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을 찾아서 ①경남 하동군 홍소술·김동곤

다향 가득한 지리산에서 음미하는 ‘제다 명인’의 차 한잔

오랜 친구와 마주 앉아 고운 햇살 담긴 차 한잔 나누고 싶은 봄날이다. 좋은 차 한 모금을 머금으면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그 향기가 입안에 퍼져 거친 말을 뱉을 수 없고, 맑은 찻물을 내려다보며 마음까지 겸손해진다. 차 맛을 위해 평생을 바친 제다 명인을 만나러 하동 화개로 간다.

화개천·지리산 정기 받고 자라는 화개동 차나무
가장 좋은 찻잎 수확시기 ‘초세작부터 중작’

하동 야생차의 시작은 신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828년(흥덕왕3) 당나라 사신으로 간 김대렴이 차나무 종자를 가져왔고, 왕은 지리산 화개동 일대에 심으라고 명한다. 이후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 임금에게 진상하는 차가 화개동에서 재배되었다. 하동의 야생차를 ‘왕의 차’라 부르는 까닭이다.
지리산 화개동은 화개장터에서 화개천을 거슬러 오르는 곳으로, 지금도 양안의 산자락 곳곳에는 차나무를 키우고 찻잎을 덖는 다원이 있다. 섬진강과 화개천이 만든 안개를 먹고 지리산의 정기를 받아 향이 좋은 차를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기업 형태로 운영되는 곳부터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다원까지 20여곳에 이른다.
그중 화개제다는 화개동에 자리한 많은 다원의 원조라 할 수 있다. 홍소술 명인(농림수산식품부 지정 대한민국 식품명인 30호 죽로차 제조·가공 부문)은 1950년대 말 우연한 기회에 하동의 야생차를 마신 뒤, 부산에서 하던 사업을 정리하고 화개동으로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에게서 높은 값으로 찻잎을 수매하고, 차나무 종자를 산에 심게 했다. 밭농사를 주로 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차나무를 심으며 화개동 일대가 야생차 밭이 되었고,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왕령으로 시작된
하동의 야생차

올해 86세인 홍소술 명인은 좋은 차나무를 구하기 위해 전국을 누비고,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찻잎을 따던 일을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찻잎을 덖은 100년 넘은 가마솥은 선친이 쓰던 것으로, 가보처럼 간직하고 있다.
쌍계제다는 하동 야생차의 명성을 전국에 알리며 다양한 전통차를 만드는 김동곤 명인(농림수산식품부 지정 대한민국 식품명인 28호 우전차 제조·가공 부문)이 운영하는 다원이다. 화개동 토박이로 1975년 쌍계제다를 설립하고, 차를 덖는 일뿐 아니라 차와 관련된 책도 여러 권 출간했다. 쌍계제다에서 만든 녹차와 전통차, 다양한 허브티와 한방 차는 티이즘(teaism)이라는 브랜드로 포장되어 전국 백화점에 매장을 두고 있다. 대기업의 차 브랜드에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좋은 차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찻잎을 수확하는 시기에 따라 곡우(양력 4월20일경) 전에 따는 초세작, 그 이후에 따는 세작, 5월 중순에 따는 중작, 그 이후에 따는 대작으로 나뉜다. 초세작부터 중작 정도면 좋은 차를 만드는 데 손색이 없는 것으로 친다. 귀한 대접을 받으며 높은 몸값을 자랑하는 초세작으로 만든 차도 덖는 과정에서 잘못되면 차 맛을 버리고, 중작도 잘 덖으면 맛과 향이 좋은 차가 된다.
제다 과정의 기본은 똑같다. 달군 솥에 차를 덖고 멍석으로 옮겨 비비는 과정을 반복하는데, 날씨와 찻잎의 수분 함량에 따라 덖는 횟수가 달라진다. 마지막 과정(끝덖음)은 차의 향을 결정짓고, 오래 보관하고 마실 수 있게 하므로 가장 중요하다. 찻잎을 덖는 제다 명인의 손끝에서 새 생명을 얻어 비로소 향기로운 차 한 잔이 완성되는 것이다.

차 덖기·다례체험 가능한 하동 차문화센터
섬진강 백릿길 하동야생차 구간 걸으며 ‘힐링’


명인들이 운영하는 다원에서는 부담 없이 차를 마실 수 있는 시음장도 마련된다. 차의 깊은 맛을 구별하는 것은 오랜 경험이 있어야겠지만, 차 한 잔에 담긴 정성을 느끼는 것은 열린 마음 하나면 충분하다.
칠불사는 101년 가락국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암자를 짓고 수도하다가 성불했다는 전설이 짓든 고찰이다. 다도 이론을 정립하고 차 문화를 꽃피운 초의선사가 이곳에 머무르며 책을 쓰고, 그 유명한 <동다송>을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복원된 아자방지(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44호)와 대웅전 뒤편으로 조성된 야생차 밭이 눈길을 끈다. 

