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조선 왕조와 현대 정치 그림자

수렴청정 정치와 보이지 않는 민주주의의 권력

조선은 왕의 나라였고, 현대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다. 혈통과 신분의 권력은 선거와 헌법으로 대체됐지만,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까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조선에는 수렴청정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제도 밖에서 흐름을 조율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존재한다.

수렴청정은 왕이 어리거나 통치가 어려울 때 왕비나 대비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정사를 대신 듣고 판단하던 정치 방식이다. 그 대표적 인물이 세조의 부인이자 예종의 어머니, 성종의 할머니였던 정희왕후다. 그는 왕이 아니었지만, 왕조의 방향을 결정한 인물이었다.

막후 권력
정희왕후

현대 정치에서도 선출되지 않은 영향력은 권력의 경계를 미리 그린다. 왕은 사라졌지만, 왕을 설계하는 기술은 남아 있다. 필자는 지난 토요일 남양주 광릉에 있는 정희왕후의 능을 찾았다. 이 칼럼은 조선과 현대를 나란히 놓고, 왜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는지를 살펴보려는 시도다.

조선의 권력은 ‘얼굴 없는 손’에서 움직였다= 조선 정치에서 왕은 절대적 존재처럼 기록되지만, 실제 권력은 왕을 둘러싼 여러 세력의 균형 속에서 작동했다. 대비와 외척, 대신과 공신 세력은 서로를 견제하며 왕권의 방향을 조정했다. 이 구조의 가장 깊숙한 지점에 정희왕후가 있었다.

정희왕후는 단종을 제거하고 남편 수양대군을 왕으로 만든 후 세조 체제를 관리한 핵심 조정자였다. 단종의 폐위와 죽음은 개인의 비극이었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왕조 안정을 위한 선택으로 정당화됐다. 그녀는 직접 칼을 들지 않았지만, 칼이 어디로 향할지를 알고 있었다.


이 같은 권력의 작동 방식은 예외적 경우가 아니었다. 조선은 정통성의 균열을 무력만으로 봉합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조율자를 통해 체제의 연속성을 관리했다. 그 결과 조선의 권력은 왕의 발언보다 설계자의 판단에서 더 깊게 움직였다.

현대 민주주의도 설계자를 필요로 한다= 흔히 현대의 민주주의는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국민의 선택은 언제나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누가 후보가 될 수 있는지, 어떤 정책이 논의될 수 있는지는 선거 이전에 이미 정리된다. 투표는 선택의 순간이지만, 선택지 자체는 사전에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혈통과 신분의 권력
선거·헌법으로 대체

이 과정에서 현대판 ‘정희왕후형 권력’이 등장한다. 이들은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거나 공식 직책을 갖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러나 공천 구조, 정치권 내부 네트워크, 여론 형성 과정과 집권 이후의 판단에 이르기까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들의 개입은 드러나지 않지만, 정치의 흐름을 바꾸기에는 충분하다.

물론 이들이 결정을 직접 내리지는 않는다. 대신 무엇이 가능한 선택이고, 무엇이 배제될 선택인지를 미리 정한다. 왕이 바뀌어도 설계자가 남아 있었던 조선처럼, 민주주의에서도 제도가 바뀐다고 해서 설계자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얼굴은 교체되지만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다.

조선의 단종, 현대의 정치적 퇴장= 조선에서 단종은 정치적 희생의 상징이다. 그는 무능하거나 중대한 실책을 저질러서 제거된 인물이 아니었다. 체제 안정에 불리하다는 이유만으로 배제됐다. 조선 사회는 한 개인의 생명과 도덕성보다 왕조의 지속과 권력의 안정을 우선시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더 이상 최고 권력을 죽이지 않는다. 정치적 제거는 다른 방식으로 반복된다. 사법 리스크, 언론 보도, 핵심 배제, 내부 고립 등을 통해 권력은 서서히 무대에서 밀려난다. 생명은 보호되지만, 정치적 생존은 조용히 끊어진다.


