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다시 꺼내진 홍범도

여의도에 어슬렁거리는 ‘백두산 호랑이’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독립유공자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 문제가 시끄럽다. 갈등에 이어 역사 왜곡 논란으로 번졌다. 국방부와 육군사관학교가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대통령실이 대못을 박았다. 사실상 ‘홍범도 지우기’에 나서는 모양새다.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두루뭉술한 답변 태도로 일관하던 전하규 대변인의 모습은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삶은 부유하지 않았다. 1868년 평안남도 평양 서문에 위치한 무열사 앞마을의 양반집서 머슴살이하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출생지가 현재 기준 평안남도 양덕군, 자강도 자성군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홍 장군이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머슴살이하던 아버지는 그가 9세 때 세상을 떠났다.

불우한 시절
혼자 성장해

혼자서 10대를 보내야 했던 홍 장군은 자신의 뿌리를 모른 채 다른 양반집에 머슴으로 보내졌다. 10대 중반이었던 1883년 머슴살이를 청산하고 인생을 바꿔보고 싶다는 마음에 평양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상관을 살해하고 탈영했다.

이후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됐다. 신계사에서의 생활은 홍 장군에게 있어서 인생의 전환점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생 교육을 못 받았던 홍 장군은 신계사에서 글을 깨치고 처음으로 한국사를 접했다. 당시 홍 장군이 알았던 인물이 이순신 장군이었다고 한다.

홍 장군이 출가할 때 상좌였던 승려 지담이 수원 사람으로 이순신 가문인 덕수 이씨였다. 환속 이후 신계사를 떠나 오갈 데가 없게 돼 처가가 있는 북청서 아내와 자식을 만나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북청에서는 한동안 제지소서 일했으나 1886년 임금을 체불한 고용주를 말다툼 끝에 살해하고 도주해 강원도 북부 산악지대서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시기까지 10년 동안 평범한 사냥꾼으로 생활했다. 그는 총을 잘 쏘기로 유명했다. 일대 포수들에게 지지를 얻고 ‘포계(砲契)’라는 포수 권익단체를 만들어 대장까지 됐다.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직후 강원도 회양군서 김수협과 의병을 일으켰다. 이유는 일제의 총포기화류 일제 단속법이 발령돼서였다. 사냥을 그만뒀을 때도 ‘이 총으로 짐승이 아닌 왜놈들을 사냥하겠다’는 다짐으로 구국운동을 하는 계기가 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포수 시절에 갈고 닦은 사격술로 일본군과 맞서 싸우게 된 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수십명을 쏴 죽이고 돌아왔다’는 말도 있다. 북상하던 유인석의 의병대와 연계해 일본군과 3차례 전투에 들어갔으나 1896년 이후 을미의병의 기세가 사그라들자 홍 장군 역시 의병을 해체하고 귀향해 다시 산에서 포수 생활을 시작했다.

1905년 대한제국의 을사늑약 체결 시점에는 의병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전후한 시기에 정미의병이 시작되고 일제가 국내 포수들을 대상으로 총포 및 화약류 단속령에 따라 강제 총기 수거령으로 생계까지 막막해지자 함경남도 갑산 일대의 포수들을 모아 다시 궐기했다.

홍 장군은 최대 600~700명으로 생각되는 의병대를 이끌고(대대장) 주로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를 무대로 하는 유격전을 벌였다. 이 시기 일본 헌병대 및 일본 육군 정규부대를 상대로 크고 작은 37회의 전투를 벌였다고 알려져 있다.

1908년 4월 일제에 붙잡힌 아내가 모진 고문으로 옥사한다. 홍 장군의 장남 홍양순도 6월의 함경남도 정평배기 전투서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다. 홍양순은 원래 어머니와 함께 일제의 회유 협박의 대상이었다. 홍양순이 홍 장군에게 “이제 그만 투항하시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홍범도는 그 자리서 아들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면서 “네가 지금 왜놈들 앞잡이가 돼서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러 왔느냐”고 일갈했다고 한다.

