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국가기밀누설 의혹 대해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대통령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영화의 제목처럼 이명박 전 대통령의 시간 또한 거꾸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2008년 이명박정부는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이 청와대 기록물을 봉하마을로 가져간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적 있다. 그런데 지난달 30일 이 전 대통령 또한 자신의 사저에 대통령 기록물을 열람하기 위한 장비를 설치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미 한차례 <대통령의 시간>으로 홍역을 치른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이번에는 회고록 집필 과정에서 기록물을 불법적으로 확인한 것 아니냐는 의혹에 휘말렸다. 시민단체인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이하 정보공개센터)는 국가기록원과 주고받은 정보공개요청 내용을 공개하며 이같이 주장했다.

강남구 사저
기록물 봤나

정보공개센터가 주장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국가기록원에 ‘2010년 1월 1일부터 2015년 2월 23일까지 전직 대통령의 대통령기록 온라인 열람 요구에 따라 온라인 열람 장비 등을 설치한 현황에 대해 설치일, 요청한 전직 대통령 이름, 설치 장소 등을 포함해 공개하라’고 서면으로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이에 국가기록원은 ‘2013년 2월24일 서울 강남구 사저에 대통령 기록 온라인 열람 장비를 설치했다’고 회신했다. 강남구에는 이 전 대통령의 사저가 있다.

이에 정보공개센터는 추가적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 사저·측근·비서진과 주고받은 공문서 목록 및 문서사본이 있는가’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그러자 국가기록원은 ‘정보부존재’를 통지, 서로 주고받은 공문서 및 문서 사본이 없음을 알렸다.

의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이 전 대통령의 회고록인 <대통령의 시간>을 보면 대통령지정기록으로 관리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외교 및 남북관계 문제 등 민감한 사안들이 언급돼 있다. 이에 정보공개센터는 의문점을 파헤치던 중 기록원에 정보공개를 요청했고, 결국 이 전 대통령이 회고록 작성을 위해 자신의 사저에 온라인 장치를 설치해 두고 열람한 것 아니냐는 주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회고록이 출간된 시점에 수많은 언론을 통해 제기된 의혹과 맥을 같이한다. <뉴스타파>를 통해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은 퇴임 시 비밀기록은 한 건도 남기지 않고 대부분 대통령지정기록물로 전환했는데 책에는 미국, 중국, 일본 등 주요 국가 정상과의 회담과 전화 통화, 북한과의 비밀 접촉,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 내용 등 지정기록물을 열람하지 않고서는 확인하기 힘든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친이계는 이러한 의혹에 전적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대통령의 시간> 집필을 총괄한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은 한 언론사를 통해 “청와대에 마지막까지 있지 않아서 (사저에 대통령기록 온라인 열람 장비를 설치했는지) 그 부분은 알지 못한다”면서 “근거 없이 추리로 얘기하는 것에 대해 답할 가치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에 정보공개센터는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관계자 중 한명은 “국민에게 추리를 하게 만들지 않는 게 중요하다”며 “기록원의 분명한 해명만이 의혹을 없앨 수 있다”고 밝혔다.

불거지는 의혹에 기록원은 해명 자료를 게재했다. 내용을 보면 “이 전 대통령 사저에 전직 대통령의 대통령기록물 열람을 위한 장비는 설치되어 있다”면서도 “장비로는 대통령기록물 중 일반기록물에 한해 온라인으로 열람이 가능하며, 비밀기록물과 지정기록물을 온라인으로 열람하는 것 자체가 법적으로는 물론,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설치는 사실
열람은 거짓

이어서 기록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온라인으로 지정·비밀 기록물을 열람하였다는 정보공개센터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끝을 맺었다.

자세한 내용을 듣고자 소관부서인 대통령기록관 기록제도과에 문의했지만 관계자는 “이번 건과 관련하여 법을 위반한 사실이 없고, 법에 따라 적법하게 처리하였다”고 짧게 답했다.

기록원의 해명이 있음에도 논란은 쉽게 가시지 않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치연합) 측에서는 즉각적인 수사 착수를 촉구하고 나섰다. 새정치연합 김희경 부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앞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출간한 <대통령의 시간>에 대해서는 국익을 저해하거나 국가안보에 직결된 내용을 공개했다는 논란이 있었고, 청와대도 유감과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며 “법으로 열람이 금지된 대통령지정기록물 및 비밀기록을 보고 작성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대통령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온라인 열람은 대통령지정기록물 및 비밀기록을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시민단체 “회고록 위해 온라인장비 설치?”
기록원·이명박 측 “설치했지만 보진 않아”

정의당 천호선 대표는 한발 더 나아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사건을 언급했다. 천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이 정책연구와 집필을 위해서 온라인 열람을 호소했는데도 이를 거부하고 범죄자로 몰아간 당사자가 자신은 열람 장치를 버젓이 설치해놓고 편의를 누린다는 것 자체가 후안무치하고 파렴치한 일”이라며 “국가기록원은 지정기록물은 열람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이 또한 철저히 조사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많은 정치평론가들은 이번 사건이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시 거주하던 봉하마을에 ‘이지원’ 시스템을 구축한 것과 유사하다 보고 있다. 2008년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청와대 온라인 업무관리 시스템인 이지원을 구축한 사실을 알고 수사에 착수한 바 있다. 대통령 기록물 반출의혹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였다. 또한 이후 ‘사초폐기 사건’ ‘NLL 대화록 사건’으로 이어진 시발점이라는 견해로 보면 한국 근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이에 과거 사건과의 형평성 논란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봉하 이지원
사과 받아내


