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도?’ 역대급 단식투쟁 괴담

YS 23일 대기록에 붙은 빵과 우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협상 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방식이자 최후의 수단은 단식투쟁이다. 특히 정치인들의 단식투쟁은 막판 뒤집기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만큼 온갖 설왕설래가 단식 농성장을 뚫고 나온다. 단식투쟁의 역사 속 생긴 웃지 못할 사건들을 짚어본다.

단식투쟁은 물과 소금을 제외한 음식물은 일절 섭취하지 않는 형태의 시위를 말한다. 대개 특정한 사안에 관한 요구를 들어줄 때까지 계속해서 진행된다. 노동자는 물론 일반인과 정치인까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단식투쟁을 선언하기도 한다. 대한민국 최초 정치인의 단식투쟁 역사는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YS와
보름달 빵

김영삼 전 대통령(이하 YS)은 신민당 총재 시절인 1983년 5월18일 대통령 직선제와 언론 자유 등을 조건으로 내걸고 가택 연금 상태서 단식투쟁을 진행했다. 당시 전두환정권은 해당 사건(YS 단식투쟁)이 외부로 새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언론을 통제하려 했다.

YS는 23일간 단식을 진행했다. 대부분 인간은 물 없이 3일, 음식 없이 3주밖에 살지 못한다. YS의 기록은 인간의 생존 한계에 가까웠다. 이는 정치인 단식 역사상 최장 기록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YS의 단식투쟁이 거론될 때마다 ‘보름달 빵 사건’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해당 사건은 단식투쟁 중인 YS의 상태를 걱정하던 문익환 목사가 사전 연락 없이 자택을 방문했는데, 방 문을 여는 순간 보름달 빵과 우유를 목격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각종 라디오나 프로그램 방송 등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렸다.


40년 전부터 정확한 출처 없이 내려오는 소문인 만큼 비판 목적으로 생긴 ‘도시 괴담’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단식 중 몰래 식사했다는 것 자체로 민주 진영에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단식의 배턴을 이어받은 인물은 김대중 전 대통령(DJ)이다. 1990년 평화민주당 총재 시절이던 DJ는 내각제 개헌 포기와 지방자치제 도입 실시 등을 요구하며 13일 동안 단식에 나섰다. 이는 여야가 극한으로 대치하던 상황서 정치협상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됐다.

이후 지방자치제 시행에 관해 최종 합의하는 성과를 얻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중단됐던 지방자치제를 30년 만에 소생한 것이다.

두 인물은 단식투쟁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 불린다. 목적을 달성한 것은 물론 당내 분열을 봉합하고 호소력 있는 모습으로 여론의 지지까지 얻었다는 평이 이어지면서다. 최근 단식투쟁에 나선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뜻을 이어받아 성공의 길을 걸을 수 있을지 이목이 쏠리는 이유다.

지난달 31일 이 대표는 취임 1년 기자회견 도중 돌연 무기한 단식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9월 정기국회 개회를 하루 앞두고 “무능 폭력 정권을 향해 국민 항쟁을 시작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 대표는 “윤석열정권은 헌정질서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국민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며 “사즉생의 각오로 민주주의 파괴를 막아내겠다. 마지막 수단으로 오늘부터 무기한 단식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서는 ▲민생파괴 민주주의 훼손에 대한 대국민 사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반대 입장 표명 및 국제해양재판소 제소 ▲국정 쇄신 및 개각 등 세 가지를 요구했다.


농성장 뚫고 나오는 설왕설래
‘밥심’ 못 버린 정치인들?

뜬금없이 단식을 선언한 만큼 세간이 이목이 쏠렸다. <일요시사> 취재진과 만난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 대표가 단식에 나설지 그 누구도 몰랐다”며 “이야기가 새어나가면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자신과 최측근 등 몇 명만 알도록 입단속을 시킨 것 같다”고 말했다.

입단속에도 불구하고 이 대표 역시 단식 괴담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의 단식에는 세 가지 물건이 주목됐는데 바로 보온병과 숟가락, 그리고 소금 통이다.