평양 양반집 머슴살이…불우하게 태어나
절서 한국사 공부 마치고 나와 독립운동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면서 의병 항쟁 여건은 지속적으로 악화됐다. 이 시기 국내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의 일반적인 조류에 따라 홍 장군 역시 1911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해서 수시로 월경해 접경지대의 친일파 및 일본 군경을 괴롭히는 유격전을 수행했다.

홍 장군이 훗날 공산주의 독립운동 단체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블라디보스토크였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혁명의 저지하기 위해 국제 간섭군이 러시아에 진주(시베리아 내전)할 때 일본군이 연해주에 진주했다. 일본군은 이 기회를 틈타 홍 장군을 포함한 연해주 소재 조선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소탕하려 했다.

이후 함경북도로 진출해 1919년 10월 함경남도 혜산진 일대서의 유격전 성과로 지명도를 높인 그는 1920년 봉오동 일대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이 연합해서 결성한 대한북로군독부 예하 북로 제1군 사령부장(부사령관)으로 선출됐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를 치르고 그로부터 4개월 뒤 청산리 전투에 참여해 활약했다. 청산리 전투의 주도적인 인물로는 김좌진 장군이 있다. 계속된 일본군의 토벌전 및 만주 군벌과의 충돌로 홍 장군을 포함한 독립군 세력은 소련 영내로 탈출하기도 했다.

그 과정서 제국주의에 탄압받던 소수민족과 연대하던 소련의 방침은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곧 홍 장군은 레닌, 트로츠키와 독대해 마우저 권총을 선물받을 정도로 소련 한국계의 거물로 성장하게 된다.

자유시 참변은 소련 측의 무장해제 요구를 수용하자는 홍 장군의 방침을 반대한 사람들의 비극으로 알려져 있다. 일각에선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홍 장군은 자유시 참변에 가담한 사실 자체가 없다는 게 정설이다.

1921년 연해주 및 시베리아로 후퇴한 독립군은 결국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자유시로 이동했으며 이 시기 홍 장군은 그간의 무훈으로 새로 창설된 대한독립군단 부총재가 돼있었다. 하지만 곧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 대한의용군 측 독립군 일부가 목숨을 잃었다.

다만 홍 장군 측 부대는 이미 자유시서 무장해제한 상태였기에 사상자는 없었다.

자유시 참변 이후 포로로 잡힌 대한의용군 독립군에 관한 군사재판서 그는 고려혁명군사법원 재판관의 위원으로 참석하게 된다. 그가 지지한 것은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이 아니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조직한 고려혁명군정의회 주도의 독립군 통합이었다.

자유시 참변서 무장해제당한 쪽도 같은 사회주의 계열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이었고 오히려 상해파가 러시아공산당 극동국의 후원을 받았던 단체다. 애초 1921년 당시 소련은 수립되지도 않았다. 이르쿠츠크파가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후원을 받은 것을 두고 소련공산당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해석되지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중 모스크바와 가까웠던 것은 상해파였다.

제2의 무대
러시아 진출

홍 장군만 이르쿠츠쿠파로 이동한 것도 아니다. 간도서 같이 온 지청천, 안무, 최진동 장군 등도 모두 상해파에 있다가 이르쿠츠쿠파로 이동했다. 이들 모두 독립군 통합의 필요성과 이르쿠츠크파가 보유한 명분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2년 일본의 연해주 간섭군 철수를 조건으로 일본이 요구한 항일무장투쟁 단체의 해산이 이뤄지고 나서, 결국 홍 장군 이하 공산당 측 독립군은 무장을 해제했다. 다른 동료들은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거나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다. 돌아갈 곳도 가족도 없던 홍 장군은 결국 러시아에 남아 제2의 삶을 시작해야만 했다.