이 전 대통령 측은 설치 자체를 부인하다 최근 “지정기록물은 확인할 수 없었다”고 입장을 바꿨다. 즉 장비를 사저에 설치한 것은 맞으나 지정기록물을 열람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열람을 하지 않고 회고록을 작성할 수 있었을까? <한겨레>에 단독으로 보도된 내용을 보면 그 해답에 다가갈 수 있다. 이 전 대통령의 회고록 집필을 총괄한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2월1일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회고록 집필 과정에서) 대통령이 위임한 사람이 대통령기록관에 가서 대통령기록물을 수차례 열람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김 전 수석은 “기본적으로 대통령과 참모들의 기억이 있고, 메모도 있다”면서 이렇게 밝혔다. 그는 ‘회고록에 나오는 수치가 상세하고, 외국 정상들과 북쪽 인사들 발언이 직접 인용됐다’는 지적에 대해 “참모들의 기억이나 그때 배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등을 종합해서 쓴 것이고, 정확한 내용은 대통령기록관에 가서 조회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즉 기억과 메모를 기본으로 하되 수치와 같이 정확한 내용이 필요할 때는 대통령기록관에 가서 조회를 한 것이다. 이는 이 전 대통령 측과 기록원 사이에 주고받은 공문서가 ‘부존재’했다는 내용과 대치되는 것이다.

봉하마을 설치 땐 고강도 수사…지금은?
퇴임 대통령, 기록물 대한 인식 바꿔야

이에 대해 대통령기록관 관계자는 “김 전 수석이 말한 것처럼 이 전 대통령 측 사람들이 기록원에 방문해서 조회한 것이 맞다”면서 부존재로 답한 부분에 대해서는 “공문서의 존재 유무에 대한 공개 요청이기에 부존재라 적힌 것이다. 실제로 공문서를 주고받은 사실은 없다. 요청서를 주고받은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정보공개센터 측 관계자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공문서라고 적시한 것이다”며 “만약 요청한 내용이 불확실했다면 담당자가 요청인에게 전화를 걸어 정확하게 어떤 내용을 궁금해 하는지 물어보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인데 기록원 측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입장을 밝혔다.

정보를 종합해보면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의 사저에 온라인 기록물을 열람할 수 있는 장비를 설치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대통령지정기록물 등을 온라인으로 확인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에 기록원을 직접 찾아가 열람한 사실을 알기위해 정보공개센터가 공문서 존재 확인을 요청했으나 부존재로 답이 왔다. 확인하고자 한 사실이 신청서나 요청서가 아닌 ‘공문서’였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측근이 기록원을 방문해 조회한 내용을 회고록에 실은 것도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만천하에 대통령기록물의 내용이 공개된 것이다. 기록원이 밝힌 바와 같이 법을 위반한 사실은 없으나 도의적 책임은 피하기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

“기록물 인식
이젠 바꿔야”

2008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로 대통령 기록물을 가져가려 하자 강하게 이의제기했던 이 전 대통령. 그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이 전 대통령 측의 반응에 참여정부 시절 주요관계자는 전화인터뷰에서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노 전 대통령 때와) 똑같은 일인데 그때는 수사를 시작해서 사과까지 받아냈으면서 퇴임 후에는 본인이 그렇게 했다니…”라고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일각에서는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최 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일련의 사건에 대해 “대통령이라면 자신의 기록물을 가지고 나가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가지게 된다”며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물론이고 역대 대통령들 모두 그런 의혹을 받아왔다”고 말했다. 이어서 최 원장은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하면서도 “퇴임 대통령의 기록물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한다. 사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모습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chm@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자원외교국정조사에 대한 국민여론

대한민국 국민 10명 중 7명 가량은 국회에서 열리는 자원외교 국정조사 청문회 자리에 이명박 전 대통령을 직접 증인으로 채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는 <뉴스타파>의 의뢰로 이 전 대통령의 증인 채택 여부를 묻는 긴급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찬성의견이 67.2%를 기록, 반대의견인 17.3%보다 4배가량 더 높게 조사됐다고 지난 2일 밝혔다. 잘 모르겠다는 의견은 15.5%로 나타났다.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의 증인 채택 여부에 대해서도 여론조사가 실시됐다. 발표된 내용에 따르면 찬성의견이 58.7%로 반대의견 29.0%보다 2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잘 모르겠다는 의견은 12.3%였다.

10명 중 7명 “MB 증인으로 나서야…”

새누리당은 이 전 대통령, 최경환 경제부총리 등에 대해 증인 채택을 요구해 온 새정치연합에 노무현정부 시절 자원외교의 주축으로 알려진 문재인 대표에 대해서도 증인 채택을 해야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여론조사가 발표된 날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한 이명박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는 홍영표 의원 등 새정치연합 소속 자원외교국조특위 위원 7명이 이 전 대통령의 국정조사 청문회 출석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들은 회견문을 통해 “새누리당의 증인 채택 거부로 자원개발국정조사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며 “이제는 이 전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자원외교 국부유출의 주범인 이 전 대통령이 청문회에 나와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진실을 외면하고 여당 뒤에 숨는다면 국민의 지탄을 받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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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