이 대표는 단식을 선언한 날부터 국회 정문 앞 텐트서 투쟁을 시작했다. 다만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만 진행되고 나머지 12시간가량은 국회 본청 당 대표실서 휴식을 취하며 단식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은 “출퇴근 단식” “웰빙 단식”이라고 비판했다.

내용물을 파악할 수 없는 보온병을 사용하고 티스푼으로 무언가를 떠먹는 모습을 두고 일부 여당 지지자는 “보온병에 곰탕 같은 게 든 거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 대표는 평소 당뇨를 앓는 것으로 전해졌다. 식습관이 중요한 당뇨 환자가 일주일가량 단식하면서 국회 일정을 모두 소화하는 것을 두고 몰래 영양분을 섭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의식한 듯 이 대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 영상서 기자에게 “마셔보라”며 보온병을 건네기도 했다. 그는 티스푼으로 섭취한 것은 음식이 아닌 소금이라고 해명했다.

민주당 측 역시 오해의 소지를 잠재우기 위해 이 대표가 사용 중인 식품 용기를 공개했다. 용기에는 와인 소금과 마늘 소금이라는 라벨이 붙어있었다. 이번에는 소금의 종류를 두고 또다시 여론에 불씨가 붙었다.

단식 시에는 물과 소금만 섭취하는데 통상적으로는 아무런 맛이 나지 않는 천일염 등을 사용한다. 마늘 소금처럼 맛을 가미한 소금을 섭취해도 되는지를 두고 누리꾼들의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는 것. 게다가 멀리서 보면 소금통이 후추통과 고춧가루통으로 보이는 탓에 “이 대표가 보온병에 든 곰탕에 소금 후추를 넣고 고춧가루까지 뿌려서 야무지게 먹었다”는 소문도 한동안 온라인서 떠돌았다.

맹물일까
곰탕일까

최근에는 이 대표가 영양제를 챙겨 먹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대표는 단식을 진행한 지 약 일주일 정도 되는 날 텐트에 놓인 탁자 밑에서 약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꺼내더니 손바닥에 덜어내고 뒤를 돌아 입 안에 털어 넣는 장면이 포착된 것이다.

이 대표는 약을 입에 머금은 채 다시 앞으로 돌아 물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어 기침하기도 했다.


해당 의혹에 대해 이 대표 측은 단식 초기엔 변비가 생기는 경우가 많아 변비약을 복용했을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를 두고 여당과 지지자들 측에서는 “변비약이라면 저렇게 뒤돌아서서 몰래 먹을 일이 아니다” “먹은 것도 없는데 나올 게 있느냐”며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이 대표의 단식투쟁이 성공할지는 여론의 공감 정도에 달려 있다. 단식 종료 조건이 뚜렷하지 않은 것을 두고 검찰 조사를 피하기 위한 ‘방탄 단식’이라는 지적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YS·DJ의 단식투쟁은 소수 세력의 정치인으로서 소리낼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거대 야당으로 불리는 이 대표가 단식에 돌입한 것을 두고 국민의 지지를 얻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여당에서는 이 대표의 단식이 등 떠밀리듯 끝날 것으로 예측했다. 이 대표의 강성 지지자들을 칭하는 ‘개딸’(개혁의 딸) 성원에 못 이겨 슬쩍 단식을 중단하거나 구급차를 타고 퇴장하는 것이다. 스스로 그만두지 않는 만큼 본인의 체면은 살리고 건강 악화라는 명분도 댈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단식투쟁에 나선 이들 중 구급차 퇴장으로 유명한 인물이 있다. 바로 자유한국당 황교안 전 대표다. 황 전 대표는 2019년 11월20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유지와 공수처 반대, 선거법 합의 등을 조건으로 단식에 돌입했다.

하지만 당시 제1야당 대표가 단식에 나서야 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 아니었다는 의견이 우세하면서 비판적인 시선도 있었다. 당시 황 전 대표는 단식 8일 차에 의식을 잃고 응급실로 이송됐다. 영하에 가까운 날씨에 몸을 혹사한 만큼 체력적으로 한계에 다다랐던 것이다. 링겔을 맞고 조치를 취하면서 자연스럽게 단식도 중단됐다.