얼굴만 바뀌고
구조는 그대로

방식만 달라졌을 뿐 구조는 유사하다. 차기 권력 구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된 지도자는 결국 배제된다. 정희왕후형 권력은 직접 나서지 않고, 그 과정이 불가피하고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이도록 환경을 조성한다. 책임은 제도와 당사자가 떠안고, 설계자는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세조·예종, 강한 권력과 공백의 정치= 세조는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군사력과 행정력을 장악하며 왕권을 비약적으로 강화했다. 그러나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했다는 태생적 한계는 그의 권력을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 불안을 관리하기 위해 필요했던 존재가 정희왕후였다. 그녀는 세조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권력이 다음 세대로 무리 없이 이어지도록 조율했다. 강한 권력일수록 이를 완충하고 관리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필요했고, 정희왕후는 그 역할을 정확히 수행했다.

현대 정치에서도 이 공식은 반복된다. 대통령 권력이 강해질수록, 그 권력을 안정시키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중요성은 오히려 커진다. 강한 얼굴은 체제의 중심이 되지만, 동시에 또 다른 조정자를 불러낸다.

세조 사후 즉위한 예종은 재위 14개월 만에 요절했다. 이 짧은 통치는 강한 권력이 설계만으로는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 공백의 시간은 정희왕후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통해 권력의 단절을 관리하고, 성종 체제로 넘어가기 위한 완충 장치를 준비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폭력성과
비정통성

성종과 정상화의 정치= 성종은 조선에서 이상적인 군주로 평가받는다. 그는 제도를 정비하고 유교 정치의 틀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무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정교하게 구성된 구조 위에서 진행됐고, 그 틀을 근본적으로 벗어나지는 않았다.

정희왕후는 손자인 성종을 통해 세조정권의 폭력성과 비정통성을 점진적으로 희석시켰다. 왕조는 성종의 통치를 거치며 다시 정상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성종의 정치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 위에서 이뤄진 관리된 전환이었다.

오늘날 민주주의에서도 급진적 변화보다 안정적 개혁을 선택할 때, 설계자의 영향력은 가장 강해진다. 성종의 시대는 정희왕후의 정치가 제도 속으로 스며들며, 보이지 않는 권력과 조용히 분리된 시기였다.

국민과 유권자는 왜 설계자를 묵인하나= 정희왕후형 권력이 유지되는 이유는 권력자 개인의 욕망 때문만은 아니다. 조선 사회의 다수 역시 혼란보다 안정을 원했다. 급격한 변화는 불안과 공포를 동반했고, 그 대가를 먼저 치르는 것은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현대 사회에서도 국민은 불확실성보다 예측 가능성을 택하는 경향이 강하다. 정치가 혼란스러울수록 보이지 않는 조정자에 대한 기대는 커진다. 안정은 늘 가장 설득력 있는 명분이 되어 민주주의의 이상보다 앞서기도 한다.


왕비 및 대비 수렴청정
보이지 않는 민주주의 권력

이 권력은 위에서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아래에서 묵인되고, 때로는 기대 속에서 유지된다. 정희왕후형 권력은 시민의 피로와 불안 위에서 조용히 자라나며 스스로를 필요악으로 정당화한다.

왜 제도는 이 권력을 통제하지 못하는가

민주주의 제도는 절차와 결과를 감시한다. 선거의 공정성이나 법 위반 여부는 따지지만, 의제가 형성되는 과정에는 거의 개입하지 않는다. 권력이 공식 무대에 오르기 전의 준비 단계는 제도의 시야 밖에 놓여 있다.

정희왕후형 권력은 바로 이 사각지대에서 작동한다. 이들은 결정 이전의 환경을 설계하며, 책임이 발생하지 않는 위치에 머문다. 영향력은 크지만 책임의 주체로 지목되지는 않는다.

