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스파이’ 칼 빼든 정부 딜레마

그때그때 다른 고무줄 형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정부가 기술유출 범죄에 대한 대응 및 처벌을 강화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법과 선고의 괴리, 어려운 증거 입증 등 현실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게다가 국가자원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핵심기술에 관한 법안도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후속 대처만 논하고 있는 정부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정부의 대응으로 기술유출 범죄가 줄어들지 관심이 쏠리는 대목이다.

정부가 산업기술 유출 범죄에 칼을 빼 들었다. 앞으로는 영업비밀을 유출할 경우 최대 7년6개월의 형이, 해외 유출범에겐 최대 12년까지 선고가 가능하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산업기술 유출 사건은 매년 평균 300건을 상회했다. 지난 2019년 376건이었던 산업기술 유출 사건은 2020년 405건까지 치솟았다. 2021년 378건, 2022년 348건, 지난해 379건이었다. 경찰이 불송치하거나 수사 중지한 사건은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불방망이
솜방망이 

해외 유출도 지난 5년간 64%나 증가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국가정보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산업기술 해외 유출은 2019년 14건서 지난해 23건으로 늘어났다. 국가핵심기술 유출 피해액은 총 22조에 달한다.

하지만 기술유출범에 대한 처벌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실제로 지난 2021년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1심 사건 33건 중 무죄 선고가 60.6%, 집행유예가 27.2%를 차지했다. 기소된 유출범의 87.8%가 가벼운 처벌을 받은 셈이다. 2022년에도 해외 유출범에 대한 형량이 평균 1년여 밖에 되지 않았다.


특히 대검이 지난 2022년 9월 ‘기술유출범죄 수사지원센터’를 설치한 후 1년여간 총 64건을 기소했지만 그중 4건에 대해서만 유죄 선고가 내려지기도 했다.

이에 기업들은 영업비밀 유출범죄에 대한 형사처벌이 강화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왔다. 특허청이 발표한 ‘2023년 지식재산 보호 실태조사’에 따르면 영업비밀을 보유한 기업 2곳 중 1곳은 ‘영업비밀 유출 범죄에 대한 형사처벌이 강화돼야 한다’고 응답한 것으로 집계된다.

이 같은 응답을 내놓은 기업의 비율은 2022년 27.1%서 지난해 46.4%로 2배 이상 높아졌다. 기업 현장서 느끼는 영업비밀 유출 범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커진 것이다.

전문가와 법조계에서는 재판부가 기술유출 범죄를 중대범죄로 분류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법원은 기술유출 범죄 처벌이 기업에 돌아가는 징벌적 손해배상 위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며 “막대한 돈을 받고 기술을 유출하고 짧은 형량을 받으면 유출범에겐 남는 장사”라고 지적했다.

류성원 한국경제인협회 산업혁신팀장은 “산업기술 유출과 관련된 처벌이 경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것이 사실”이라며 “유죄가 선고되더라도 대부분 실형을 살지 않고 집행유예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초범은 봐주는 경우가 많은데 한 번 유출로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받으면 범죄 시도가 늘 수 있다”고 우려했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해외에서는 기술유출을 간첩죄에 준하는 정도로 심각하게 판단하고 있다”며 “사건의 엄중함을 인지하고 공소시효 등을 연장해 추후에도 기업이 민형사를 제기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매년 평균 300건 이상 발생
5년간 87% 이상 가벼운 처벌 

형사뿐 아니라 민사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홍 교수는 “민사서 기업의 피해를 상당 부분 인정해 주는 전향적인 판결이 많이 나와야 한다”며 “외국으로 기술이 유출된 경우 재산상 손해를 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이 같은 지적에 정부 관계기관들은 지난해부터 유출범에 대한 처벌 강화와 예방 대책을 논의했다. ▲양형기준 상향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으로 범죄 구성요건 확대 ▲주요 기술유출 경로 규제 대상 포함 ▲국가핵심기술 전면 현행화 ▲산업기술보호위원회 운영 강화 ▲국가핵심기술 관련 인력관리 강화 등이다.

정부는 가장 먼저 유출범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다. 

특허청은 지난 13일 정부대전청사서 ‘기술보호 대책’ 관련 기자간담회를 열고 “기술유출 방지를 위한 4중 안전장치가 완성돼 본격 시행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4중 안전장치는 ▲특허청 방첩기관 지정 ▲기술경찰 수사 범위 확대 ▲양형기준 강화 ▲징벌 배상 확대 등이다.

