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특별기획] MB정부 출범, 그 이후…③대형 사건·사고 풀스토리

  • 강현석 angeli@ilyosisa.co.kr
  • 등록 2013.02.07 18: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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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펑펑' 하루도 편한 날 없었다

[일요시사=사회팀] "이보다 더 바쁠 순 없다." 한 경찰 관계자는 MB정부 5년을 평가해달라는 얘기에 이렇게 답했다. 유난히 대형 사건이 많았던 지난 5년. 반드시 짚고 가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을 모아봤다. 


MB정부 5년은 말그대로 다사다난했다. 한 경찰 관계자는 "민주화 정부 출범 이후 MB정부만큼 경찰력이 바삐 돌아간 적이 없었다"며 지난 5년을 회상했다. 그만큼 이번 정부 들어 사건·사고가 많았다는 뜻이다.

항간에서는 MB정부가 '꼼꼼한(?) 정부'로 불리지만 사건·사고 뒷수습에서는 합격점을 줄 수 없다는 게 각계의 중론이다. MB정부의 대형사건 처리가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건 지난 2008년 소위 '명박산성'으로 대변되는 '촛불정국'이 개시되면서다.

꼼꼼한 그분의
사건·사고 처리

지난 2008년 5월 10대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한·미 쇠고기 협상 결과에 반대하는 촛불 집회 참가자였다. 이들은 인터넷 등을 통해 광우병의 위험을 전해 듣고 친구들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에 정부는 '전교조 배후설' 카드를 꺼내들었다. 집회 참가자 대부분이 10대인만큼 교육 현장에 있는 전교조가 학생들을 선동하지 않았겠냐는 얘기가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흘러나왔다.

현장에 있던 학생들은 코웃음을 쳤다. 이와 동시에 촛불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20∼30대 청년층이 서울광장에 결합했고, 아이들 '먹을거리' 걱정에 유모차를 끌고 나온 가정주부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폭등하는 물가와 불안정한 일자리에 시름하던 직장인들도 촛불 행렬에 대거 합류했다.


치솟는 촛불의 기세가 청와대를 위협하자 이명박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했다. 하지만 문제가 됐던 쇠고기 위생조건검역 장관고시 강행을 기정사실화했다.

이에 반발한 시민들은 도로를 점거한 채 가두시위에 나섰다. 경찰은 불법시위라며 물대포와 방패를 동원해 이들을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부상자와 연행자가 속출했다. 경찰의 진압은 연일 과격해졌고 시위대도 이에 맞서 폭력성을 띄었다. 촛불은 어느새 큰 횃불이 됐다.

당시 경찰 수장이었던 어청수 경찰청장은 "(시위 참가자들은) 폭력 시민이기 때문에 강경 진압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시민들은 '쇠고기 재협상'에서 '이명박 퇴진'으로 구호를 바꿨다. 매일 밤 서울 종로 일대에는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한 전·의경과 경찰 호송버스가 진을 쳤다. 정부와 시위대 간 끝을 알 수 없는 '벼랑 끝 대치'는 두 달이 지나서야 정부의 승리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정권초기 광우병 촛불 시위로 '전국 들썩들썩'
서울 한복판서 현대사 비극 용산참사 벌어져

그러나 광우병 촛불 시위는 우리나라 집회 풍토를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살벌한 죽창을 든 폭력 시위가 아닌 종이컵에 촛불을 든 문화제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첫 집회였기 때문이다.

시위 기간 서울 곳곳에서는 흥겨운 노래가락이 퍼졌고, 함께 하는 춤사위가 광장마다 이어졌다. 초기 집회 현장에서 시위대가 비폭력을 외치다보니 경찰력과 직접 맞서기보다는 공권력에 대한 날선 풍자와 유머가 하나의 문화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의 선풍적인 인기도 이 같은 사회지형의 변화를 반영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사회 저명인사들의 반성도 이어졌다. 당시 김지하 시인은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온라인을 통해 소통하고 토론하는 새로운 정치집단이 대한민국에 생겨났다" 평한 뒤 "정치권이나 지식인을 비롯한 책임 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젊은 세대와의 교감을 더욱 넓히고 많은 대화를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촛불서 놀란 MB

용산서 터트렸다

그러나 촛불이 켜진 광화문 일대를 말없이 바라봤다던 이 대통령은 이때부터 시위대에 대한 적대감을 키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촛불시위의 트라우마는 끝없이 MB정부를 괴롭혔다. '촛불 정국' 이후 경찰은 '명박산성'과 같은 소극적인(?) 대응을 벗어나 방패를 들고 직접 내리찍는 강경진압을 선택했다.

