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선감도 ④봄날 공기를 찢어발기다

  • 김영권 작가
  • 등록 2024.05.27 08:00:00
  • 호수 14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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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엄마는 무척 지쳤는지 돌계단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또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럴 때마다 용운은 어쩐지 겁이 나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와 추억

“엄마, 엄마, 저기 거미 좀 봐. 나비를 잡아먹고 있어.”

용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생기 띤 소나무 잎새와 가지들 사이에 정교한 거미줄이 처져 나방의 날갯짓 따라 햇빛을 반사하며 흔들렸다.

엄마는 용운의 핼쑥한 낯을 바라보더니 소나무 우듬지 쪽의 물오른 가지를 꺾어 겉껍질을 벗겨내고 건네었다.


용운은 그것을 받아 하얀 속껍질을 허겁지겁 벗겨 먹었다. 송기(松肌)는 씁쓸하고 텁텁한 맛이었다.

“아아, 어째야 한단 말인가? 하느님, 가련한 저희를 도와주소서.”

엄마는 노을이 진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가족들끼리 소풍을 나왔다가 명랑하게 웃으며 하산하는 시민들을 두 모자는 부러움에 찬 눈으로 멍하니 지켜보곤 했다.

노을도 거의 지고 땅거미가 내릴 무렵에야 엄마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용운은 엄마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엄마, 내가 업고 갈게. 어서 업혀, 응?”

엄마는 시름겨운 웃음을 겨우 짓고 나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뱃고동이 부우 하고 울었다. 


용운은 그 소리를 듣고 추억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머루 같은 검은 눈에 눈물 한 방울이 맺혀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았다.

섬이 점점 가까워 오고 있었다. 배가 물결에 흔들리면서 섬도 흔들리는 듯한 착시현상을 느끼게 했다.

멀리서는 전체적으로 초록색으로 보이던 섬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황토색이 보이고 회색도 보였다. 산 아래쪽으로 구불구불한 길과 흙담 그리고 초가지붕 따위가 서서히 분간되었다. 그것은 몇 가호 안 되는 작은 어촌 마을처럼 보였다.

그런데 산 중턱에는 전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건물들이 여기저기 띄엄띄엄 늘어서 있었다. 회색 슬레이트 지붕에 시멘트 담으로 이루어져 삭막하고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일종의 바라크였다. 그 이상한 건물들과 어촌 민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멀리 떨어져 있었다.

호기심을 보이는 아이들도 없잖았으나 용운은 어쩐지 무섬증이 어린 눈으로 산속의 그 잿빛 건물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시퍼런 바닷물이 넘실대면서 불안과 공포의 무게를 부랑아들의 가슴속에 가중시켜 주고 있는 성싶었다. 모두들 아무런 말 없이 눈앞에 다가온 섬과 주위의 풍경에 시선을 모았다.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울며 날아다녔다.

이윽고 행운호는 속도를 줄이더니 서서히 맴을 돌아 선감도의 나루터에 닻을 내리고 정박했다. 손바닥만한 그 간이 선착장 아래쪽엔 작은 발동선 두 척이 선 채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산 중턱 이질적인 잿빛 건물
고참 입가에는 음침한 미소

선착장엔 머리를 스포츠형으로 반듯하게 깎고 얼굴이 사각형으로 각진 남자 한 명과 스무 살 안팎의 새파란 사내애 다섯 명이 어깨에 잔뜩 힘을 넣은 채 서 있었다.

새파란 사내애들은 모두 빡빡 백고 친 알머리에 교복처럼 생긴 검정색 옷을 입고 검정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그들은 선감학원의 담당 선생과 고참 원생들로서, 새로 들어오는 부랑아들을 마중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도청 직원과 경찰들이 먼저 하선하여 선생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런 후 선생은 신입생들을 향해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모두들 어서 와라. 우리는 너희들을 아무런 차별 없이 환영하는 바이다.”


그러고는 검은 옷을 입은 사내애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눈매가 매섭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 하나가 ‘신입생’들을 향해 냉랭하게 소리쳤다.

“모두 질서정연하게 내려서 이 앞에 삼열종대로 선다! 실시!”

신입들은 줄을 지어 느릿느릿 움직였다.

“동작 봐라? 신상이 걱정된다면 빨랑빨랑 움직이는 게 좋을 거다.”

