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년 전 고전이 오늘의 정책 논쟁을 다시 흔들고 있다. 지난 9일 자유시장연구원이 국회 의원회관 제1간담회실에서 <국부론> 발간 250주년 기념 세미나를 열었다. 1776년 3월9일 애덤 스미스가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지 정확히 250년이 되는 날이다.
산업혁명기의 변화를 배경으로 집필된 이 고전은 ‘국가의 부는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체계화했다.
스미스가 제시한 국부의 개념은 당시의 통념을 뒤집었다. 국부는 금과 은의 축적이나 국가 재정의 규모가 아니라, 한 사회가 얼마나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할 수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부의 원천을 저장된 재산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산력에서 찾은 셈이다.
이는 오늘날 성장과 투자, 생산성 논의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국가의 부는 결국 민간의 활력에서 나온다는 의미다.
이날 세미나는 고전을 오늘의 정책 언어로 번역하는 자리였다. 김병헌 부원장은 애덤 스미스의 생애와 시장경제 철학의 뿌리를 짚었고, 박인환 교수는 국부론의 법학적 의미를 해석했다. 조동근 교수는 한국 경제가 직면한 구조적 문제를 연결하며 정책적 시사점을 제시했다. 고전의 문장을 현실 제도의 좌표 위에 올려놓는 과정이었다.
오정근 원장이 강조한 핵심은 보다 직설적이었다. 국부는 개인의 이익 추구와 분업, 자유로운 교환이 작동하는 시장 시스템 속에서 증대된다는 것이다. 다만 스미스가 말한 자유는 무규율 상태의 방임이 아니었다. 국방·치안·사법·사회간접자본처럼 시장이 감당하기 어려운 영역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봤다.
시장을 대신하는 정부가 아니라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기반을 만드는 정부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국부론>의 핵심 개념인 분업은 생산성의 본질을 설명한다. 스미스는 핀 공장 사례를 통해 공정을 세분화하고 전문화할 때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고 분석했다. 숙련이 축적되고 작업 전환의 낭비가 줄어들며 반복 과정에서 더 나은 기술과 도구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결국 국부는 구호가 아니라 생산성 구조에서 만들어진다. 성장의 본질은 분업과 교환이 확대되는 시스템에 있다.
시장 규모의 확대 역시 같은 맥락이다. 교환의 범위가 넓어지고 물류·운송 비용이 낮아질수록 더 정교한 분업이 가능해진다. 시장이 커질수록 기업은 투자와 혁신에 나설 유인을 얻는다. 도로·철도·항만·물류망은 단순한 토목 사업이 아니라 생산성을 떠받치는 경제 인프라다.
오늘의 국가 전략이 시장의 범위를 넓히는 방향으로 설계돼야 하는 이유다.
조동근 교수는 이 같은 고전의 메시지를 오늘의 정책 과제로 압축했다.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고 경쟁과 진입을 보장하며 생산성 향상을 위한 투자를 촉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집단에 포획되지 않는 제도 설계 역시 필수 과제로 제시됐다.
특히 국채 확대에 의존하는 재정 운영은 장기 성장의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경고도 덧붙였다. 정부 지출은 선의가 아니라 효과와 책임의 검증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선의가 항상 시장 친화적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논의는 자연스럽게 상법 개정 문제로 이어진다.
정부는 소액주주 보호와 지배구조 개선을 명분으로 이사 충실의무 확대, 감사위원 분리 선출 강화, 대주주 의결권 제한 등을 추진했다. 취지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기업의 경영 판단 영역까지 법적 책임을 광범위하게 확대하는 방식은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지배구조 개선과 경영 자율 위축은 동시에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예측 가능성이다. 경영진이 시장 전망과 기술 변화보다 소송 위험과 규제 리스크를 먼저 계산하게 되면 의사결정은 방어적으로 흐른다. 공격적 투자 대신 소극적 관리가 늘고, 모험 자본은 위축되며, 혁신의 속도는 둔화된다.
시장을 바로잡겠다는 제도가 오히려 시장의 활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스미스가 경계했던 것도 권력 개입으로 인한 시장 왜곡이었다.
물론 모든 국가 개입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첨단전략산업 육성, 공급망 안정, 미래차 전환, 바이오 연구개발 확대처럼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초기 위험을 국가가 분담하는 정책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시장을 대신하는 개입이 아니라 시장이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하는 투자에 가깝다.
스미스 역시 공공재와 인프라 영역에서 국가의 역할을 인정했다. 핵심은 개입의 유무가 아니라 개입의 방식이다.
지역 균형발전 정책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5극3특 전략, GTX 확충, 지방 국가산단 조성, 혁신도시 고도화, 광역교통망 투자는 단순한 재정 집행이 아니라 국가 생산 기반을 확장하는 투자다. 수도권 과밀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지역의 산업·인력을 연결하면 시장의 범위 자체가 커진다.
이는 분업과 교환의 공간을 확장하는 조치이기도 하다. 균형발전은 복지정책이 아니라 성장정책일 수 있다.
결국 정책의 성패는 국가가 시장의 운동장을 넓히는가, 아니면 선수의 움직임까지 통제하는가에 달려 있다. 첨단산업 육성과 인프라 확대는 기반 조성형 개입이다. 반면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를 직접 옥죄고 사후 책임을 과도하게 확대하는 방식은 통제형 개입에 가깝다.
두 방식은 모두 공익을 말하지만 시장에 미치는 효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 국부 형성의 관점에서 이를 구분해야 하는 이유다.
250년 전 애덤 스미스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정부는 시장 질서를 세우고 있는가, 아니면 시장의 선택까지 대신하려 하고 있는가. 국부는 재정 규모나 규제 의지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생산과 투자, 분업과 교환, 혁신이 살아 움직일 때 비로소 커진다. 정부는 길을 만들 수 있지만 그 길을 달리는 주체는 결국 시장이다.
상법 개정 논란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이 공정 경쟁 질서를 세우는 정교한 보완인지, 아니면 시장 판단 구조를 통제 중심으로 재편하는 신호인지는 한국 경제의 방향성과 직결된다. 시장은 방치돼서도 안 되지만 과잉 설계돼서도 안 된다. 질서 있는 자유와 절제된 개입이 함께 작동할 때만 국부는 축적된다.
세미나에 참석한 세지홀딩스 정홍술 회장은 “250년 전 고전이 지금도 살아 있는 이유는 국가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여전히 제시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장과 정부의 역할이 뒤섞일수록 정책의 불확실성은 커지고 그 부담은 결국 기업과 투자자에게 돌아간다”며 “국가의 역할은 통제가 아니라 시장이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국부는 설계도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부의 의도만으로 축적되지도 않는다. 예측 가능한 제도와 안정된 규칙 속에서 기업이 투자하고 혁신하며 시장이 역동적으로 움직일 때 비로소 형성된다. 국가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지만, 성장을 만들어내는 힘은 결국 시장의 자율적 선택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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