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1996년 선진국 진입 관문격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지만, 그 후 세 정부는 경제 간판을 걸지 않고 정치 간판만 걸었다.
김영삼정부의 ‘문민정부’, 김대중정부의 ‘국민의 정부’, 노무현정부의 ‘참여정부’가 각 정부를 대표하는 정치 간판이었다.
군사정권의 ‘3·4·5·6공화국’ 간판보단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간판이어서 다행이지만, OECD 가입국 위상엔 맞지 않는 간판이었다.
정치 간판은 노태우정부를 상징하는 ‘6공화국’ 간판을 내리면서 끝냈어야 했다.
국민도 군사정권의 억압에 찌들어 있다 보니 민주주의 가치를 담고 있는 정치 간판을 반길 줄만 알았지, 경제 간판을 걸지 않고 정치 간판을 건 정부에 무감각했다.
OECD 가입 이후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을 향해 달려야 할 우리나라 정부가 간판을 잘못 택한 것이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당시 이명박정부는 정치 간판 대신 ‘녹색성장’이라는 경제 간판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그 후로도 박근혜정부는 ‘창조경제’, 문재인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경제 간판을 걸고 경제정책을 정부의 브랜드로 사용해왔다.
언론들은 이 세 경제 간판을 ‘MB노믹스’, ‘박근혜노믹스’, ‘문재인노믹스’라고 불렀다.
그런데 윤석열정부는 아직까지 정치 간판이나 경제 간판 중 어느 것도 걸지 않고 있다.
윤정부의 경제정책을 상징하는 ‘윤노믹스’(Y노믹스)도 없다. 물론, 간판이 없다고 정부가 휴업하거나 폐업하는 건 아니다.
다만 국민이 윤정부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상징적인 브랜드가 없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간판 없는 정부가 오래 지속되면 국민이 정부의 정책이 없다고 체감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를 경제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영업사원 1호를 자처하며 세계를 누비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이라면 당연히 집권 초기에 경제 간판을 걸었어야 했다.
그러나 윤정부는 지금까지도 경제 간판을 걸지 않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단 내실을 중요시하는 윤 대통령의 성격 탓이라 할 수 있지만, 그건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원래 윤정부 경제정책은 추경호 경제부총리를 수장으로 내세워 시장 중심의 경제 체질개선과 재정 지속가능성을 경제정책의 중심축으로, 노동·연금·교육의 이른바 ‘3대 개혁’을 추진하는 정책이었다.
그런데 지난 1년6개월 동안 나름대로 재정 지속가능성 경제정책은 펴왔지만, 3대 개혁은 지지부진했다.
사실 윤정부가 경제 간판을 걸지 않은 게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간판을 잘못 걸었다고 야당으로부터 공격은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수석비서관 5명을 일괄 교체하고 지난 4일 윤정부 2기를 이끌어갈 6명의 국무위원 내정자를 발표했다.
특히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 후임으로 최상목 전 대통령실 경제수석을 내정한 건 추 경제부총리가 내년 총선에 나간다는 명분도 있지만, 지지부진한 경제정책에 새 변화를 주겠다는 윤정부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최 경제부총리 내정자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서 경제1분과 간사로 참여했고, 윤정부 초대 경제부총리와 금융위원장 후보로 주목받았다.
최 경제부총리 내정자는 윤정부 초기 경제수석으로 임명된 이후 지난달 30일까지 윤 대통령 가까이서 경제정책을 진두지휘해온 윤 대통령의 최측근이기도 하다.
필자는 윤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는 최 전 경제수석이 경제 수장으로 내정된 만큼 이제는 윤정부가 신장개업하는 자세로 윤정부 2기 경제정책에 어울리는 간판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녹생성장’이나 ‘창조경제’나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경제 간판 때문에 당시 정부가 경제성장을 이뤘다고 말할 순 없다. 그러나 국민이 느끼는 정부의 경제정책 체감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정부 브랜드라 할 수 있는 경제 간판이 바뀌는 걸 싫어하는 국민은 많지 않다.
전 정부의 정책을 반대하는 의미로 해석하기보다 오히려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새 정부의 경제정책으로 받아들이는 국민이 많다.
최 경제부총리 내정자는 이런 국민의 마음을 헤아려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윤정부의 경제 간판을 걸어야 한다.
윤 대통령도 최 경제부총리 내정자가 청문회를 거쳐 경제부총리에 임명되면 더 큰 힘을 실어줘야 한다.
문재인정부 당시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경제부총리, 공정거래위원장, 고용노동부 장관도 갖지 못한 대통령에 대한 경제정책 간언권을 가짐으로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경제 간판을 걸고 경제정책을 주도했듯이, 최 경제부총리에게도 이처럼 막강한 힘을 실어줘야 윤정부가 2기를 맞이해 새로운 경제 간판을 걸고 윤정부 2기 경제정책을 당당히 펼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윤정부 2기 경제정책의 핵심은 집권 초기 때부터 외쳐왔던 노동·연금·교육 분야 개혁이다.
노동·연금·교육 분야 개혁은 역대 정부 모두 필요성은 느끼면서도 총선이나 지선서 역풍을 맞을까봐 시도도 제대로 못한 정책이고, 국회 문턱도 넘기 힘든 정책이다.
그러나 윤정부가 2기 출범과 함께 내년 총선서 불리한 걸 알면서도 ‘노연교’(노동·연금·교육개혁)라는 경제 간판을 건다면, 오히려 내년 총선서 후한 점수로 중간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최 경제부총리 내정자가 지난 4일 내정될 당시 언제 어떤 경제 간판을 걸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노연교’라는 간판도 걸지 않을 것 같다.
설령 경제 간판 ‘노연교’를 건다 해도 내년 총선서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국민의힘이 반대할 게 뻔하다.
그러나 ‘윤노믹스’를 상징하는 경제 간판이 없는 윤정부에 경제 간판을 만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최 경제부총리 내정자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