그리고 곧바로 현대사의 비극인 '용산참사'가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2009년 1월 서울 용산4지구 철거민 40여명은 철거가 예정된 남일당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그들은 정부의 재개발 정책을 반대하며 생존권 보장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이 농성에 돌입한 시점부터 비극은 막을 올렸다.

이?날 경찰은 특공대를 동원해 강제진압에 나섰다. 철거민이 올랐던 망루에는 난데없이 불길이 일었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절규와 함께 현장은 불바다로 변했다. 이 불길에 고 이상림씨를 비롯한 철거민 5명, 경찰특공대원 1명이 안타까운 목숨을 잃었다. 전체 부상자는 23명에 달했다.

'용산참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날, 김석기 당시 서울경찰청장은 사건에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김 전 총장의 사퇴로 모든 사건이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용산참사'는 다시 법정공방으로 이어졌다.

검찰은 용산4지구 철거민 대표 이충연씨 등을 상대로 특수공무집행 방해 치사 혐의를 적용했다. 기소된 이씨 등은 1심에서 모두 4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민변 등의 사민·시회단체는 검찰의 기소내용을 반박하며 "화재 원인으로 지목된 화염병을 농성자가 던진 걸 본 사람이 아무도 없고, 경찰 측에도 진압 과정에서 주의의무 위반이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대법원은 2010년 11월 기소된 철거민들에 대해 유죄를 확정했다.

이씨 등이 수감된 후 이씨 가족과 철거민 유가족들은 매해 '용산참사 추모제'를 열었다. 사고가 발생한 용산4구역 재개발은 참사 발생 4년이 지나도록 답보 상태다. 비록 최근 용산참사 수감자들이 설 특별사면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용산참사 진상규명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어 공은 박근혜 정부로 넘어간 상황이다.

극심한 좌우분열
천안함 사건터져

용산참사가 벌어진 해와 같은 해인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도 서거하면서 우리나라는 극심한 좌우 분열을 겪게 된다. 해방 공간 이후 최대의 갈등 국면에 접어든 2010년. 북한발 대형 사고가 터졌다.

소위 '천안함 침몰 사건'이라 불리는 이 대형 국가재난은 당시 정치 상황과 맞물려 정국을 뒤흔드는 핵심 변수로 급부상했다. 같은 사안을 놓고 각기 다른 해석이 우후죽순처럼 불거졌고, 진보와 보수로 나뉜 정치적 입장은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한 진실을 상호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다.


2010년 3월. 인천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 초계함 PCC-772(천안함)가 침몰했다. 정부는 이 사건을 '천안함 피격 사건'이라 지칭했다. 국방부는 "북한 정찰총국이 우리나라 초계함을 침몰시켰다"고 브리핑했다.

당시 천안함에 탑승하고 있던 104명의 군인 중 58명은 구조됐으나 나머지 46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모두 사망자로 확인됐다. 더불어 수색과정에서 UDT 대원인 한주호 해군준위가 작업 중 순직했다. 뿐만 아니라 천안함 실종자 수색 작업을 하던 '금양98호' 역시 인천 서해 부근에서 침몰해 탑승 선원 9명 전원이 실종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점점 늘어났다.

논란도 점차 확대됐다. 대한민국을 포함한 미국, 영국, 스웨덴 등의 국제 전문가 24명이 포함된 '천안함 합동조사단'은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한 것"이라고 공식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국제사회는 북한의 천안함 공격을 규탄하는 의장성명을 채택했다.

하지만 합동조사단의 발표를 반박하는 증거 자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잠수함의 이동 경로에 대한 설명이 불충분하다는 지적부터 어뢰가 북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이에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에 살면서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믿는 것은 정말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의혹 제기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당시 북한은 사고 지점에 암초가 많다는 점을 근거로 스스로 좌초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천안함 침몰 원인을 놓고 수많은 의혹이 제기됐으나 결론은 '피격설'로 마무리됐다. 남북 간의 긴장은 고조됐으며, 대한민국 안에서도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를 부정하는 글을 쓴 시민이 국정원으로부터 내사를 받는 등 이른바 '용공 논란'이 점화됐다.