그 고참 원생은 눈을 가늘게 뜨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소리를 칠 때보다 한층 더 위협적으로 들렸다.

신입생들은 미운털이 박히지 않기 위해 모두 다급히 움직였다. 순식간에 육지로 내려선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줄을 지어 섰다. 고참은 입가에 음침한 미소를 흘리고는 다시 명령을 내렸다.


“앉아 번호 시작!” 

“하낫! 둘! 셋! 넷! 다섯!…”

번호가 끝나자 고참 원생은 선생에게 차렷 자세로 보고했다.

“총 35명입니다, 선생님!”

“좋아, 인솔해.”

사악한 목소리

고참은 신입들을 향해 돌아서서 엄격히 명령했다.

“전체 주목! 지금부터 운동장으로 이동한다. 도중에 대열을 이탈하거나 잡담을 해서는 즉결처분감이다. 선두 앞으로 갓!”

그것은 향긋하던 봄날의 공기를 찢어발기고 훼손시키는 사악한 목소리였다. 대열은 왼쪽으로 야산을 끼고 울퉁불퉁한 흙길을 따라 섬의 중심 쪽으로 이동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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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악명 높은 보이스피싱 총책 탈옥한 ‘김미영 팀장’ 포착

[단독] 악명 높은 보이스피싱 총책 탈옥한 ‘김미영 팀장’ 포착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김성민 기자 = 보이스피싱 총책 ‘김미영 팀장’ 박정훈씨의 최근 행적이 확인됐다. 지난해 탈옥에 성공한 이후 1년여 만이다. 박씨와 함께 탈옥에 성공했던 인물은 총 3명이다. 이들은 올해 초까지 말레이시아로 여러 차례 밀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박씨는 최근 필리핀 카비테 부근 한 시골 마을로 주거지를 옮겼다. <일요시사>는 지난해 초부터 보이스피싱 총책 김미영 팀장 박정훈씨의 탈옥 가능성을 제기했다. 외교·수사당국은 현지 담당자가 철저하게 관리 중이라며 ‘소극 행정’으로 대처했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 꼴이다. 1년이 지난 현재, 박씨는 필리핀 서부 지역 한 시골 마을에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못 잡나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박씨는 필리핀 카마린스 수르 교도소에서 탈옥한 이후 올해 초까지 총 세 차례 이상 말레이시아 사바주로 밀항을 시도했다. 이들이 밀항을 시도한 곳은 필리핀 남서부 잠비앙가와 민다나오 다바오 시티다. 잠비앙가의 경우 여행경보 4단계인 흑색 경보(여행금지) 발령 지역이다. 외교부의 예외적 여권 사용 허가 없이 흑색 경보 지역을 방문·체류하는 경우, 여권법 제26조 등 관련 규정에 따라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잠비앙가는 우리나라 국민이 여행할 수 없는 곳인 셈이다. 박씨와 송모씨 등 ‘탈옥 멤버’들은 다바오 시티에서 두 차례 밀항을 시도했으나 실패해 잠비앙가로 이동했다. 잠비앙가에서 술루 제도를 통해 말레이시아로 이동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술루 제도로 이동하던 박씨 일당들은 필리핀 반군에 억류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박씨가 밀항을 시도한 잠비앙가를 비롯해 남부 민다나오 지역에는 이슬람 반군들이 주둔해 있다. 지난해 10월 말에도 무력 충돌이 발생해 최소 14명이 사망했다. 당시 민다나오 마긴다나오델수르주의 파갈룽간시에서 필리핀 최대 반군단체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의 두 지휘관과 수하 병력이 총기와 흉기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1970년대부터 분리주의 무장투쟁을 벌여온 MILF는 2014년 정부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를 통해 정부가 민다나오섬에 설치한 이슬람 임시 자치정부인 ‘방사모로 과도당국(BTA)’과 ‘방사모로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지역(BARMM)’ 구성에 참여했다. 잠비앙가·민다나오서 ‘뒷돈 도주’ 시도 이슬람 반군에 억류 후 풀려나 마닐라로 MILF는 2019년 9월부터 평화협정을 이행하기 위해 무기 반납을 시작했지만, 무장 해제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여전히 총기를 보유한 MILF 병력은 수천 명 이상이다. 