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동쪽의 신화 넘어, 네 방향의 나라로

해마다 새해가 밝아오면 사람들은 강원도 강릉의 정동진으로 몰린다.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라는 상징성 때문이지만, 사실 우리의 시선은 오래전부터 동쪽에 고정돼있었다. 동쪽은 희망과 출발의 방향이었고,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성장의 나라’였던 한국이 믿고 싶어했던 미래의 방향이었다.

그러나 한국 지도의 다른 세 방향, 즉 정서진·정남진·정북진은 늘 부차적인 공간으로 밀려나 있었다. 네 방향이 모두 존재하는데도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의 방향만 기억해 왔고, 그 결과 우리의 사회적·정치적 사고도 동쪽으로 기운 나침반처럼 한쪽에 치우쳐 왔다.

지도에서 잊힌 세 지점은 사실 한국 사회가 희망이라는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정동진이 일출의 자리라면 정서진은 일몰의 자리다. 아라뱃길 끝에 놓인 인천 서구의 정서진은 매일 서쪽 하늘을 붉게 만들지만, 정동진만큼 전국적인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다. 새벽의 기운은 ‘시작의 에너지’라는 이름으로 축제화되지만, 저녁의 풍경은 늘 ‘마무리의 감정’ 정도로만 다뤄져 왔다.

그러나 사회가 성장의 정점에 올라선 순간 필요한 것은 더 큰 새벽의 영광이 아니라, 하루가 저물며 남긴 흔적을 읽어내는 능력이다. 정서진을 바라보는 일은 어쩌면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성장이라는 단일한 기준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회 내부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해돋이만 기억하는 사회는 해넘이의 질문을 잃는다. 그리고 질문을 잃은 사회는 방향을 잃는다.


남쪽의 기준점인 전남 장흥의 정남진은 한국의 ‘진짜 남쪽’이지만, 우리 사회는 이 남쪽의 좌표를 거의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도의 남쪽을 변두리로 여겨왔고, 개발의 중심축에서도 늘 후순위로 밀려나 있던 지역들이 바로 이 남쪽에 집중돼있었다.

정남진이 상대적으로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히 볼거리가 적어서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전라도 남쪽이 오랫동안 ‘덜 중요한 곳’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쪽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도, 이 방향에서 국가적인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정남진은 ‘중심이 되지 못한 좌표’였고, 산업과 정치, 경제의 논리에서도 늘 뒤로 밀려났다. 지도상의 남쪽을 외면한 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 균형 잡힌 국가의 상상력을 축소시킨 행위였다.

가장 상징적인 방향은 북쪽이다. 강원도 철원에 있는 정북진은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한반도의 ‘정확한 북쪽’을 가리키지만, 우리는 이 지점을 하나의 공간으로 경험할 수 없다. 분단은 북쪽을 물리적 금단의 방향으로 만들었고, 심리적 상상력마저 가둬버렸다. 강원도 북쪽은 아예 ‘비어있어야 하는 방향’으로 여겨졌다.

정북진이 가진 의미는 남북관계를 넘어서 더 크다. 북쪽이라는 방향은 우리가 스스로 금기처럼 여겨 지워버린 좌표기도 하다. 북쪽이 막혀 있다는 현실은 단순한 군사·정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생각하는 방식 자체에 영향을 줘왔다. 그래서 우리는 ‘북쪽’이라는 말만 들어도 본능적으로 긴장하거나 피하려 한다.

동·서·남·북의 네 방향이 모두 존재하는데도 한 방향만 강조된 채 국가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나침반은 동·서·남·북 네 방향을 모두 인식할 때 가장 정확한 균형을 잡는다. 한 방향이 사라지면 바늘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두 방향이 지워지면 균형이 무너지고, 한 방향만 남으면 결국 방향감 자체를 잃는다.

한국 사회가 ‘동쪽의 신화’에 집중해온 지난 수십년은 성장의 시대를 상징하긴 했지만, 동시에 사회 내부의 시야를 한 방향으로 고정시키는 결과도 낳았다.