이에 대해 천안함 조사 의혹을 제기한 이승헌 버지니아대학교 교수는 "정부의 천안함 발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고소됐다"며 "이것은 현재 우리 사회가 합리적인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고 비판했다.



천안함·연평도 도발 초긴장
연쇄살인·아동성폭행 잇달아

'천안함 사건'으로부터 8개월 후 북한은 '연평도 도발'을 통해 또 한 번 대한민국의 안보를 건드렸다. 2010년 11월 북한은 대한민국의 영토인 연평도에 예고 없는 집중 포격을 가했다.

북한이 대한민국 영토를 직접 타격하여 민간인이 사망한 건 한국전쟁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은 보복 사격을 했고 이 사건은 국제사회의 큰 관심을 불러 모았다. 남북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

남북 간의 기류가 심상치 않자 언론은 좌우 갈등이 극명한 민감한 이슈보다는 살인·성폭행과 같은 자극적인 이슈에 천착한다. 괜한 걸 건드렸다가 이해당사자로부터 고소를 당하거나 정부기관으로부터 내사를 받는 것에 비해 강력 사건은 비교적 안전한(?) 이슈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경향은 지난 2009년 용산참사 이후 "'강호순 사건'을 활용해 여론을 반전하라"고 지시한 청와대발 메일로 한 차례 드러난 적이 있다. 그러나 MB정부 들어 흉악범들이 기승을 부린 건 사실. 그 첫 시작은 지난 2008년 조두순이었다.

2008년 12월. 조두순은 초등학생 A양을 납치·성폭행했다. '조두순 사건'으로 알려진 이 범죄로 피해자 A양은 생식기와 내장 대부분이 파열되는 치명적인 내상을 입었다. 조두순은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2년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 '조두순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아동성범죄에 대한 형량을 최대 50년까지 상향 조정하고 공소 시효도 폐지하기로 하는 법안을 입법했다.

2009년 12월. 정부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주도한 아동성범죄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후 3개월도 되지 않아 '김길태 사건'이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2010년 2월, 김길태는 예비 중학생인 한 아이를 납치·성폭행·살해하고 그 시신을 유기했다. 범죄의 심각성을 느낀 경찰은 6년 만에 피의자 신상을 공개하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범죄 예방 효과는 없었다. 아동과 여성을 대상으로 한 흉악범죄는 더 잔인한 성격을 띠게 됐다.

2011년 4월. 늘어나는 성폭행 사건에 대한 국민의 우려가 커지자 법무부는 모든 성범죄자들의 신상을 인터넷에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신상공개도 희대의 살인마 오원춘의 범행을 막진 못했다.

2012년 4월. 오원춘은 20대 여성 B씨를 집으로 납치한 뒤 강간을 시도했으나 실패, 이후 목 졸라 살해한 뒤 그 시신을 토막 냈다. 범행의 잔혹함이 가져다주는 충격도 컸지만 경찰의 늦장 대응은 당시 범국민적인 분노를 촉발했다. 이 사건으로 조현오 경찰청장은 스스로 옷을 벗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은 이가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유족들은 오원춘 사형 판결을 목 놓아 기다렸다. 많은 국민도 오원춘의 사형을 바랬다. 하지만 오원춘은 대법원 선고공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현재는 오원춘 사건으로 인해 사형수들에 대한 형 집행이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천안함 정국 이후
성폭행 보도 봇물

실질적인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됐던 대한민국은 이제 다시 '사형'을 부르짖는 상황에 놓여 있다.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남·북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금강산 관광은 언제 재개될지 알 수 없다. 용산 참사 진실규명은 아직도 멀어 보이며, 전국에서는 철거민과 개발업자들의 실랑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쇠고기 협상으로 물꼬를 튼 한·미 FTA가 2011년 체결됐지만 정부가 약속한 체감 경제 이득은 전무하다. 먼 미래의 누군가는 아마 MB정부를 '잃어버린 5년'이라고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강현석 기자<k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지난 5년간 재난·재해

▲08년 02월 숭례문 방화사건 (사망 없음)
  08년 12월 이천 물류창고 화재 사고 (사망 8명)
▲09년 02월 화왕산 억새태우기 사고 (사망 6명)
  09년 11월 부산 실내사격장 화재 사고 (사망 10명)
▲10년 01월 한국 중부 폭설 (사망 1명·피해 106억)
  10년 11월 포항 요양원 화재 참사 (사망 10명)
▲11년 4월 구제역 파동 (사상 36명·피해 2000억)
  11년 7월 한국 중부 집중호우 (사망·실종 71명)
▲12년 5월 부산 노래방 화재 사고 (사망 9명)
  12년 8월 태풍 볼라벤 상륙 (사망·실종 25명·피해 800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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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한의대 졸업준비위 ‘강제 가입’ 논란