갑자기
맛집 투어?

당시 ‘맞짱 농성’을 하던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하 대진연) 회원과 진보 성향 유튜버는 황 전 대표의 병원 이송 장면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하기도 했다. 현장에 있던 일부는 “황 대표가 구급차 안에서 국밥을 먹고 있다” “김밥을 먹다 급체한 것”이라는 등 비꼬기도 했다.

단식투쟁이 발생할 때마다 크고 작은 설화들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중에서도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단식은 가장 많은 소문이 만들어진 것으로 꼽힌다. 뒤에서 몰래 음식을 먹었다는 주장이 나오거나 일부 커뮤니티 회원들이 조롱식 ‘폭식 투쟁’을 하면서다.

여기에 폭식 투쟁의 배후가 대기업이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파문은 일파만파 커졌다.

2014년 7월 ‘유민이 아빠’로 알려진 김영오씨를 비롯한 유가족 20여명은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하는 데 여야와 함께 가족이 참여하는 ‘3자 협의체’를 구성해달라며 광화문광장 농성에 돌입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특별위원회 구성도 함께 요구했다.

약 한 달이 지난 8월18일 김씨는 취재진 앞에서 앙상해진 갈비뼈와 헐거워진 바지를 보여줬다. 그다음 날인 19일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김씨의 무리한 단식 중단을 촉구하는 동조 단식에 나섰다.

이후 온라인 커뮤니티를 비롯한 각종 SNS에는 문 전 대통령이 단식 중에 감자탕과 커피를 사 먹었다는 글이 우후죽순 올라오기 시작했다. 단식 기간 동안 정치자금 사용내역을 보면 감자탕집을 비롯한 커피전문점, 빵집, 빈대떡 집 등이 기록됐다는 것이다.

당시 국민의당 김유정 대변인은 ‘단식 중에도 식비는 계속 지출한 문재인 후보,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논평을 내고 이같이 주장했다. 김 대변인은 “세월호특별법에 대처하는 민주당의 무능함을 덮기 위한 가짜 단식은 아니었는지 참으로 씁쓸하기만 하다”고 비판했다.

의혹이 커지자 문 전 대통령 측은 해당 비용은 보좌관들이 사용한 내역이라고 해명했다. 동조 단식을 진행하는 문 전 대통령의 상태를 지켜보기 위해 대기 중이던 당직자나 보좌진들이 사용한 경비라는 설명이었다.

현장에 배달된 피자 100판
일베 ‘폭식 투쟁’ 배후는?

문 전 대통령이 동조 단식을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날 무렵, 극우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인 ‘일간베스트’(이하 일베)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발생했다. 단식 중인 유가족들이 효소 음료와 초콜릿바를 몰래 먹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다.

이를 두고 일베를 비롯한 유사한 성향의 커뮤니티 회원들은 광화문광장 앞에서 시민에게 초콜릿바를 나눠주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들은 2014년 8월31일부터 9월7일까지 일주일간 ‘폭식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자유청년연합, 엄마부대, 어버이부대 등 다수의 보수 단체도 동참했다.

가장 대표적인 일례로 유가족 농성장과 100m 남짓 떨어진 곳에서 ‘피자 파티’를 벌인 사건이 있다. 자신을 개인 사업자라고 밝힌 50대 일베 회원 A씨는 직접 피자 100여판을 주문해 회원들에게 나눠줬다. A씨는 “세월호특별법이 통과되면 유가족에게 너무 많은 혜택이 가게 된다”며 “세월호서 죽은 이들은 안타깝지만 이들을 이용하는 불순세력이 분탕을 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는 일베가 폭식 투쟁을 예고하자 성명을 통해 “광화문광장은 누구나 자유롭게 음식물을 먹을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농성장 앞에 취식 공간처럼 ‘일베 회원을 위한 식탁’까지 마련했다.

