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역사는 그날을 결코 잊지 않는다. 당시 궁정동 안가의 총성은 한 지도자의 생애를 마감한 사건이자, 유신체제의 종말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그림자는 여전히 대한민국 현대사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46년이 지난 지금, 그 중심에 있던 김계원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이름이 다시 법정에서 불리고 있다.
그는 10·26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핵심 인물이자, 그 후 ‘역사의 방관자’로 기록돼온 인물이다. 그런데 최근 그의 삶과 역할이 다시 조명되고 있다.
김 전 실장은 1980년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중요임무종사 미수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88년 특별사면으로 복권됐다. 이후 그는 공직이나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았고, 세상과 거리를 둔 채 “나는 그날 이후 평생 죄인으로 살았다”는 말을 남기며 2016년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내려진 유죄 판결은 당시에도 명확한 물증보다 ‘정치적 책임’의 무게가 더 크게 작용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는 직접 총을 쏜 것도, 음모를 주도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자리에 있었고, 침묵했다는 이유로 죄인이 됐다.
유족은 그가 사망한 이듬해 “당시 민간인 신분임에도 군 수사기관 및 군사법원의 재판을 받았고, 수사 과정에서 고문과 가혹행위가 있었다”며 재심 청구를 제기했다. 그로부터 약 8년이 지난 2025년 9월, 서울고등법원 형사8부는 김 전 실장에 대한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고, 아직 첫 공판은 진행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46년 동안 대한민국 역사에서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 “당시 김계원은 사건을 저지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국가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끝까지 책임을 다했다”는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뒤늦게나마 역사의 오해가 걷히며 그의 이름이 다시 소환되는 분위기다.
필자는 유족이 제기한 재심이 단순히 한 개인의 명예 회복을 위한 법적 절차를 넘어, 한국 현대사에 남은 마지막 정치적 상처에 대한 성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10·26은 박정희의 시대를 끝낸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무너뜨린 국가적 비극이기도 했다. 우리는 김재규의 총성과 함께 체제의 붕괴만을 기억하지만, 그 현장에는 참모들의 두려움과 혼란, 그리고 책임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박정희의 충신이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묵묵히 청와대 실무를 책임졌던 인물이었다. 그는 권력의 달콤함보다 질서와 충성을 중시하는 관리형 참모였다.
그런 그가 10·26의 밤에 있었던 것은 우연이자 운명이었다. 박정희와 차지철 사이의 오랜 긴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분노, 그리고 정권 내부의 균열이 폭발하는 그 현장에 그는 단지 목격자로 있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그를 권력의 최측근이었다는 이유로 공범으로 규정했다.
현재 진행 중인 재심은 그 판단이 과연 정당했는지를 묻는 절차다. 1979년의 법정은 냉정하지 못했다. 국가 권력의 혼란 속에서 역사적 판단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왜곡됐다. 당시 군사정권은 새 시대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책임자를 만들어야 했다. 김 전 실장이 바로 그 희생양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박정희 체제의 몰락을 목격한 사람으로서 이후 어떤 정치적 해석도 거부한 채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역사는 잊지 않는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진실은 더 빛을 내기 때문이다.
이제 법정이 다시 열렸다. 김계원은 부재하지만, 그가 남긴 “국가란 무엇이고, 충성은 어디까지 정당하며, 권력의 붕괴 앞에서 인간은 어떤 도리를 지켜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의 재심은 우리 모두가 역사의 법정 앞에 서는 일이다. 그날의 진실을 온전히 복원하는 일은 단지 과거를 다시 쓰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권력과 책임, 그리고 인간의 양심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다.
김 전 실장은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박 대통령을 배신한 적이 없다. 다만 그날 밤 역사가 우리를 배신했을 뿐이다.” 그의 말은 지금도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그는 권력의 최전선에 있었지만, 권력을 경계했던 인물이다. 대통령에게 “경제의 성장보다 국민의 통합이 먼저입니다”라고 조언했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 유신체제의 공포 속에서도 그는 최소한의 균형과 절제를 지키려 했다. 그는 충성보다 양심을, 체제보다 국가를 택한 조용한 공직자였다.
46년 전 청와대는 견제와 충언이 사라진 폐쇄된 공간이었다. 대통령은 보고만 받고, 참모는 눈치만 봤다. 그 고립의 끝에서 터진 것이 바로 10·26의 총성이었다. 권력이 고립되면 균형이 붕괴되고, 제도도 무너진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비슷한 구조는 언제나 되살아난다. 2025년 12·3 비상계엄 사태도 1979년 10·26 사건과 닮았다. 45년 전의 총소리가 지금은 SNS의 분노와 대규모 시위로 바뀌었을 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체제의 고립 속에서 참모의 말을 듣지 않았고, 윤석열 대통령은 진영의 싸움을 이유로 국민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고립의 형태는 다르나 본질은 같다.
이 지점에서 김 전 실장이 비교의 기준이 된다. 그는 체제의 심장부에 있으면서도 공동체의 붕괴를 두려워했다. 그가 사건 직후 국무회의를 열어 “계엄은 유지하되 국민의 생명과 질서가 먼저다”라고 말한 기록은 권력보다 국민을 앞세운 공직자의 품격이었다.
김 전 실장의 손자는 며칠 전 사석에서 “할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되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건, 46년이 지난 지금도 권력과 주변이 그때와 똑같다는 것이다”며 할아버지는 하늘나라에서 본인의 명예 회복보다 한국 정치가 잘되는 걸 더 좋아하실 것이다.”고 필자에게 말했다. 김 전 실장의 손자다운 말이 아닐 수 없다.
권력의 한가운데에서도 양심을 지킨 자가 있었다는 사실, 그의 명예가 뒤늦게라도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은 우리 정치가 여전히 성찰할 여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희망의 빛이다.
필자는 김 전 실장에 대한 재심 판결이 내려지는 날, 10·26 사건은 종결될 것으로 본다.
한편 10·26 사건 주범으로 사형당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유족도 2020년 5월 재심 청구를 해 서울고등법원 형사7부가 5년 만에 이를 받아들여 올해 7월 첫 공판을 한 상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