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대 강’ 영수회담 시나리오

자존심 내세우다 날 새겠네

[일요시사 정치팀] 차철우 기자 = 고집이 보통이 아니다. 화끈하게 결정을 내리는 게 없다. 상당히 불리한 형국임에도 여전한 기조다. 남은 임기 동안 평행선만 달리면 윤석열 대통령에게는 좋을 게 하나도 없어 보인다. 그러자 드디어 가능성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취임 2주년이 다 돼간다. 그동안 윤석열 대통령은 야당 대표를 단독으로 만나지 않았다. 옛날 방식이라고는 하나 여소야대가 임기 끝날 때까지 이어지는 상황서 이제는 만날 필요성이 생겼다. 그동안 대통령실은 번번이 영수회담이 필요 없다는 식의 발언을 해왔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이제야 가능성을 열어놨다. 

협조 절실

영수회담은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의 만남을 뜻한다. 과거에는 대통령과 야당 총재가 여러 번 만났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야당 대표 여러 명을 한 번에 만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앞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4·10 총선 직후 영수회담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총선 승리로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된 민주당은 현재 뭘 해도 유리한 구도다. 이런 탓에 과거부터 꾸준히 주장해 온 만남의 필요성을 이번에 재차 언급한 것. 

현재까지 윤 대통령은 8차례 제의가 들어온 영수회담을 모두 거절해 왔다. 대통령실을 제외한 모두가 ‘협치’가 필수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알렸다. 


지금껏 윤 대통령은 영수회담은 옛날 방식이고, 별 필요없다는 취지로 애써 무시했었다. 다만 윤 대통령의 이 같은 주장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야당 대표를 단독으로 만나지 않은 횟수는 줄어왔다. 

직전 대통령이었던 문재인 전 대표 역시 다자회담을 통해 여러 사안들을 논의해 왔다. 대통령실은 야당의 협조가 절실해졌다. 야당이 돕지 않을 경우,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탓이다. 게다가 윤 대통령 입장에서는 매번 거부권을 쓰기에도 부담스럽다. 

정가에선 이번 총선서 국민의힘이 승리를 거뒀다면 사실 굳이 영수회담 개최가 필요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오히려 만남서 돌발 상황으로 인해 난감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정사상 최초로 5년 내내 여소야대 환경에 내몰린 윤 대통령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 

이런 탓에 여권 내부서조차 빠른 시일 내에 만나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난 17일, 국민의힘 원로 간담회서도 영수회담의 필요성이 언급됐다. 상임고문단의 의견이었다는 점에서 반드시 협치가 있어야 한다고 보는 시각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내 초선 의원들도 영수회담을 가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용태 당선인은 “야당과 대화하고 협치하는 것은 필수적인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재명·조국 동시에 압박
이젠 선택 아닌 필수 사안

민주당에 이어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역시 영수회담을 제안했다. 조 대표는 “원내 제3당 대표인 나는 언제, 어떤 형식이든 윤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며 “공개 회동 자리서 예의를 갖추며 단호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말했다. 


사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 조 대표는 상당히 불편한 관계다. 과거 윤 대통령은 이 대표를 향해 “이재명 패밀리는 상습적 배임 행위를 했다”고 타격한 바 있다. 이때부터 대립각을 세워왔고, 윤 대통령은 이 대표가 피의자이기 때문에 만나지 않았다. 

총선 승리를 진두지휘했던 이 대표가 사실상 민주당을 접수하면서 일각에선 이 대표의 연임설도 힘을 얻고 있다. 일부 친명(친 이재명)계 및 일부 인사들은 “정권 심판의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려면 이 대표의 강한 리더십으로 당을 이끌어야 한다”며 연임론에 불을 지폈다. 

일단 상황은 이 대표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중이다. 

이 대표의 윤 대통령을 향한 메시지도 한층 더 강력해졌다. 그는 최근 국무회의서 윤 대통령이 언급한 민생 발언에 대해 지난 17일 “윤석열정부는 이번 총선서 나타난 민생을 살리라는 국민의 절박한 외침에 말로만 민생, 민생, 민생 세 번을 외치고 있다”고 혹평했다. 