폭식 투쟁 첫날 농성장에 모인 일베와 커뮤니티 회원들은 피자를 받아 들고 유가족이 마련한 식탁서 음식을 먹었다. 일부러 단식 농성장을 오가며 치킨과 햄버거 등을 먹고 유가족을 배경으로 ‘인증샷’까지 남겼다.

4년 후 폭식 투쟁의 후원자가 대기업이라는 의혹이 일면서 해당 사건은 다시 수면으로 드러났다. 2018년 MBC 시사 프로그램 <탐사기획 스트레이트>(이하 <스트레이트>)가 “삼성과 전국경제인연합(이하 전경련)이 폭식 투쟁을 후원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다.

당시 주최 측은 음식과 주류 등을 구입한 경로에 관해 “후원금으로 마련했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를 두고 <스트레이트>는 2013년 삼성이 자유청년연합에 ‘경제자유화 확산운동 지원’을 명목으로 1500만원을 지원했다고 보도했다.

해당 보도에 따르면 2014년에는 1000만원, 2015년에는 6000만원이 지원됐다. 해당 자금은 전경련을 통해 우회 입금한 것으로 해석했다.

쉰내 나는
밥그릇

단식투쟁에는 절박함이 드러나는 만큼 작은 행동도 확대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투쟁의 의미를 잊은 채 꼬투리 잡기에만 열을 올린다는 주장이 제시됐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이런 현상을 잘 보여주는 게 이 대표의 케이스”라고 말했다. 여야를 떠나서 처음 이 대표가 단식을 시작할 때 어떤 요구를 내걸었는지 기억하는 의원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는 지적이다. 이 관계자는 “단식의 의미가 퇴색될까 우려스럽다”며 “가진 게 없는 자들의 투쟁 수단마저 권력에게 뺏기는 것 같다”고 허탈해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이제 안 먹히는 단식투쟁?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지난 4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단식에 대해 꼬집고 나섰다.

이 대표가 단식으로 인한 건강 악화를 빌미로 검찰 조사에 영향을 줄 것이란 의혹이 나오면서다.

이에 한 장관은 “단식투쟁이 수사나 재판에 영향을 주는 선례가 남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방탄 단식’이 성공한다면 잡범을 비롯한 범죄자들이 소환 통보는 즉시 단식을 하지 않겠냐는 설명이다.

한 장관은 “단식을 하느냐 마느냐,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는 개인 자유의 문제”라면서도 “그게 수사나 재판에 영향을 줘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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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눈 뜨고 당하는’ 임차권등기 말소의 이면

