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엄마는 무척 지쳤는지 돌계단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또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럴 때마다 용운은 어쩐지 겁이 나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와 추억
“엄마, 엄마, 저기 거미 좀 봐. 나비를 잡아먹고 있어.”
용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생기 띤 소나무 잎새와 가지들 사이에 정교한 거미줄이 처져 나방의 날갯짓 따라 햇빛을 반사하며 흔들렸다.
엄마는 용운의 핼쑥한 낯을 바라보더니 소나무 우듬지 쪽의 물오른 가지를 꺾어 겉껍질을 벗겨내고 건네었다.
용운은 그것을 받아 하얀 속껍질을 허겁지겁 벗겨 먹었다. 송기(松肌)는 씁쓸하고 텁텁한 맛이었다.
“아아, 어째야 한단 말인가? 하느님, 가련한 저희를 도와주소서.”
엄마는 노을이 진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가족들끼리 소풍을 나왔다가 명랑하게 웃으며 하산하는 시민들을 두 모자는 부러움에 찬 눈으로 멍하니 지켜보곤 했다.
노을도 거의 지고 땅거미가 내릴 무렵에야 엄마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용운은 엄마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엄마, 내가 업고 갈게. 어서 업혀, 응?”
엄마는 시름겨운 웃음을 겨우 짓고 나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뱃고동이 부우 하고 울었다.
용운은 그 소리를 듣고 추억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머루 같은 검은 눈에 눈물 한 방울이 맺혀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았다.
섬이 점점 가까워 오고 있었다. 배가 물결에 흔들리면서 섬도 흔들리는 듯한 착시현상을 느끼게 했다.
멀리서는 전체적으로 초록색으로 보이던 섬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황토색이 보이고 회색도 보였다. 산 아래쪽으로 구불구불한 길과 흙담 그리고 초가지붕 따위가 서서히 분간되었다. 그것은 몇 가호 안 되는 작은 어촌 마을처럼 보였다.
그런데 산 중턱에는 전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건물들이 여기저기 띄엄띄엄 늘어서 있었다. 회색 슬레이트 지붕에 시멘트 담으로 이루어져 삭막하고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일종의 바라크였다. 그 이상한 건물들과 어촌 민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멀리 떨어져 있었다.
호기심을 보이는 아이들도 없잖았으나 용운은 어쩐지 무섬증이 어린 눈으로 산속의 그 잿빛 건물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시퍼런 바닷물이 넘실대면서 불안과 공포의 무게를 부랑아들의 가슴속에 가중시켜 주고 있는 성싶었다. 모두들 아무런 말 없이 눈앞에 다가온 섬과 주위의 풍경에 시선을 모았다.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울며 날아다녔다.
이윽고 행운호는 속도를 줄이더니 서서히 맴을 돌아 선감도의 나루터에 닻을 내리고 정박했다. 손바닥만한 그 간이 선착장 아래쪽엔 작은 발동선 두 척이 선 채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산 중턱 이질적인 잿빛 건물
고참 입가에는 음침한 미소
선착장엔 머리를 스포츠형으로 반듯하게 깎고 얼굴이 사각형으로 각진 남자 한 명과 스무 살 안팎의 새파란 사내애 다섯 명이 어깨에 잔뜩 힘을 넣은 채 서 있었다.
새파란 사내애들은 모두 빡빡 백고 친 알머리에 교복처럼 생긴 검정색 옷을 입고 검정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그들은 선감학원의 담당 선생과 고참 원생들로서, 새로 들어오는 부랑아들을 마중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도청 직원과 경찰들이 먼저 하선하여 선생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런 후 선생은 신입생들을 향해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모두들 어서 와라. 우리는 너희들을 아무런 차별 없이 환영하는 바이다.”
그러고는 검은 옷을 입은 사내애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눈매가 매섭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 하나가 ‘신입생’들을 향해 냉랭하게 소리쳤다.
“모두 질서정연하게 내려서 이 앞에 삼열종대로 선다! 실시!”
신입들은 줄을 지어 느릿느릿 움직였다.
“동작 봐라? 신상이 걱정된다면 빨랑빨랑 움직이는 게 좋을 거다.”
그 고참 원생은 눈을 가늘게 뜨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소리를 칠 때보다 한층 더 위협적으로 들렸다.
신입생들은 미운털이 박히지 않기 위해 모두 다급히 움직였다. 순식간에 육지로 내려선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줄을 지어 섰다. 고참은 입가에 음침한 미소를 흘리고는 다시 명령을 내렸다.
“앉아 번호 시작!”
“하낫! 둘! 셋! 넷! 다섯!…”
번호가 끝나자 고참 원생은 선생에게 차렷 자세로 보고했다.
“총 35명입니다, 선생님!”
“좋아, 인솔해.”
사악한 목소리
고참은 신입들을 향해 돌아서서 엄격히 명령했다.
“전체 주목! 지금부터 운동장으로 이동한다. 도중에 대열을 이탈하거나 잡담을 해서는 즉결처분감이다. 선두 앞으로 갓!”
그것은 향긋하던 봄날의 공기를 찢어발기고 훼손시키는 사악한 목소리였다. 대열은 왼쪽으로 야산을 끼고 울퉁불퉁한 흙길을 따라 섬의 중심 쪽으로 이동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