그러면서 “말이 아니라 함께 실천하길 바란다. 많은 국민들이 벼랑 끝에 몰려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날 강경 발언은 윤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을 전략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 입장에서는 그동안의 기조를 꺾어야 하는 셈인데, 상당히 곤란한 처지가 됐다. 

게다가 불편한 관계인 조 대표도 윤 대통령에게 지속적으로 만나 달라며 메시지를 던졌다. 윤 대통령과 조 대표는 문재인정부 당시 각각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을 지내고 있었다. 당시 조 대표는 윤 대통령에게 제대로 낙인이 찍혀 말 그대로 탈탈 털렸다.

언제까지 등 돌릴 텐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검찰총장 자리에 앉자마자, 조 대표를 비롯한 아내인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 자녀의 입시 비리 의혹, 웅동학원 비리 등을 전방위적으로 수사했다. 이른바 조국 사태로 인해 그의 정치적 앞날은 암울 그 자체였다. 

그러나 조 대표는 보란 듯이 이번 총선을 통해 생환에 성공했다.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윤 대통령을 향한 압박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이렇듯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등 범 야권은 전방위적으로 윤 대통령에 대한 압박을 시도하고 있다. 두 정당이 물리적으로 섞이기는 쉽지 않겠지만, 윤정부에 대한 화력을 집중시키면서 윤 대통령에 대한 불통 이미지를 극대화시키는 중이다. 

이런 가운데, 윤 대통령이 먼저 꼬리를 내렸다. 19일, 이 대표에게 “다음 주 용산서 만나자”며 제의했다. 이날 대통령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의 전화 통화서 “다음 주에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이 대표도 “마음을 내주셔서 감사드린다”고 화답하면서 이번 정부 들어 최초인 대통령과 야당 대표의 만남은 9부 능선을 넘게 됐다.


윤 대통령 입장에선 지난해부터 의료계와의 의대 정원 확대 문제가 매듭지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서 총선 참패에 대한 부담감, 반등하지 못하고 있는 국정지지율 등을 고려할 때 칼을 빼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다음 주 만남의 주제나 형식 등에 대해선 아직 조율이 이뤄지지 않은 만큼, 어떤 대화가 오갈지에 대해 정치권에선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일단 오케이

앞서 ‘정치 9단’으로 불리는 민주당 박지원 당선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총선의 민심 결과는 윤 대통령, 이 대표가 공동 집권하게 된 결과로 협치하라는 뜻”이라며 “윤 대통령이 (영수회담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곧 영수회담을 갖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ckdjfdo@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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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단독기획> 26년 만에 다시 꺼낸 산업증권 파산의 비밀(상)