[단독] 한의대 졸업준비위 ‘강제 가입’ 논란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전국 한의과대학교에는 ‘졸업준비위원회’가 존재한다. 말 그대로 졸업 준비를 위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이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명목상 자발적인 가입을 독려하는 듯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강제로 가입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졸업준비위원회(이하 졸준위)는 졸업앨범 촬영, 실습 준비, 학번 일정 조율, 학사 일정과 실습 공지, 단체 일정뿐 아니라 국가시험(이하 국시) 대비를 위한 각종 자료 배포를 하고 있다. 매 대학 한의대마다 졸준위는 거의 필수적인 조직이 됐다. 졸준위는 ‘전국한의과대학졸업준비협의체(이하 전졸협)’라는 상위 조직이 존재한다. 자료 독점 전졸협은 각 한의대 졸업준비위원장(이하 졸장)의 연합체로 구성돼있으며, 매년 국시 대비 자료집을 제작해 졸준위에 제공한다. 대표적으로 ‘의텐’ ‘의지’ ‘의맥’ ‘의련’ 등으로 불리는 자료집들이다. 실제 한의대 학생들에게는 ‘국시 준비의 필수 자료’로 통한다. 국시 100일 전에는 ‘의텐’만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졸준위가 없으면 국시 준비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말이 정설이다. 한의계 국시는 직전 1개년의 시험 문제만 공개되기 때문에 시험 대비가 어렵기 때문이다. 국시 문제는 오직 졸준위를 통해서만 5개년분 열람이 가능할뿐더러, 이 자료집은 공개자료가 아니라서 학생이 직접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실상 전졸협이 자료들을 독점하고 있는 셈이다. 이 자료집을 얻을 수 있는 경로는 단 하나, 졸준위를 결성하는 것이다. 졸준위가 학생들의 투표로 결성되면 전졸협이 졸준위에 문제집을 제공한다. 이 체계는 오랫동안 유지돼왔고, 학생들도 졸준위를 통해 시험 자료를 제공 받는 것이 ‘관행’처럼 받아들여왔다. 이 때문에 졸준위는 반드시 결성돼야만 한다는 기조가 강하다. 학생들의 반대로 졸준위가 결성되지 않을 시 전졸협은 해당 학교에 문제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졸준위 결성은 모든 학생들의 가입 동의를 얻어야 가능하다. 졸준위 가입 여부는 실질적으로 선택이 아니다. 자료집은 전졸협을 통해서만 제공되기 때문에, 졸준위에 가입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인식이 학생들 사이에서 강하게 자리 잡았다. 학생들은 “문제를 얻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크다”고 말한다. 졸준위가 결성되지 않을 경우 현실적으로 문제집을 받아볼 수 있는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졸준위는 학생들의 해당 학년 학생들을 모두 가입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실제 한 대학교에서는 졸준위 결성을 위한 투표를 진행했는데 익명도 아닌 실명 투표로 진행됐다. 처음에는 익명으로 진행했지만 반대자가 나오자 실명 투표로 전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반대 의견이 나오기 어렵다. 실명으로 투표가 진행되는 데다, 반대표를 던질 경우 이후 자료 배포·학년 일정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졸준위 결성, 실명 투표로 진행 가입시 200만원 이상 납부 필수 문제는 이 졸준위 가입이 무료가 아니라는 점이다. 졸준위에 가입하면 졸업 준비 비용(이하 졸비)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돈을 걷는데, 그 비용이 상당하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한 대학교의 졸비는 3차에 걸쳐 납부하도록 했는데 1차에 75만원, 2차에 80만원, 3차에 77만원 등 총 232만원 수준이었다. 이는 한 학기 등록금에 맞먹는 금액이다. 금액 산정 방식은 졸준위 가입 학생 수에 따라 결정되는데, 한 명이라도 빠지게 되면 나머지 인원의 비용 부담이 커지게 된다. 심지어 2명 이상 탈퇴하게 된다면 졸준위가 무산될 수도 있다. 이 모든 사안은 ‘졸장’의 주도 하에 움직인다. 졸장은 학년 전체를 대변하며 전졸협과 직접 소통하는 역할을 맡는다. 실제 졸장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한 명이라도 탈퇴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이 오갔을 정도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졸준위가 결성되면 가입한 모든 학생들은 졸준위의 통제를 받는다.