1923년 8월 하바롭스크서 홍 장군은 사할린부대 출신 독립운동가 김창수와 김오남에게 자유시 참변으로 동료들을 죽게 한 배신자라는 이유로 불시에 공격을 당해 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홍 장군은 레닌으로부터 받은 권총으로 이들을 사살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레닌의 증명서 덕에 석방됐다고 한다.

홍 장군은 그간의 무훈으로 얻은 인망에 힘입어 1923년 연해주 남부서 한인 콜호즈를 비롯한 지역사회의 지도자가 됐고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이후 연해주의 고려인 지도자 중 1명으로서 지속적으로 활동했으나,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지시한 고려인 강제 이주로 당시 소련 영토였던 카자흐스탄 SSR로 이주했다.

1962년 10월25일 대한민국 정부는 홍 장군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했는데, 현재의 건국훈장 대통령장이다. 1991년 카자흐스탄이 구소련서 독립한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유해 송환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당시 남북한 대사관 간에 외교전이 거세게 일어났다고 한다.

홍 장군의 유해 송환을 남한보다도 북한이 앞서서 추진했다. 이미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북한은 카자흐스탄 정부에 홍 장군의 유해를 북한으로 송환하겠다고 했지만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사회가 나서서 나서서 이를 거부했다.

전 주영북한공사인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뒤 북한은 카자흐스탄에 학교도 세우고 교사들도 파견하며 고려인 예술단도 평양에 초청했으나 전반적인 고려인 사회의 반응은 냉랭했다고 한다.


카자흐스탄 내 고려인 일부는 광복 이후 소련군이 주둔한 북한 지역으로 귀환했고 6·25 전쟁에도 조선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이후 김일성의 독재 권력 구축 과정서 숙청돼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오게 된 이도 적지 않았다.

두 번째 훈장
타당성 검토

앞서 2021년 8월12일 청와대는 카자흐스탄 대통령 토카예프의 방한과 연계해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안장돼있는 홍 장군의 유해를 모셔올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유해 봉환을 위해 국가보훈처장 황기철을 특사로 하는 특사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했다.

이 특사단에는 배우 조진웅도 동행했다. 조진웅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홍보대사로도 활동했다. 그동안 영화 <암살>과 <대장 김창수> 등에 출연하면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숭고한 마음이 커졌다고 한다.

홍 장군의 유해를 송환하는 특사단에 끼게 된 것도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회장이자 특사단의 일원이던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의 제안에 따른 것인데 우 의원이 그를 추천했다.

윤석열정부로 정권이 바뀌자 홍 장군 흉상 이전을 두고 논란이 일게 됐다. 국방부는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 장군의 흉상은 이전을 강행하되 국방부 청사 앞 흉상은 건드리지 않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흉상 이전 문제는 국방부와 육사가 결정할 사안이라는 입장인 대통령실서도 훈장과 관련한 내부 검토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청와대의 강력한 의지가 개입돼 중복 서훈이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 최소한 두 번째 받은 훈장(대한민국장)에 대해서는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다”며 서훈 공적심사위원회를 열어 홍 장군과 여운형 선생이 받은 중복 서훈의 타당성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박 장관은 홍 장군과 여 선생을 ‘유이한’ 중복 서훈 사례라고 밝혔지만, 보훈부 독립유공자 현황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한민국장을 포함해 두 차례 서훈이 이뤄진 사례는 유관순 열사까지 3명이다.