[창간특집 단독기획] 26년 만에 다시 꺼낸 산업증권 파산의 비밀(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1997년 말 국가부도 상황이 벌어졌다. 기업이 줄줄이 도산했고 수많은 근로자들이 길거리에 나앉았다. 자본금 수천억원, 국책은행을 뒷배로 둔 대형 증권사들도 고꾸라졌다. ‘절대 망할 리 없다’던 회사의 붕괴는 30여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피해자의 마음에 상흔으로 남아 있다. 산업증권 ‘파산의 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08년 10월21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공성진 의원이 한국산업증권(이하 산업증권) 파산 문제를 언급했다. 당시 공 의원은 “산업증권이 IMF 위기 시에 불·탈법적으로 강제 파산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산업증권은 한국산업은행(이하 산업은행)이 자본금을 100% 출자해 설립했다. 산업은행이 산업증권의 1인 대주주였던 셈이다. 망하지 않는다 이날 국감에서는 산업증권이 파산에 이르는 과정서 일어난 일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공 의원은 ▲산업증권 해산 과정서 이사회와 재정경제부의 허가 여부 ▲산업증권을 파산으로 끌고 간 1041억원 ▲개인명의의 계좌 ▲개인 계좌를 통해 한국산업선물로 흘러간 54억원 등에 대해 질의했다. 1998년 산업증권 해산 이후 10년 만에 당시 상황이 국감에 언급되면서 각종 의문이 제기됐다. 특히 개인명의의 계좌를 통해 오고 간 자금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됐다. MB(이명박)정부 들어 처음 열린 국감서 산업증권 파산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자 일부 언론은 이전 정부의 비자금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 국감에 증인으로 참석한 이충현 전 산업증권 채권관리팀장은 여전히 사건을 추적하고 있다. 현재 서울 강서구의원으로 활동 중인 그는 “외환위기 당시 좌파 정부의 고위관료들은 기업과 금융기관에 대한 범죄적 구조조정과 부정부패로 천문학적 비자금을 조성하고 나라와 국민에게 회복 불능의 상처를 남겼다”고 일갈했다. 이 구의원은 산업은행에 근무하다가 산업증권 설립과 동시에 이직했다. 그는 산업증권이 파산하면서 일자리를 잃은 피해자이고 ‘강제파산’ ‘사기파산’ 의혹을 제기한 제보자, 산업증권강제퇴출피해대책위원장이자 손해배상청구소송의 원고로 26년을 보냈다. 그사이 소송서 패소했고 법적 시효는 끝났다. 그럼에도 이 구의원을 비롯한 피해자들은 산업증권 파산 사건을 놓지 못한 상태다. 산업증권에 근무했던 직접 피해자와 가족 등이 일한 간접 피해자들은 “IMF 사태였다고 해도 산업증권이 망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개인을 고객으로 하는 일반은행이 아니라 산업자본 조달을 위해 설립된 국책은행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 하지만 산업증권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망했다. 400여명의 근로자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다. 문제는 1997년 12월 IMF 사태 이후 1998년 해산, 1999년 파산 선고 때까지 석연치 않은 의문이 여럿 나온 점이다. 특히 청산 절차가 시작된 이후 개인명의 계좌를 통해 자금이 움직인 증거가 나왔다. 이 구의원이 가지고 있는 71개의 이른바 ‘비밀 통장’의 존재가 드러난 것이다. 산업증권은 ‘산업은행이 발행하고 있는 산업금융 채권의 원활한 소화 및 국제업무 특화’를 목적으로 1991년 4월 설립됐다. 산업은행이 100%를 댄 초기 자본금은 1500억원에 달했고 1992년 11월 1000억원, 1998년 3월 1500억원을 증자해 1998년 7월25일 해산 당시 산업증권의 자본금은 4000억원에 이르렀다. IMF 사태로 증권사 강제 퇴출 산업은행 1인 대주주로 안정성↑ IMF 사태로 휘청이긴 했지만 산업증권은 명예퇴직, 임금 반납 등 고강도 구조조정을 통해 상황을 개선하려 했다. 산업은행 역시 산업증권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증자하는 등 위기 타파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산업증권 본사에서 근무하던 이 구의원과 지방 지점에 있던 김영수(가명)씨는 “회사에 큰 문제는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기류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98년 5월 산업은행에 새 총재가 부임하면서부터다. 특히 언론을 통해 ‘산업증권 연내 폐쇄’가 발표되자 내부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고객과 채권자들은 동요했고 예금인출을 서두르는 등 대혼란이 일어났다. 당연히 신규영업도 줄어들었다. 영업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2개월 뒤 1998년 7월 산업은행은 산업증권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해산결의를 진행했다. 이후 1999년 2월 산업증권의 청산인은 ‘부채 초과 및 지급불능’을 이유로 파산선고를 신청했고 같은 해 3월13일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산업증권은 파산했다. 연내 폐쇄 발표부터 파산까지 채 1년이 걸리지 않은 셈이다. 