김시형 특허청장 직무대리는 “지난달 23일 방첩업무 규정(대통령령) 개정안이 시행됨에 따라 특허청이 방첩기관으로 새롭게 지정됐다”며 “기존 국가정보원, 법무부, 관세청, 경찰청, 해양경찰청, 국군방첩사령부 등 6개 방첩기관과 함께 산업스파이를 잡는 데 적극 동참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특허청은 공학박사, 변리사, 기술사 등 1300여명의 전문인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세계 첨단기술정보인 특허정보를 5억8000만개 보유하고 있다. 이 같은 정보를 국가정보원 산하 ‘방첩정보공유센터’와 공유하고 다른 방첩기관서 수집한 기술유출 관련 첩보와 상호 연계하는 등 산업스파이를 잡기 위해 기관 간 긴밀히 협력해 나갈 방침이다.

김 직무대리는 “기술유출 시도가 지속 발생하고 있으나 유출범죄가 지닌 심각성에 비해 처벌은 미흡한 실정이었다”며 “양형기준을 높여 영업비밀 유출 범죄에 대해 해외 유출의 경우 9년서 12년으로 늘렸고(국내 유출은 6년서 7년6개월), 초범도 곧바로 실형이 선고되도록 집행유예 기준을 강화해 법적 억제력을 높였다”고 말했다.

지난 3월25일에 열린 제130차 대법원 양형위원회서도 산업기술 유출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의결안을 발표해 이에 대한 사법적 대응역량 강화를 선언했다.

“증거 입증
어려워…”

대법원 양형위원회에서는 ‘지식재산권범죄’로 분류돼있던 기존의 양형기준을 ‘지식재산 및 기술침해범죄’로 수정해 기술침해범죄를 사법적으로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아울러 산업기술 유출에 대한 처벌도 대폭적으로 강화했는데, 처벌의 근거가 되던 ‘영업비밀 침해행위’의 양형기준을 이전의 최대 6년서 8년으로 상향했다.


국가의 핵심기술을 외국으로 유출한 경우에는 최대 12년, 여기에 더해 비밀유지의무가 있는 사람이거나 계획적·조직적 범행, 동종의 누범일 경우에는 2분의 1을 가중해 최대 18년까지 가능하게 했다. 일반산업기술 사건은 국외 침해에 대해서는 최대 15년, 국내 침해에 대해서는 최대 9년까지도 가능토록 했다. 

기술유출 방지를 위해 특허청 서울사무소서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부경법)’ 제도개선위원회가 출범해 활동을 본격화하기도 했다.

위원회는 영업비밀 분야 석학, 영업비밀 사건 실무경험이 많은 변호사, 대·중소기업서 실제 영업비밀 보호업무를 담당하는 산업계 전문가 등 12명으로 구성돼 첨단기술 등 영업비밀 유출 방지를 위한 활동을 벌이게 된다.

부경법은 위조 상품의 유통과 타인의 아이디어 탈취 등 부정경쟁 행위를 방지하고, 영업비밀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법률이다.

특허청은 기술패권 경쟁이 심화되면서 영업비밀 보호의 중요성이 커지는 현장 상황을 반영해 영업비밀 침해에 관한 징벌적 손해배상 한도를 3배서 5배, 조직적인 영업비밀 침해에 대응할 수 있도록 법인의 벌금형을 행위자에게 부과된 벌금의 최대 3배로 강화하는 등 부경법을 지속적으로 개선했다.

하지만 처벌을 강화해도 침해된 영업비밀의 가치·중요도·피해 규모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면, 실제 처벌로 이어지기는 어려워 재판 과정서 이를 보완할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영업비밀 침해 형사재판서 피해자의 변호사가 영업비밀을 판사에게 직접 설명할 수 있도록 하는 변호사의 진술권 도입이 대표적인 예다. 특허청은 연말까지 위원회서 논의된 주요 쟁점을 정리하고, 내년부터 선별적으로 입법 절차를 진행할 계획이다.

정인식 특허청 산업재산보호협력국장은 “세계 각국이 자국의 첨단기술 보호를 강화하고, 공급망을 재편하는 상황인 점을 고려할 때 영업비밀 보호는 기업과 국가 모두의 경쟁력에 직결되는 문제”라며 “특허청은 부정경쟁행위와 영업비밀에 관한 각계 전문가의 의견을 모아 시의적절하고 체계적으로 제도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수립해 실행에 옮기겠다”고 말했다.

6년→8년
최대 12년

다만 처벌 기준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재판관들의 법 감정이 해당 기준에 못 미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지난 10일 핵심기술들을 중국 신생 경쟁업체에 유출한 산업스파이 4명이 각각 징역 1년~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대구지법 서부지원 제5형사단독 김희영 부장판사는 10일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A씨 등 4명에게 징역 1년~2년 6개월을 각각 선고했다. 피고인 중 수사에 협조한 1명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은 법정 구속됐다.