조선이 정희왕후의 판단을 공식 기록에서 최소화했듯, 현대 민주주의 역시 이 권력을 기록하지 않는다. 기록되지 않는 권력은 감시되지 않고, 감시되지 않는 권력은 통제되지 않는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반복해서 마주치는 구조적 한계다.


정희왕후는 인물 아닌 구조

정희왕후는 역사 속 인물이지만, 정희왕후형 권력은 구조로 살아남았다. 이는 특정 개인의 야심 문제가 아니라, 체제가 흔들릴 때마다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정치적 메커니즘이다.

민주주의는 왕을 제거했고 수렴청정이라는 제도도 폐기했다. 그러나 권력을 설계하는 기술까지 제거하지는 못했다. 제도가 정교해질수록 권력은 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이동했고, 통치는 투명해진 듯 보이지만 실제 권력의 흐름은 오히려 복잡해졌다.

이재명
곁에는?

그래서 질문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다. 우리는 정말 스스로 통치하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가 짜놓은 판 위에서 제한된 선택을 반복하고 있을 뿐인가. 민주주의는 왕을 없앴지만, 왕을 설계하는 자리는 끝내 비워두지 못했다.

정희왕후는 지금도 구조로 살아 있다. 아직 이재명 대통령 곁에는 그와 같은 권력이 뚜렷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그러나 어떤 정권이든 실패의 징후가 나타나는 순간, 설계자는 다시 호출된다. 그들은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 대신 책임이 발생하지 않는 위치에서 정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조정한다. 

<skkim59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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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승자박’ 정청래 리더십 위기