이 구의원에 따르면 산업은행의 산업증권에 대한 해산결의는 노동조합과의 퇴출 위로금 규모를 합의하는 사이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산업증권의 노조위원장과 산업은행의 대표이사, 부총재 등이 퇴출 위로금으로 24개월치 임금을 지급하기로 구두 합의를 진행하는 과정서 해산이 결정됐다. 당시 산업증권 대구지점서 근무하던 김영수씨는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서 “명예퇴직으로 나간 직원들은 20개월치 월급을 받은 것으로 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 산업증권이 망한 이후 나간 직원들은 퇴직금 수준의 돈만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산업증권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명예퇴직을 신청하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 말했다. 이 구의원은 2010년 5월 산업증권 파산으로 직장을 잃은 피해자를 모아 산업은행, 금융감독원, 전 산업은행 총재와 부총재, 산업증권 청산인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산업증권 파산 과정서 피고들의 불법행위가 자행됐고 이로 인해 피해자(직원)가 생겼으니 이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해달라는 취지다. 수장 바뀌고 급변한 기류 이 구의원은 “먼저 산업은행의 산업증권에 대한 해산결의가 적법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또 파산 신청의 원인이 된 자본잠식 상황은 조작됐고 1041억원의 대지급도 실제 진행됐는지 여부가 불분명하다. 무엇보다 산업증권 해산결의 이후 만들어진 수십여개의 개인명의 계좌와 이를 통한 자금흐름은 사기파산, 강제파산의 가장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1999년 2월 산업증권 청산인 명의로 서울지방법원에 제출한 파산선고신청서를 보면 ▲지급불능 ▲채무초과를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1500억원에 달하는 산업은행의 유상증자, 대규모 인원 정리, 조직 슬림화 등 자구 노력에도 수습이 안 될 정도로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또 회계법인의 실사 결과 부채가 자산보다 많다는 점도 명시했다. 반면 이 구의원은 결산보고서와 회계법인이 청산 가치 기준으로 작성한 조사보고서를 근거로 해산일 기준(1998년 7월25일) 자산이 부채보다 약 100억원가량 많다고 주장했다. 일반 채권자에게 변제해도 돈이 남는 만큼 파산이 아니라 청산 형태로 종결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산업은행은 청산이 아닌 파산의 방식을 택했다. 청산은 재산관계를 정리해 이를 분배하는 절차를 뜻한다. 파산은 회사의 총 재산을 총 채권자에게 공평하게 나눠주는 절차다. 파산은 법원의 결정에 따라 진행된다. 산업증권이 청산으로 마무리됐다면 산업은행은 유일한 대주주로서 손해를 피할 길이 없다. 하지만 법원이 파산 결정을 내리면서 산업은행은 대주주이면서 채권자가 됐다. 산업증권의 파산과 관련해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1041억원’의 존재다. 산업은행이 산업증권에 빌려준 단기자금으로 파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돈이다. 산업증권은 1998년 7월28일 ‘1998년 7월25일자로 회사 해산을 결의하고 청산 절차를 진행하던 중 1998년 7월27일 교환에 회부된 어음(금액 1041억원)을 결제하지 못해 1차 부도 조치를 당했다. 자체 자금 조달도 어려우니 추가 자금 지원을 부탁한다’고 산업은행에 요청했다. 의문점 많아 국감서 다뤄 산업은행은 이 돈을 산업증권 대신 갚았다(대지급). 다시 말해 산업증권이 산업은행에 빌린 돈을, 산업은행이 산업은행에 갚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산업은행이 대지급한 1041억원은 산업증권의 채무로 잡혔다. 이 과정서 부채가 자산보다 늘어나면서 산업증권 파산의 원인, 채무초과 상태가 됐다. 실제 회계법인이 작성한 1998년 10월31일 기준 산업증권의 부채는 2190억원, 자산은 1950억원이다. 부채가 자산보다 240억원 많다. 법원은 이를 근거로 산업증권의 파산을 선고했다. 240억원이 산업증권 파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 후폭풍은 400명이 넘는 산업증권 직원에게 미쳤다. 이 구의원은 산업은행이 대지급했다는 1041억원이 실제 거래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산업증권은 대지급 요청문서 ‘산업증권 청산 절차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라고 기술했고 현금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돼있지만 실제로 산업은행은 산업증권에 1041억원을 신규 지원한 사실이 없고 내부 문서에도 신규 추가지원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 구의원에 따르면 산업은행은 파산 절차 과정서 ‘사후관리대지급금’으로 1041억원을 파산채권으로 신고해 2009년 5월 기준 파산채권의 100%를 돌려받았다. 산업은행 입장에서는 단 한 푼의 손해도 없이 대신 지급한 돈을 전부 회수한 것이다. 1041억원의 진실은 현재로선 알기 어렵다. 법원의 허가로 산업증권 메인 전산 서버가 파기된 상태기 때문이다. 다만 산업증권 청산 절차 과정서 개설된 통장은 실물로 존재한다. 이 구의원은 71개의 통장을 산업증권 전 직원에게 전달받아 보관해 왔다. 