 움직인다는 국정원은 오히려 전면에 나서 자신을 두둔하고 있다.

임모씨가 자살한 이후 국정원 직원들이 낸 ‘동료 직원을 보내며’라는 성명서에는 “(숨진 직원은) 본인이 실무자로서 도입한 프로그램이 민간인 사찰용으로 사용되었다는 정치권과 일부 언론의 무차별적 매도에 분노하고 있었다”며 임모씨가 극단적 선택을 했던 이유를 나름 분석했다. 또한 “자국의 정보기관을 나쁜기관으로 매도하기 위해 매일 근거 없는 의혹을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며 억울한 심경을 토로했다.

반면 박 대통령 및 청와대는 침묵의 카르텔을 유지하고 있다. 청와대 출입기자의 말에 따르면 국정원에 대해 “청와대 의견은 없냐”는 질문을 받으면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다”는 답만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정치권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국정원에게 자체적으로 해결하라고 던지는 무언의 압박”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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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