‘자승자박’ 정청래 리더십 위기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리더십이 위기다. 1인1표제가 통과된 이후 힘을 받나 싶더니,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문제와 2차 종합특검 후보 논란 등 악재가 겹치면서 연임에 적신호가 켜졌다. 이재명 대통령도 시시각각 리더십 시험대에 올랐지만 결국 대권가도의 길을 걸었다. 정 대표도 무사히 ‘이재명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지난 10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과의 합당 논의를 ‘일시 중지’하기로 결론지었다.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의원총회서 민주당 의원들은 대체로 지방선거 전 합당 추진을 중단하자는 의견을 낸 것으로 전해진다. 충분한 논의 없이 합당을 띄워 당을 혼란스럽게 하고, 당·청 관계까지 어색해진 만큼 ‘정청래 책임론’이 불거지면서 리더십은 타격을 입게 됐다. 더 좁아진 운신의 폭 이날 정 대표는 국회에서 비공개 최고위원회의를 연 뒤 브리핑에서 “오늘 민주당 긴급 최고위와 함께 지방선거 전에 합당 논의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대신 지방선거 후 통합을 추진하기 위한 ‘연대와 통합을 위한 추진준비위원회(이하 통합추진준비위)’ 구성을 결정하고, 혁신당에도 준비위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정 대표는 “당 대표로서 혁신당과 통합을 제안한 것은 오직 지방선거 승리와 이재명정부의 성공을 위한 충정이었다”며 “그러나 통합 제안이 당 안팎에서 많은 우려와 걱정을 가져왔고, 통합을 통한 상승 작용 또한 어려움에 처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러 자리에서 의원들의 말씀을 경청했고 민주당 지지층 여론조사 지표도 꼼꼼히 살피는 과정에서 더 이상 혼란을 막아야 한다는 당 안팎의 여론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당을 혼란케 한 점에 대해서도 사과했다. 정 대표는 “그동안 통합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은 저의 부족함 때문”이라며 “국민 여러분과 민주당 당원들, 혁신당 당원들께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당초 이달 13일 입장을 밝히겠다던 혁신당은 날짜를 앞당겨 지난 11일 긴급 최고위원회를 열고 사안에 대해 입을 열었다. 혁신당 조국 대표는 통합추진준비위 구성에 동의하며 6월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열어뒀다. 민주당을 향한 뼈있는 말도 이어졌다. 조 대표가 “선거 후에는 통합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내용과 방식에 대한 논의를 책임감 있게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동안 혁신당은 민주당에 흡수되는 방법을 피하고자 했던 만큼 합치는 방식에 대한 합의점을 찾는 것이 합당의 최대 과제로 남아있다. 조 대표는 “양당 간 회동이 이뤄지면 먼저 민주당이 제안한 연대가 지방선거에서의 연대인지 아니면 추상적 구호로서의 연대인지 확인해야 한다”며 “지방선거 연대가 맞다면 추진준비위에서 그 원칙과 방법을 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모든 과정에서 양당은 상호 신뢰와 존중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며 “특정 정치인 개인과 계파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반드시 역효과가 난다. 국민과 양당 당원께 또다시 실망을 드리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동 걸린 민주당-혁신당 합당…다음 복안은? ‘쌍방울 변호인’까지…제대로 꽂힌 ‘2연타’ 조 대표는 정 대표의 사과를 수용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조 대표는 “정 대표께서 혁신당 당원에게 표명한 사과를 받아들인다”며 “혁신당 당원은 당으로 향해지는 비방과 모욕에 큰 상처를 입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밝혔다. 혁신당 박병언 선임대변인도 회견 후 기자들과 만나 “(민주당이) 단순히 연대라고만 표현했는데 우당 간 레토릭적 연대를 의미하는지, 실질적으로 두 당이 지선을 치러낸다는 선거 연대인지 분명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민주당의 답변을 요구했다. 앞서 민주당은 합당이 아닌 ‘지선 이후 통합’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민주당의 답변에 따라 향후 당의 대응이 달라질 것으로 풀이된다. 합당 논의가 중지되면서 당이 숨 고르기에 들어가나 싶더니 2차 종합특검으로 추천된 전준철 변호사가 새로운 불씨가 됐다. 민주당이 추천한 전 변호사는 2023년 ‘불법 대북 송금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 등의 변호인으로 선임된 인물이다. 1심 이후 사임했지만, 친명(친 이재명)계에서는 “이재명 죽이기” “제2의 체포동의안 사태” 등 격하게 반발했다. 친청(친 정청래)계로 분류되는 이성윤 최고위원이 전 변호사를 추천하면서 반발이 더욱 거세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전 변호사는 검사 시절 김건희 주가조작 사건, 한동훈 채널A 사건 등을 담당했다. 