이 구의원은 해당 계좌들을 통해 수천억원에 이르는 자금이 움직였고 일부는 사용처도 불분명하며 최후의 사용처를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비자금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문제가 제기된 부분은 또 있다. 산업증권과 같은 날인 1998년 7월25일 청산 절차에 들어간 한국산업선물(이하 산업선물)에 송금된 54억원의 성격이다. 산업선물은 산업은행의 자회사로 금융 선물거래를 위해 설립됐다. 파산으로까지 이어진 산업증권과 달리 산업선물은 1998년 정상영업이 시작되기 전에 청산 종결 처리됐다. 그런 회사에 1998년 8월11일 개인 명의의 계좌서 54억원이 이체된 것이다. 이 구의원은 “산업선물은 자본금 100억원의 회사로 산업은행 해산 당시 정식으로 영업개시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무엇보다 1998년 5월 산업증권 연내 폐쇄 발표가 난 상태서 산업선물에 54억원이라는 거액을 입금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1998년 7월부터 시중은행에 개설된 통장은 모두 개인 명의로 돼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계좌 명의자 가운데 2명이 산업증권에 대한 특별검사(1998년 7월25일~8월11일)에 투입된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 검사역이었다는 점이다. 직원 400여명 한순간에 길거리로 법적 판단 끝났어도 문제 제기 중 이 구의원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서 피고 측은 “1998년 당시 고객예탁금은 한국증권금융주식회사에 별도로 예치 관리되는 현행 제도와 달리 증권회사의 고유재산과 구분해 관리되지 않았다”며 “금감원(피고)은 특별검사 기간 중 고객예탁금을 안전하게 고객에게 반환되는 것을 보장하는 적법한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IMF 사태로 금융회사 파산이 일어난 것은 1998년 이전에 없던 일로 제도가 미비했고 방법을 찾던 중 금감원 검사역의 개인 명의를 이용, 계좌를 개설해 이를 고객예탁금 관리 용도로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계좌를 개설했던 2명의 검사역 가운데 1명은 금감원에, 또 다른 1명은 증권사 감사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 명의 계좌와 관련해서는 2008년 국감서도 다시 한번 언급된 바 있다. 국감서 공 의원은 2명의 금감원 검사역 외 계좌를 만든 또 다른 개인 명의자에게 “누구의 지시로 개인명의 계좌를 개설했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해당 인물은 “금융감독검사국 직원들 지시로 그렇게 했다”고 답했다. 공 의원이 거듭 “산업증권의 자금을 개인, ○○○(명의 당사자)의 이름으로 관리하게 된 것은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해당 인물은 “감독 당국의 지시에 의해서 한 것이다. 개인적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은 2011년 이 구의원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서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하며 피고 측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총 주식을 한 사람이 소유하는 이른바 1인 회사의 경우에는 주주총회 소집 절차를 밟지 않거나 총회를 개최한 사실이 없다고 하더라도 1인 주주에 의해 의결이 있었던 것으로 주주총회의사록이 작성됐다면 그 내용의 결의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그 결의는 유효하므로 해산결의가 무효라거나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산업은행이 산업증권의 해산을 결의하는 과정이 절차적으로 하자가 없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해산결의 절차가 적법하고 유효한 이상 근로자에 대한 해고도 위법하지 않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또 소송을 제기한 시기가 사건 발생일 이후 10년이 경과된 상황이라 손해배상채권 시효가 소멸됐다고 봤다. 항소심 재판부 역시 이 구의원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법적인 판단은 끝난 셈이다. 정치적 이유 끝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구의원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나섰다. 이 구의원은 2012년 법적 판결이 확정된 이후에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해왔다. 현재 이 구의원이 용산 대통령실에 넣은 청원은 경찰청 중대범죄수사과, 반부패공공범죄수사과 등을 거쳐 금감원으로 이송된 상태다. 이 구의원은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았다면 인수합병, 매각 등의 방식을 써도 됐을 일이다. 하지만 산업은행은 1인 대주주라는 점을 이용해 산업증권을 없애버렸다. 산업증권의 파산이 정치적인 목적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정부가 산업증권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고르면서 429명의 직원과 그 가족들은 지금까지도 고통받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