A씨가 대표이사로 있는 대구 소재 반도체 장비제작 업체는 3억원의 벌금형이 선고됐다.

김 부장판사는 “피고인들은 피해기업 영업비밀이 중국서 사용될 것임을 잘 알면서도 부정한 이익을 얻기 위해 사용·누설했다”며 “이런 범죄를 가볍게 처벌한다면 해외 경쟁업체가 우리 기업이 각고의 노력으로 쌓아온 기술력을 손쉽게 탈취하는 것을 방치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판시했다. 

양형 이유에는 가볍게 처벌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았으면서도 징역 1~2년의 선고를 내린 것이다. 이를 두고 법조계에서는 국민들이 느끼는 법 감정과 판사들이 느끼는 법 감정이 너무 다르다고 지적했다. 

한 판사출신 변호사는 “판사들이 처벌 기준에 맞지 않게 선고하는 경우가 많다”며 “처벌 기준보다 낮게 처벌하는 판례가 많이 쌓인다면 범죄자들은 처벌 기준에 따른 선고에도 양형부당을 이유로 항소하는 경우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양형위의 심의 결과에 맞는 선고를 내리도록 판사들의 법 감정을 다시 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여전히 기술 유출 범죄를 입증하는 일이 어려운 점도 지적된다.

‘기술 유출’ 들쭉날쭉 판결, 왜?
처벌 규정·양형기준 대폭 강화

한 예로 한 드론 업체는 연구소 직원들이 회사의 핵심기술을 활용한 회사를 설립한 것에 대해 영업상비밀누설, 부정경쟁방지법 등으로 고소했지만 회사 기밀을 빼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연구한 성과라고 주장하면서 재판이 공전하고 있기도 하다.

또 예전처럼 USB에 핵심기술 괸련 정보를 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직원들의 ‘머릿속에 입력된 기술’을 빼내오는 방식으로 유출이 이뤄지는 경우도 있어 기술을 빼내올 것을 요구한 정황이 있어도 이를 쉽게 증명하지 못하는 사례도 있다.

한 첨단기술 업계 관계자는 “첨단기술을 중심으로 기술 유출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지만 입증할만한 증거가 없어 법의 도움을 못 받고 있는 것이 업계의 현실”이라며 “또 재판이나 수사 과정서 해당 기술을 전부 공개할 수도 없다”고 토로했다.

법조계에서는 기술 유출 분쟁을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디스커버리(증거공개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소송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전에 당사자가 증거를 미리 교환하는 절차다.

한 기술유출 전문 변호사는 “기술 유출 재판의 핵심은 증거 확보”라며 “일단 기술 개발이 완료되고 나면 어떤 기술이 유출됐고 어떻게 사용됐는지 추적하는 것은 힘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피해 기업이 기술 유출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가 막혀 있는 상황서 디스커버리 제도는 유용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 기업들은 기술 유출 정황을 발견했을 때 형사절차를 먼저 개시한다. 기업이 자체적으로 확보하거나 민사소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거의 없어 압수수색 등 수사 권력의 힘을 빌려 증거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디스커버리 제도가 활성화되면 재판 시작 전 기술 유출 증거를 확인해 재판에 소요되는 시간이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박형남 사법정책연구원장은 “민사소송이든 형사소송이든 기술 유출을 판단하고 피해 규모를 산정하게 위해서는 투명한 정보와 증거 공개가 필수다. 기술 유출뿐 아니라 민사소송서 디스커버리는 중요한 문제”라며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제3의 기관에게 감정받아 가치를 산정하는 방식을 통해 효율적으로 재판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반적인 기술 유출에 관한 처벌 규정은 강화됐지만 산업기술보호법의 규제를 받는 국가핵심기술에 관한 규정은 아직 국회서 계류 중이다. 21대 국회 임기 종료일(오는 29일)이 2주 정도 남은 가운데 반도체·이차전지(배터리) 등 국가핵심기술 유출 방지를 골자로 한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 통과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소관 상임위인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자위)에선 이 법안을 작년 11월 통과시킨 이후 12월 소위 심사를 한번 진행한 상태다. 법제사법위원회의(법사위) 법안 심의를 거쳐 본회의 통과라는 절차를 남겨놓고 있다.