이 최고위원은 “(전 변호사가) 윤석열·김건희 수사를 할 때 서슬 퍼런 윤 총장하에서도 결코 소신을 굽히지 않고 강직하게 수사했다”며 “이번 2차 종합특검의 중요성에 비춰 적임자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확한 팩트 확인 없이 전 변호사가 김성태 대북 송금 조작 의혹 사건을 변호했고, 그런 변호사를 추천함으로써 마치 정치적 음모가 있는 것처럼 의혹이 확산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정·이 차이는? ‘윤정부에서 탄압을 받은 변호사’를 강조했지만, 민주당을 설득시킬 명분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자 이 최고위원은 “이번 2차 종합특검 추천 과정에서 조금 더 세밀하게 살피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앞으로는 더 세심히 살피겠다”고 사과했다. 정 대표도 거듭 고개를 숙였다. 정 대표는 해당 사태를 인사 검증 실패에 따른 ‘사고’로 규정하고 “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의 책임은 당 대표인 저에게 있다. 대단히 죄송하다”며 사과의 뜻을 밝혔다. 지도부가 진화에 나섰지만 사태는 이 최고위원을 향한 사퇴 압박으로 이어졌다. 이번 사태가 단순한 인사 사고가 아닌 정청래 체제를 향한 불만이 표면화된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합당 무산과 후보자 논란으로 정 대표의 리더십이 2연타를 맞으며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연임 가능성도 불투명해졌다. 정 대표는 직접 연임 여부를 밝히지 않았지만 1인1표제 등 당원의 힘을 강화하는 작업에 공을 들이며 대권주자로 나서기 위한 입지를 다지고 있다는 해석이 우세했다. 혁신당과의 합당 이후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끈다면 공은 정 대표에게 돌아간다. 그 성과를 토대로 대표 연임에 성공한 뒤 차기 대권까지 밟는 이른바 ‘이재명의 길’을 염두에 뒀다는 것이다. 여의도가 바라본 이재명의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친문(친 문재인)계가 민주당을 꽉 쥐던, 시절 그는 한 줌의 계파도 없이 고군분투하며 기득권에 맞섰다. 온건파 사이에서 파격적인 개혁을 앞세워 당원들의 갈증을 해소했고, 이들을 ‘개딸(개혁의 딸)’로 묶어 본격적인 팬덤 정치에 나섰다. 당 대표 시절에는 대선에 출마하려는 대표의 사퇴 시한인 ‘대선 1년 전’에 예외를 두는 내용의 당헌을 바꾸면서 극심한 내홍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당시 이재명 대표는 자신 있게 뜻을 밀어붙였고 전당대회서 최종 득표율 85.4%로 연임에 성공했다. 리더십 심폐소생 권력의 정점에 선 이 대통령이 걸어온 길은 비주류에서 주류로 거듭나고 싶어하는 정치인들의 ‘롤모델’로 자리 잡았다. 정 대표는 그런 거친 이재명의 길 초입에 들어섰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사이다 화법’으로 지지 세력을 키우는 시도는 이 대통령과 매우 유사하다. 이 대통령도 성공하지 못했던 1인1표제를 정 대표는 해냈다”면서도 “서둘렀던 게 문제다. 합당도 시기가 적절하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어 “이 대통령은 당 대표이던 시절부터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맞아떨어졌다. 그때는 민주당이 야당이었고 윤석열·김건희라는 공공의 적이 있으니 친명과 비명(비 이재명)이 매일같이 싸워도 봉합할 명분이 충분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대통령과 정 대표의 차이는 측근의 유무다. 이 대통령은 성남시장일 때부터 함께해 온 이른바 ‘성남 라인’이 존재했고, 김현지 대통령비서실 제1부속실장 등 측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다”며 “친청을 자처하는 의원들이 있지만 이들을 측근이라고는 볼 수 없다. 김어준·유승민 두 사람이 정 대표에게 영향을 주는 인물로 꼽히지만, 그들조차도 자기 정치에 당 대표를 쓰는 느낌이 든다. 누가 중심이고, 누가 휘둘리는지 알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승부수를 던지지 않는 한 지방선거가 정 대표의 마지막 리더십 시험대가 될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린다. 지방선거에 사활을 걸어 ‘압승’을 끌어낸다면 무너진 리더십을 다지는 건 물론 8월 전당대회 출마 명분까지 얻을 수 있다. 당장은 정 대표가 타격을 받았지만 선거 국면을 통과하면서 과오가 희석되는 흐름에 기대를 건 셈이다. 민주당은 오는 4월 중순까지 모든 지방선거 공천을 마무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다만 경선 규칙과 공천 룰 등을 두고 계파 간 갈등이 재점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모든 권력에는 비판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한 정치권 관계자의 말처럼 반대 여론을 찬성 여론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리더십이 판가름 난다. 시계를 돌려 2024년 4월, 이 대통령 역시 당 대표이던 시절 공천 시즌을 앞두고 ‘비명횡사’ 논란에 휩싸였다. 