[단독] ‘눈 뜨고 당하는’ 임차권등기 말소의 이면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잘못된 판단이 불러온 후폭풍은 엄청났다. 생전 걸음할 일 없다고 생각했던 경찰서를 드나들었고 송사를 치르느라 법정을 오갔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발이 닳도록 돌아다녔지만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 모든 일은 법원에서 날아온 문서 한 장에서 시작됐다. 어떤 실수는 손쓸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당시에는 실수인지조차 모르고 넘어갔다가 뒤늦게 알아채는 경우도 허다하다. 모든 상황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수습하기 어려운 일도 있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계약이 이뤄진 상태라면 더더욱 원상복구가 쉽지 않다. 김모씨가 처한 상황이 딱 그렇다. 놀라서 해줬다가 사건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7년 7월 김씨는 경기도 광주의 한 빌라에 거주할 목적으로 전세 계약을 맺었다. 계약 기간은 2017년 8월부터 2019년 8월까지 2년, 보증금은 2억200만원으로 했다. 해당 빌라의 등기부등본을 보면 김씨가 전세 계약을 맺은 후 임대인이 바뀌었다. 문제는 새로운 임대인이 계약 기간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김씨에게 전세보증금을 반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씨는 전세 계약 기간 만료 후인 2019년 9월 해당 빌라에 임차권등기를 마쳤다. 임차권등기명령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가 임차주택에 대한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유지하면서 이사할 수 있는 제도다. 엄정숙 법도 종합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임차주택에 거주할 때는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로도 대항력이 발생한다. 하지만 계약 기간이 끝나 퇴거하게 되면 이사하는 곳으로 주소를 옮겨야 하니 임차권등기명령을 통해 대항력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임차권등기명령은 등기부등본에 기재되는 만큼, 강한 대항력을 가진다”고 부연했다. 다시 말해 등기부등본에 임차권등기명령이 기재돼있다는 것은 세입자는 더 이상 그 집에 살지 않지만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상황임을 의미한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김씨가 주택도시보증공사(이하 HUG)에서 운영하는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 상품에 가입해 뒀다는 사실이다.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 상품은 전세 계약이 종료됐을 때 임대인이 임차인에게 돌려줘야 하는 전세보증금을 HUG가 대신 돌려준다는 내용이 골자다. HUG가 임차인에게 먼저 전세보증금을 대위변제한 뒤 임대인에게 구상권을 행사해 청구하는 방식이다. 김씨는 2019년 10월 HUG로부터 전세보증금 전액인 2억200만원을 받았다. 전세 살다 보증금 못 받아 전세보증금 보험으로 구제 이후 김씨는 경기도 안양으로 이사했고 해당 빌라와 관련한 일은 새카맣게 잊고 지냈다. 그는 <일요시사>와 만난 자리에서 “HUG에서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았으니 모든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제 2019년 이후 5년여 동안 해당 빌라와 관련해 김씨에게까지 영향이 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사이 해당 빌라의 주인이 바뀌는 등 소유권 변동이 일어났지만 김씨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던 것. 그러다 지난해 11월 김씨에게 임차권등기명령 취소 신청서가 날아들었다. 김씨는 “법원에서 문서가 송달돼 크게 당황했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려고 문서에 기재된 번호로 연락했더니 7년 전 전세로 살았던 빌라의 집주인이라고 하더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집주인이 임차권등기를 말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지 않으면 소송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며 “갑자기 법원에서 종이가 날아오고 소송을 제기한다는 말에 덜컥 겁을 먹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씨는 임차권등기 말소를 위한 서류를 직접 떼 서울 서초동의 한 법무사 사무실에 가져다줬다고 했다. 그 결과 지난해 11월20일 김씨가 해당 빌라에 걸어놨던 임차권등기가 말소됐다. 해당 빌라에 김씨가 행사할 수 있던 권한이 소멸한 것이다. 동시에 집주인으로서는 등기부등본이 깨끗해지는 효과를 얻게 됐다. 이렇게 되면 세입자를 구하는 일도 수월해진다. 줄줄이 꼬였다 이때 김씨가 간과한 사실은 HUG의 존재였다. 김씨가 해당 빌라의 집주인으로부터 전세보증금을 돌려받고 임차권등기를 말소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보증금을 반환받지 못한 세입자가 돈을 받은 뒤 임차권등기를 말소해주는 게 실제 일반적인 절차다. 