국가핵심기술
아직 계류 중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만약 법안 통과가 되지 않는다면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될 것이고 22대 국회서 같은 내용의 법안을 발의하고 심의하는 일이 무의미하게 반복될 것”이라며 “촉각을 다투는 글로벌 반도체 경쟁서 밀리는 등 심각한 상황서도 우리 기업, 정부는 손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게 된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출신 임직원 상당수가 국가핵심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기소됐지만 유죄로 판단돼도 법정형 대비 양형이 낮은 수준일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kcj512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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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구로발’ 국민의힘 당원 명부 유출 의혹

[단독] ‘구로발’ 국민의힘 당원 명부 유출 의혹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서울의 한 지역구에서 특정 당의 당원 명부가 유출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총선, 지방선거 등을 치르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당 관계자의 업무용 노트북에 담겨있던 정보가 뒤늦게 드러난 것이다. 올림픽 육상 100m 경기를 생각해 보자. 8개 레인에 각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선다. 이 선수들은 국내 선발전에서 1등을 차지했을 것이다. 국가대표로 뽑힌 선수는 올림픽에 출전해 예선을 치르고 결승에서 금메달을 다툰다. 0.01초 차이로 메달 색깔이 달라지는 경기에서 승자는 늘 단 1명뿐이다. 치열한 공천 경쟁 선거는 올림픽보다도 더 확고한 ‘승자 독식’ 구조다. 올림픽에선 2등에게 은메달, 3등에게 동메달이라도 주지만 선거에서 2등은 꼴찌와 같다. 당선자는 후보자에서 국회의원, 시·군·구의원, 구청장·군수, 시·도지사 등으로 신분 상승이 이뤄진다. 명예와 권력을 동시에 거머쥘 수 있는 자리로 순식간에 올라가는 셈이다. 이렇다 보니 선거에 출마하려는 후보들은 당선 가능성이 큰 자리로 몰린다. 어떤 경기든 일단 출발선에 서야 경쟁을 할 수 있듯, 선거에서 공천은 본선으로 가기 위한 1차 관문이 된다. 자리는 하나, 후보는 여럿이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일례로 최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에서 불거진 공천 헌금 의혹은 자리를 돈으로 사려 했다는 내용으로, 관련자는 구속됐다. 최근 서울 구로구에서 일어난 당원 명부 유출 의혹도 공천 경쟁 과정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의 업무용 노트북에서 수십개의 엑셀 파일이 발견됐는데 그중 일부가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였고 이름, 연락처, 거주지 등이 포함된 이 파일이 상대 당의 후보 경선에 사용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2020년 21대 총선 당시 서울 구로을 지역구에서 거물급 인사가 후보로 맞붙었다. 구로을 지역은 서울에서 민주당 지지세가 가장 강한 곳이다. 17대(2004년)부터 지난 22대(2024년) 총선까지 20여년간 민주당이 이겼다. 민주당(당시 통합민주당)이 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한 18대 총선에서도 구로을 지역은 넉넉하게 수성한 바 있다. 업무용 노트북에서 발견 이름·연락처·거주지 담겨 구로에서만 평생 살았다는 한 시민은 “선거 때마다 텃밭, 험지 이런 말을 많이 쓰지 않나. 구로는 국민의힘 입장에서 ‘사지’다. 민주당이 아주 꽉 잡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보니 총선 등에서 민주당 후보가 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몇몇 인사들은 바닥부터 훑어가며 선거를 준비한다. 민주당은 21대 총선 때 구로을 지역 후보로 윤건영 의원을 전략공천 형태로 낙점했다. 윤 의원은 당시 문재인정부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을 맡고 있었다. 현재까지도 문재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복심으로 불린다. 국민의힘은 서울 양천을 지역에서 내리 3선을 지낸 김용태 전 의원을 ‘자객’ 공천했다. 민주당의 독식으로 관심 지역에서 벗어나 있던 구로을이 순식간에 ‘격전지’로 떠올랐다. 문제는 구로을 지역 총선 출마를 준비하던 예비후보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민주당 조규영 전 서울시의원의 반발이 거셌다. 조 전 시의원은 2006년 지방선거에서 서울 비례대표로 정치권에 입성, 이후 구로2선거구에서 서울시의원으로 재선했다. 조 전 시의원은 최소한 경선은 치를 수 있게 해달라며 민주당의 전략 공천을 비판했다. 당시 조 전 시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존 지역 당원 수보다 더 많은 권리당원을 모았다. 열심히 뛰었다. 누구와 경쟁하든 경선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며 “그러나 결과는 낙하산 공천이었다. 저는 특혜나 찬스를 원하지 않았다. 공정한 경선만을 바랐다. 낙하산 공천은 공정하지도 않고 본선 경쟁력도 없다”고 강조했다. 어디에 사용했나 조 전 시의원은 노숙 단식까지 해가며 경선을 촉구했지만 결국 낙천했다. 이후 다른 선거에도 출마하지 않았다. 잊히는 듯했던 조 전 시의원의 이름이 최근 다시 거론되고 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업무용 노트북에서 조 전 시의원의 이름이 표기된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가 발견된 것이다.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국민의힘 당원들의 이름과 연락처, 행정동 등이 기재된 엑셀 파일은 ‘(보안철저)저쪽디비’ 폴더에 담겨있었다. 