현역 의원 의정평가 하위 20% 통보를 박은 이는 6명으로 모두 비명계였던 만큼 의원들 대다수가 ‘친명’을 내세워 마케팅을 이어갔다. 이, 비주류서 180석 야당 대표로 지선 앞둔 대표님의 큰 그림은? 공천 갈등은 당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고 민주당이 패배했던 2012년 총선이 되풀이될 것이란 당내 우려가 커졌다. 하루가 멀다고 나오는 사퇴 요구에 이 대표는 “툭 하면 사퇴 요구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사퇴하면 1년 내내 대표를 바꿔야 한다”며 오히려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친명과 비명 간의 갈등은 “환골탈태 과정에서 생기는 약간의 진통”으로 진단했다. 이 대표의 리더십이 총선의 최대 걸림돌로 여겨졌지만, 180석 공룡 야당을 탄생시키면서 여론을 뒤집었다. 정 대표 역시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합당 논란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지방선거 승리에 올인하겠다”며 반전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기습 행동으로 당을 흔들지 종잡을 수 없어 잃어버린 신임을 되찾는 것이 지방선거를 앞둔 첫 번째 과제로 여겨진다. 정 대표는 ‘억울한 컷오프를 최소화하는 것’에 방점을 찍었다. 지난 11일에는 “공천 과정 전반의 불공정·불합리한 사례를 사전에 점검해 신뢰받는 공천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노력하겠다”며 공천신문고 구성 안건을 의결했다. 이날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민주당이 합당 과정에 여러 가지 내홍을 겪고 걱정을 끼쳐드렸지만 그런 와중에도 할 일은 빈틈없이 해왔다”며 “민주당은 공정한 경선을 통한 공천, 투명한 공천이 지방선거 승리의 요체임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당 대표의 이 같은 의지가 (공천신문고) 제도를 통해서 충실히 반영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말한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가 ‘이재명 모델’로 노선을 잡았지만 ‘제2의 ○○○’이라는 꼬리표가 오히려 발목을 잡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대선을 앞두고 과감하게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은 이 대통령의 ‘중도 보수’ 전략까지 정 대표가 따라 할 수 있겠냐는 점에서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문재인 전 대통령에 실망한 사람들이 정권교체에 손을 들어줬다. 이 대통령이 임기를 마칠 때 즈음이면 정권 유지든 교체든 국민의 마음속에 새로운 잣대가 세워질 것”이라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좌우 통합을 이뤄낼 지도자를 원할지, 지금보다 조금 더 강경한 지도자를 원할지는 현 정부에 달려 있다. 그 시대에 맞는, 또 국민이 원하는 사람이 차기 대권주자로 분류될 것”이라고 봤다. 신선한 뉴페이스? 이어 “이 대통령은 후임자를 키우지 않는다고 한다. 미래의 민주당은 당 대표도, 차기 대권주자도 ‘포스트 이재명’이 아닌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며 “이 대통령의 행보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이재명 그림자에만 메어서는 민주당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극단으로 치닫는 여야 갈등 지난 12일 이재명 대통령이 설을 앞두고 민생 회복과 국정 안정을 위한 초당적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여야 대표를 오찬에 초대했지만, 약속 시간을 한 시간 앞두고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불참을 통보했다. 장 대표는 “(이번 회동이) 부부 싸움하고 둘이 화해하겠다고 옆집 아저씨 불러놓는 꼴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어 “오늘 회동에 가면 여야 합치를 위해 무슨 반찬을 내놨고, 쌀에 무슨 잡곡을 섞었고 그런 것들로 오늘 뉴스를 다 덮으려 할 것”이라며 “대한민국 사법시스템 무너지는 소리를 덮기 위해 여야 대표와 대통령이 악수하는 사진으로 모든 걸 다 덮으려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날 밤 민주당이 추진하는 이른바 ‘재판소원법’과 ‘대법관증원법’이 국민의힘 반발 속에 여당의 주도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한 것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정청래 대표는 SNS를 통해 “국민과 대통령에 대한 예의는 눈곱만큼도 없는 국민의힘의 작태에 경악한다”며 “본인이 요청할 때는 언제고 약속 시간 직전에 이 무슨 결례인가. 국민의힘, 정말 ‘노답(답이 없음)’”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청와대도 “이번 회동은 국정 현안에 대한 소통과 협치를 위한 자리였다. 그런 취지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데 깊은 아쉬움을 전했다”고 밝혔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