이제는 해돋이의 신화를 넘어 새로운 네 방향의 해석이 필요하다. 사회는 동쪽의 빛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석양이 주는 성찰, 주변부가 품은 다양성, 금지된 방향이 드러내는 구조적 현실까지 모두 읽어야 한다.

정동진·정서진·정남진·정북진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잃어버린 방향 감각을 일깨우는 나침반 같은 존재다. 필자가 말해온 ‘삼기점’의 개념으로 보면, 우리는 원을 그리며 달려온 시대에서 이제는 직선의 방향을 찾아야 하는 임계점에 와 있다.

원운동은 반복과 관성을 전제로 하지만, 직선운동은 목표와 방향을 요구한다. 네 방향을 제대로 인식한다는 것은 원운동에서 빠져나와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직선의 힘을 회복하는 일이다. 한 방향만 바라보는 사회는 결국 스스로 중심을 잃고 흔들린다. 네 방향을 모두 아우르는 사회가 균형을 갖추고 다음 시대를 설계할 수 있다.

국가균형발전을 꾀하는 지방시대위원회가 이제 해야 할 일도 분명하다. 행정 경계를 기준으로 예산과 전략을 나누는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정동진·정서진·정남진·정북진이라는 네 방향의 축을 기준으로 국가의 공간지도를 다시 그려야 한다.

국가균형발전은 단순히 지역 간 격차를 줄이는 행정적 기술이 아니라, 나라의 시선과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재설계하는 일이다. 동쪽의 신화, 서쪽의 성찰, 남쪽의 변두리 취급, 북쪽의 금기 영역을 동시에 포착하는 좌표계를 만들 때 비로소 국가균형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실제 정책의 구조가 된다.

지방시대위원회가 이 네 방향을 하나의 국가 좌표로 재정의하는 순간, 한국은 한 방향 사회에서 벗어나 네 방향을 가진 나라, 중심을 되찾은 나라로 다시 서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가. 동쪽을 향해 새로운 출발을 찾고 있는지, 서쪽을 보며 정리에 집중하고 있는지, 남쪽의 변화 가능성을 보고 있는지, 북쪽의 막힌 현실을 극복하고 있는지, 결국 우리가 선택하는 방향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의 문제다.

지도 위에 적힌 네 지점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메시지를 건넨다. 한쪽만 바라보지 말고 네 방향을 함께 보라는 것이다. 이 네 지점이야말로 대한민국이 가져야 할 가장 단단한 나침반이 되기 때문이다.

12월엔 한번쯤 정서진에 서서 서쪽 하늘로 기울어가는 해를 바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해돋이를 보며 한 해를 시작했다면, 해넘이를 보며 그해의 무게와 질문을 차분히 정리하는 일도 우리의 방향 감각을 되찾는 소중한 의식이 될 수 있다.

저녁의 붉은 빛은 끝이 아니라, 다음을 준비하는 침착한 호흡이며, 서쪽의 석양은 우리가 걸어온 길을 한 번 더 돌아보게 하는 자연의 마지막 조언이다. 동쪽의 새벽만 기억하던 사회가 이제는 서쪽의 저녁도 함께 품을 때, 다음 해를 향한 우리의 나침반도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최근 필자는 앞으로 10년 동안 꼭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정리하고 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매년 정동진·정서진·정남진·정북진을 한 번씩 찾아가는 일도 그 목록에 넣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동진에서는 새해 해돋이를 보며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를, 정서진에서는 해넘이를 보며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를 떠올릴 수 있다. 하지의 정남진은 “어디까지 달려갈 것인가”를, 동지의 정북진은 “무엇을 성찰할 것인가”를 묻게 한다. 네 방향이 던지는 이 다른 질문들이 한 해의 흐름을 조금씩 바꿔놓을 것이다.


이 네 지점을 매년 한 차례씩 찾아가는 일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방향을 바꿔보는 순간 비전이 달라지고, 사고가 달라지면 결국 삶의 궤도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닫게 해주는 의식 같은 경험이다. 참고로 2025년 12월 31일 정서진의 일몰은 17시 23분, 2026년 1월 1일 정동진의 일출은 07시 33분이며, 2026년 하지와 동지는 각각 6월 21일과 12월 22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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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