박씨는 반군들에게 마약 및 보이스피싱으로 벌어들인 돈 수천만원을 뇌물로 전달한 이후 풀려났다. 지난 5월 초 박씨는 송씨와 헤어진 후 필리핀 루손섬 카비테주 카비테 시티로 이동했다. 지난달 말에는 카비테 시티 외곽 한 시골 마을에 자신의 현지 부인인 A씨까지 불러 정착을 시도한 것으로 파악됐다. A씨는 그간 마닐라 타기그에서도 부촌으로 꼽히는 보니파시오 글로벌 시티에 거주했다. 현지인들은 보니파시오를 BGC 또는 글로벌 시티로 부른다. 필리핀의 청담동으로 불릴 만큼 고층 빌딩, 고급 주거지, 쇼핑 거리 등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보니파시오의 경우 냉장고와 에어컨 정도만 구비돼있는 콘도 한 유닛의 월세가 필리핀 돈으로 13만~15만페소(약 304만~351만원)에 달한다. 필리핀은 주차장도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주차장을 포함하면 월세도 10만원에서 15만원 정도 더 늘어나게 된다. 같은 도시에 위치한 원룸 형식의 콘도 월세도 5만5000페소(약 128만원)에 달한다.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경찰도 관련 첩보를 파악해 현지 수사당국과 공조 중이다. 아직 정확한 집 주소나 확실한 거주지를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박씨는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 출신의 전직 경찰이다. 2008년 수뢰 혐의로 해임된 그는 경찰 조직을 떠난 뒤 2011년부터 10년 넘게 보이스피싱계의 정점으로 군림해 왔다. 수억 비트코인에 차명 주택 부동산 소유 현지 부인이 조력해 “지속적 현금 조달” 특히, 조직원들에게 은행 등에서 사용하는 용어들로 구성된 대본을 작성하게 할 정도로 치밀했다. 경찰 출신인 만큼, 관련 범죄에선 전문가로 통했다. 그는 필리핀을 거점으로 지난 2012년 콜센터를 개설해 수백억원을 편취했다. 10년 가까이 지속된 그의 범죄는 2021년 10월4일에 끝이 났다. 국정원은 수년간 파악한 정보를 종합해 필리핀 현지에 파견된 경찰에게 “박씨가 마닐라에서 400km 떨어진 시골 마을에 거주한다”는 정보를 넘겼다. 검거 당시 박씨의 경호원은 모두 17명으로 총기가 허용되는 필리핀의 특성상 대부분 중무장했다. 박씨가 위치한 곳까지 접근한 필리핀 이민국 수사관과 현지 경찰 특공대도 무장 경호원들에 맞서 중무장하고 있었다. 2023년 초까지만 해도 박씨가 곧 송환될 것이라는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박씨는 일부러 고소당하는 등의 방법으로 여죄를 만들어 한국으로 송환되지 않으려 범죄를 계획했다. 국내 정보기관은 박씨 일당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2023년 12월과 지난해 3월 두 차례에 걸쳐 필리핀 교정당국에 박씨의 탈옥 가능성을 경고한 바 있다. 박씨가 탈옥한 것을 두고 필리핀 교정당국은 해당 교도소에 CCTV가 설치돼있지 않아 탈옥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일부 훼손된 철조망을 찾아냈다고 한국 정부에 설명했다.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외교부와 경찰, 법무부 국제형사과 등이 일부 파견을 가 현지에서 한국 범죄자들을 관리하는데, 공문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범죄자와 면담을 하는 등의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그저 공문만 보내는 것으로는 범죄자들의 탈옥을 막을 수 없다. 당국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안 잡나 박씨는 A씨의 도움을 받아 오래된 교도소의 취약점을 파악해 탈옥을 계획했다. 사전에 철저히 ‘탈옥 계획’을 구상하고 보안이 허술한 교도소에 잡혔단 뜻이다. 말레이시아로의 밀항 준비도 A씨가 현금 조달을 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A씨는 박씨가 교도소에서부터 환전한 수억원 이상의 비트코인을 관리해 왔다. 박씨와 같은 교도소에 있었던 한 제보자는 “환전한 비트코인 외에도 A씨가 박씨의 차명 소유 자택 부동산 등 수십억원 상당의 재산을 보유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hounder@ilyosisa.co.kr>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