하동 차 시배지에 가면 화개동 일대에 처음 차나무를 심은 김대렴 공의 추원비가 있다. 언덕을 따라 심긴 차나무 사이를 걸으며 초의선사의 <동다송>을 음미하고,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화개천 물줄기를 조망하는 즐거움도 누려보자. 

차 시배지 아래 자리한 하동 차문화센터는 하동 차 재배의 역사를 비롯해 차를 우려 마시는 다구 등을 전시한 차문화전시관과 차체험관으로 구성된다. 차체험관에서는 차 덖기를 비롯해 떡차 만들기, 다식 만들기, 다례 체험 등이 상시 진행되어 특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다원에서 마시는
따뜻한 차 한잔

차와 찻잔은 불가분의 관계다. 좋은 찻잔은 차의 떫은맛을 부드럽게 만들고, 찻잔의 촉감과 시각적인 아름다움까지 더해 오감을 즐겁게 한다. 진교면의 백련리도요지는 조선 시대 가마터로,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 살던 수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고 전해진다. 일본이 국보로 자랑하는 이도다완의 원류를 백련리 일대로 보는 이들도 있다.
지금도 여러 도예가들이 백련리 일대에 자리 잡고 혼을 담은 도예 작업을 한다. 그중 길성도예는 일본까지 명성이 자자하다. 폐교된 초등학교에 작업 공간을 마련하고, 평생에 걸쳐 작업한 도예 작품을 전시한 갤러리 ‘길’과 차를 마시며 대화할 수 있는 한옥 다실을 지었다. 차와 그릇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그윽한 다향을 음미할 수 있다.

섬진강 100리 테마로드 하동 구간은 화개장터에서 하동송림공원이 있는 섬진교를 잇는 약 21km 길이다. 총 네 구간으로 나뉘며, 구간마다 특색 있는 이야기를 담아 조성되었다. 화개장터에서 녹차연구소까지 야생차 구간(3.2km)은 대숲과 야생차 밭이 어우러진 강변을 따라 걷는 길이다. 향기로운 차를 마시고 부드러운 강바람을 맞으며 하동의 봄날이 깊어간다.
자료제공 : 한국관광공사
www.visitkorea.or.kr

----------------------<여행 정보>----------------------


당일 코스
칠불사→쌍계사→차 시배지→하동 차문화센터→쌍계제다→화개장터→화개제다→백련리도요지

1박 2일 코스
· 첫째 날 : 칠불사→쌍계사→차 시배지→하동 차문화센터→쌍계제다→화개장터→화개제다→백련리도요지
· 둘째 날 : 섬진강 100리 테마로드 걷기→하동송림공원

관련 웹사이트
· 쌍계명차(쌍계제다) www.sktea.com
· 하동 문화관광 http://tour.hadong.go.kr
· 칠불사 www.chilbulsa.or.kr

문의 전화
· 쌍계제다 055-884-8100
· 화개제다 055-883-2233
· 칠불사 055-883-1869
· 하동 차문화센터 055-880-2895
· 길성도예 055-883-8486
· 하동군청 문화관광과 055-880-2377

대중교통
기차> 용산역-구례구역 : KTX 하루 2회(05:20, 13:50) 운행, 약 3시간 소요. 구례구역에서 구례-구룡 농어촌버스 승차, 구례터미널 정류장에서 구례-중한치 농어촌버스로 갈아타고 하천리 정류장 하차, 약 1시간50분 소요.
* 문의 : 레츠코레일 1544-7788, www.letskorail.com
버스> 서울남부터미널-화개시외버스공용터미널 : 하루 10회(06:30~22:00) 운행, 약 3시간50분소요.
* 문의 : 서울남부터미널 02-521-8550
            전국시외버스통합예약안내서비스 www.busterminal.or.kr

자가운전
순천완주고속도로 구례화엄사 TG→산업로 따라 약 7.8km 진행→하동·화엄사·마산·토지 방향 우측 도로→구례로 따라 약 14.9km 진행→화개삼거리에서 쌍계사 방향 좌회전→화개로 따라 약 280m 진행→쌍계제다 시음 공방

숙박
· 쉬어가는누각 : 화개면 화개로, 055-884-0151
· 최참판댁숙박체험동 : 악양면 평사리길, 055-880-2384
· 수류화개 : 화개면 쌍계로, 055-882-7706, www.sooryu.co.kr
· 고궁모텔 : 하동읍 중앙3길, 055-884-5100

식당
· 섬진강횟집 : 참게가루장국, 하동읍 섬진강대로, 055-883-5527
· 수석원식당 : 영양돌솥밥, 화개면 석문길, 055-883-1716
· 동흥식당 : 재첩국, 하동읍 경서대로, 055-884-2257
· 하동솔잎한우플라자 : 한우구이, 고전면 하동읍성로, 055-884-1515
· 태봉식당 : 매운탕·참게가루장, 화개면 화개로, 055-883-2466

축제와 행사
· 하동야생차문화축제 : 2015년 5월22~25일, 화개면·악양면 일대, 055-880-2377, http://festival.hadong.go.kr

주변 볼거리
불일폭포, 청학동, 삼성궁, 평사리공원오토캠핑장, 화엄사, 청매실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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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