해당 파일의 ‘구분’ 부분에 ‘조규영 일반 당원’이라고 표기돼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는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가 맞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에 민주당 구로을 국회의원 예비후보였던 조 전 시의원의 이름이 기재돼있다는 점에서 의심이 촉발됐다. 동시에 누가 노트북에 해당 파일을 옮겼는지도 관심사로 떠올랐다. 문서가 발견된 노트북은 2020년 총선 과정에서 당원협의회에 업무용으로 지급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 말해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만 사용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비례대표로 구로구의회에 입성한 A 구의원이 해당 노트북을 사용했다. A 구의원은 2022년 국민의힘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여성부장을 맡은 이력도 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에 따르면, 문제의 노트북은 A 구의원이 여성부장으로 활동할 무렵 사용했다가 후임자에게 넘겼다. 그는 “이후 여성부장이 바뀔 때까지 쭉 A 구의원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쉬쉬하다 이제서야 눈여겨볼 대목은 A 구의원의 이력이다. 그는 2022년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소속으로 비례대표 순번을 받아 당선됐지만, 2020년 총선 때까지만 해도 민주당 조 전 시의원을 보좌하는 수행비서 역할을 했다. 실제 조 전 시의원이 예비후보로 선거운동을 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 곳곳에서 A 구의원을 확인할 수 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에 따르면 “A 구의원은 조 전 시의원 낙천 이후 김용태 전 의원 배우자의 수행비서로 발탁됐다. 김 전 의원의 측근이 A 구의원을 추천한 것으로 안다”며 “2020년 총선에서 김 전 의원이 낙선하고 당협위원장으로 있을 당시 A 구의원이 비례대표로 공천받았다”고 설명했다. 민주당 측 정치인을 수행했던 인사가 국민의힘 소속으로 선거에 출마한 데 이어, 그가 직접 사용한 노트북에서 자신이 보좌했던 사람의 이름으로 파일명이 기재된 국민의힘 당원 명부가 발견된 셈이다. A 구의원이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를 민주당 측에 유출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대목이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는 “A 구의원이 조 전 시의원을 수행할 당시 지역구 경선을 대비해 당원 명부를 입수한 게 아닌가 싶다”며 “당시 경선까지 진행되지 않았기에 당원 명부가 실제 사용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문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의아한 점이 많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는 “사실 이 문제는 올해 1월경에 처음 드러났다. A 구의원이 당원협의회에 노트북을 반납하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해당 폴더가 발견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쉬쉬’하다가 최근에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고 설명했다. 당협 회의에서 논의 A 구의원 “문제없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A 구의원의 당원 명부 유출 의혹은 지난 1월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에서 논의됐다. 해당 의혹이 구로 지역에서 확산하자 A 구의원이 먼저 이 문제를 먼저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당원협의회 회의에 참석했던 관계자에 따르면 대부분 위원은 ‘덮고 가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문제가 불거지면 지방선거를 망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일부 관계자가 “심각한 개인정보 유출” “해당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조사를 요청했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아 관철되지 않았다. 회의에 참석한 한 위원은 “선거를 치르다 보면 당원 명단이 일부 흘러 다니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렇게 명부가 통째로 유출되는 건 심각한 일”이라며 “명백한 해당 행위다. 자체 조사를 통해 징계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윤리위원회 규정 제20조(징계사유)에 따르면 ▲당에 극히 유해한 행위를 했을 때 ▲현행 법령 및 당헌·당규·윤리 규칙을 위반해 당 발전에 지장을 초래하거나 그 행위의 결과로 민심을 이탈케 했을 때 등의 사유로 징계할 수 있다고 돼있다. 해당 관계자는 A 구의원의 행위가 당에 극히 유해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경찰 수사가 진행될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해당 행위? 징계 가능성? A 구의원은 해당 의혹은 전부 해명됐다는 입장이다. 그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당협 회의에서 이 문제가 논의됐는데 문제없다고 결론 났다. (당원 명부 유출 의혹은) 일고의 논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해당 의혹을 언급한 제보자에게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 등으로 조치할 수 있다는 점을 전해 달라”고 말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