<일요시사>가 입수한 한 학교의 규칙문에 따르면 졸준위는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두고 있었다. ▲출석 시간(8시49분59초까지 착석 등) ▲교수·레지던트에게 개인 연락 금지 ▲지각·결석 시 벌금 ▲회의·행사 참여 의무 ▲병결·생리 결 확인 절차 ▲전자기기 사용 제한 ▲비대면 수업 접속 규칙 ▲시험 기간 행동 규칙 ▲기출·족보 자료 관리 규정 등이다. 학생들이 이 규정을 어길 시 졸준위는 ‘벌금’을 부과해 통제하고 있었다. 금액도 적지 않았다. 규정 위반 시 벌금 2만원에서 50만원까지 부과할 수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병결이다. 졸준위는 병결을 인정하기 위해 학생에게 진단서 제출을 요구하고, 그 내용(질병명·진료 소견·감염 여부 등)을 직접 열람해 판단했다. 제출 병원에 따라 병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공지도 있었다. 한 병원의 진단서가 획일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단체가 학생의 개인 의료 정보를 열람해 병결 여부를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은 학생들 사이에서 부담과 압박으로 작용했다. 질병이 있어도 벌금이 부과될 수 있고, 병결을 얻기 위한 절차가 학습보다 더 어렵다는 말도 나왔다. 규정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면 졸준위는 대면 면담을 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 과정에서 3:1로 면담을 진행하는 등 학생이 위축될 수 있는 방식을 행하기도 했다. 전자기기 사용 불가 규칙 어기면 벌금도 이 같은 문제로 탈퇴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실제 A 대학 졸준위 전체 학번 회의에서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한 학생은 규정에 문제를 느껴 졸준위 측에 탈퇴를 의사를 밝혀왔다. 이 회의에서는 그간 탈퇴 의사를 밝힌 학생과의 카톡 대화 전문이 학생들에게 공개됐다. 공개된 카톡 내용에는 탈퇴 과정이 담겨있었는데 순탄하지 않았다. 졸준위 측은 탈퇴 의사를 즉각적으로 승인하지 않았고, 재고를 요청하거나 면담하는 방식으로 요청을 지연했다. 해당 학생이 다시 한번 탈퇴 의사를 명확히 밝힌 뒤에도, 졸장은 “만나서 얘기하자”며 받아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 대화를 공개한 뒤 학우들에게 ‘졸준위에서 이탈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서약서를 받아내기도 했다. 졸준위 운영이 조직 이탈 자체를 문제로 판단하고,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압박을 가한 정황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해당 학우는 탈퇴 확인 및 권리 포기 동의서에 서명한 뒤에야 졸준위를 탈퇴할 수 있었다. 탈퇴 이후에도 갈등은 지속됐다. 목격자에 따르면 시험 기간 중, 강의실 앞을 지나던 탈퇴 학생은 졸준위 임원 두 명에게 “제보가 들어왔다”며 불려 세워졌다. 임원들은 이 학생이 학습 플랫폼 ‘퀴즐렛’을 사용한 점을 언급하며, 그 자료 안에 졸준위에서 배포한 기출문제가 포함돼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졸준위에서는 퀴즐렛에 학교 시험 내용이 있다며 탈퇴자가 보지 못하도록 사용자를 색출하기도 했다. 한편, 전졸협은 10년 전 자체 제작한 문제집으로 논란된 적이 있다. 당시 한의사 국가고시 시험문제가 학생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예상 문제집과 지나치게 유사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시험이 끝난 직후 시험장 앞에서 수험생 60여명을 상대로 참고서와 문제집을 압수했고, 국가시험원까지 압수수색해 기출문제와 대조 작업에 들어갔다. 기형적 구조 문제가 된 교재는 ‘의맥’ ‘의련’ 등 졸준위 연합체인 전졸협이 제작·배포해 온 자료들이다. 학생들은 교재에 일련번호를 붙이고 신분증을 확인한 후 배포하는 등 통제된 방식으로 유통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제보자는 “학생들이 전졸협을 통해서만 기출문제를 구할 수 있는 구조는 기형적”이라며 “국가고시를 위해 몇백만원씩 돈을 받고 문제를 제공하는 건 문제를 사고파는 것”이라고 말했다. <imshar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