이 과정에서도 공인중개사 등 부동산 전문가는 보증금을 돌려받기 전까지 임차권등기를 말소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김씨는 전세보증금을 HUG에서 받았다. HUG 입장에서는 해당 빌라의 집주인에게 2억200만원 즉, 돌려받아야 할 돈이 있는 상황에서 김씨가 임차권등기를 무단으로 말소해버린 것이다. 동시에 김씨가 배당 순위에서 밀리게 되면서 HUG는 대위변제한 보증금을 회수할 방법이 요원해졌다. 여기에 은행, 지자체 등 후순위 채권자들도 있는 상황이다. 김씨 사건을 들여다보고 있는 HUG 경기관리센터(이하 HUG 경기센터)는 “모든 임차인은 HUG에 대위변제를 받으면서 대위변제증서를 작성한다”고 말했다. 실제 김씨가 HUG로부터 전세보증금에 해당하는 돈을 받았을 당시 작성한 대위변제증서에는 ‘본인(김씨)은 HUG가 대위변제금 및 제반 비용을 회수할 때까지 HUG의 동의 없이 주택임차권등기를 말소하지 않겠으며 본인의 주택임차권등기 말소로 인해 HUG에 손해가 발생할 경우 배상할 것을 확약한다’는 문구가 기재돼있다. HUG 경기센터는 “HUG는 대위변제 물건을 경매에 넘겨서 배당을 회수하는데 임차권등기명령을 무단 말소하면 경매에서 배제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HUG에 연락했으면 대신 응소해 임차권등기를 지켰을 텐데 당시 김씨가 연로해 이런 생각을 못한 것 같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낙장불입 그러나… 김씨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집주인이) 내가 전세보증금을 반환받았기 때문에 임차권등기를 말소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 본인(집주인)이 손해를 보고 있다. 임차권등기를 말소하지 않으면 손해배상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나를 속였다”며 “내 입장에서는 전세 사기를 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집주인 말에 속아 임차권등기를 말소해줬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은 김씨가 집주인과 해당 빌라의 채권자들에게 제기한 ‘임차권등기 말소 회복 청구 등’ 소송에서 “피고(집주인)가 원고(김씨)가 주장하는 것처럼 고의적인 기망행위를 했다거나 그로 인해 김씨가 신청 취하 행위 자체에 착오에 빠져 있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김씨의 “속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현재 김씨의 상황은 여의치 않다. HUG 경기센터는 대위변제한 보증금 회수를 위해 일단 김씨의 부동산 등에 가압류를 걸어둔 상태다. 그러면서도 김씨의 상황을 참작하고 손해를 회복하기 위해 ‘임차권등기 무단 말소 무효 소송’을 추진하고 있다. HUG 측 관계자에 따르면 그동안 한번도 진행한 적 없는 소송이라고 한다. “억울하다” 법원 인정 안 해 HUG, 구제 위해 소송 제기 HUG 경기센터는 “그동안 임차권등기가 말소되면 복구할 가능성이 없는 것(낙장불입)으로 보고 임차인 손해배상 청구로 업무를 진행해 왔는데, ‘임차권등기 말소 무효 소송을 통해 원상복구 가능성이 있다’는 법률 자문이 있어 소송을 진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소송이 HUG의 승소로 종결돼 임차권등기가 부활하면 김씨에 대한 구제가 가능하다. 이때 김씨는 소송 실비만 부담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HUG 경기센터가 제기한 소송은 김씨에게 해당 빌라에 걸려 있던 임차권등기를 말소할 권한이 없다는 취지인 것으로 알려졌다. HUG가 김씨에게 전세보증금을 대위변제한 만큼 임차권등기를 말소할 권한도 HUG에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니 김씨의 임차권등기 말소 행위는 무효라는 게 골자다. HUG 경기센터는 “김씨가 임차권등기를 무단 말소하면서 채권 선순위로 올라온 은행, 세무서, 지자체 등이 김씨의 억울함을 헤아려 대승적인 차원에서 응소하지 않길 기대하고 있지만, 이들은 김씨가 별도로 제기했던 소송에 모두 대응한 전력이 있어 HUG가 제기한 소송에도 응대할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판단 중”이라고 밝혔다. 이어 “HUG가 김씨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대신 구제를 위해 소송을 진행하는 것처럼 이들 후순위 채권자들도 집주인의 허위 소송에 안타깝게 속아 임차권등기를 말소한 김씨를 구제하는 방향으로 업무를 진행하기를 바라는 입장”이라고 전해왔다. 실제 김씨가 제기한 ‘임차권등기 말소 회복 청구 등’ 소송에서 은행 한 곳은 대응하지 않았다. 순간 실수 인정될까? 김씨는 집주인과 채권자들을 상대로 한 소송의 항소심을 준비하고 있다. 동시에 HUG와도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법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일이 벌어지고 HUG로부터 연락을 받고 난 뒤에야 상황을 파악했다”며 “재산은 (가압류로) 묶였고 소송비용도 만만찮다. 무엇보다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다. 다른 사람에게는 나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한탄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