홍 장군은 1962년 독립운동 공적으로 대통령장(건국훈장 2등급)을 받았고, 2021년에는 국민통합과 고려인 민족 정체성 형성을 이유로 대한민국장(건국훈장 1등급)을 받았다. 여 선생은 2005년 독립운동으로 대통령장을, 2008년 해방 후 통일을 위한 노력으로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레닌에게 인정받은 고려인 지도자 ‘공산당 가입’
정권 바뀌자 뒤집힌 평가 국방부 사실관계도 몰라

“동일 공적에 대해 훈장 또는 포장을 거듭 수여하지 않는다”는 상훈법에 어긋나지는 않는다. 이에 견줘 유 열사는 독립운동 공적으로 1962년 독립장(건국훈장 3등급)을 받은 뒤 ‘활동에 비해 서훈의 격이 낮다’는 지적에 따라 동일 사유로 2019년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정작 상훈법의 중복 서훈 잣대에 해당하는 인물은 유 열사지만 이념적 색채가 없다는 점을 고려해 문제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는 당초 지난달 25일 무렵까지만 해도 육사에 있는 홍 장군 흉상만 이전하고 국방부 청사 앞 흉상은 그대로 두는 쪽으로 대략적인 방향을 정했다. 하지만 주말 동안 기류가 바뀌면서 같은 달 28일에는 국방부 앞 흉상에 대해서도 “이전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다가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또다시 존치하는 방향으로 유턴을 한 셈이다.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의 함명 변경 문제 역시 졸속으로 내놨다가 혼선만 노출한 끝에 사실상 백지화되는 분위기다. 박종선 육군사관학교(육사) 총동창회장은 홍 장군이 회개하지 않았다며 종교를 언급했다. 그는 “회개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 또 나라에 끼친 공적이 큰 사람과 적은 사람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며 육사 내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육사 49대 교장을 지낸 박 총동창회장은 지난달 31일 MBC 라디오 <뉴스킹 박지훈입니다>서 “홍범도 장군이 독립운동을 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육사 교정에 설치했던 홍 장군 흉상 철거를 검토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찬반 논란이 가열되자 지난달 29일, 육사 총동창회는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도 빨치산으로 참전했다는 의혹이 있다”며 철거에 찬성한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냈다.

박 총동창회장은 홍범도 장군이 소련군 활동에도 불구하고 과거 박정희정부와 박근혜정부서 훈장을 추서하고, 해군 잠수함 이름에 홍범도함이라는 이름도 붙였다고 보는 이유에 관해 “박정희정부 때는 소련과 수교 전이었기에 공산주의 전력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일각서 제기된 백선엽 흉상 설치 주장에는 찬성 입장을 밝혔다. 박 동창회장은 “회개하는 사람과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도 회개하면 봐주지 않느냐”며 “홍범도 장군은 독립운동은 했지만, 소련군에 입적해 연금을 받다 돌아가신 분이고 전향도 안 했다. 백선엽 장군은 일본군 장군은 했지만, 광복 이후엔 대한민국을 위해 백살 넘도록 헌신하다 돌아가셨다”고 비교했다.

정부 바뀌자
달라진 대우

2018년 홍 장군 흉상 설치 당시엔 총동문회가 반대하지 않았던 이유를 두고 “흉상이 건립될 때엔 동문들이나 총동창회서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은 독립기념관에 갔으면 더 좋겠고, 육사에 두는 것은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본다”며 “(대체할 흉상으로는)역사적으로 이견이 없는 사람들,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사람들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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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여권 3각 권력 재편 시나리오

범여권 3각 권력 재편 시나리오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정청래·조국·김민석 세 사람이 삼각관계로 얽혔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연임을,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자당의 생존을, 김민석 국무총리는 청와대의 명을 받아 권력 싸움에 참전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린다. 세 사람이 만든 새로운 소용돌이가 여의도를 향하고 있다. 이들이 범여권 지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이목이 쏠린다. 여당 대표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그립감이 강해졌다. 지난 3일 대의원·권리당원 1인1표제 도입을 담은 당헌 개정안이 재적 위원 과반의 찬성으로 문턱을 넘은 것이다. 이로써 오는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부터 대의원과 권리당원이 동일한 한 표를 행사하게 된다. 존재감 굳히기 민주당에 따르면 중앙위원 총 590명 중 87.29%인 515명이 투표에 참석했다. 이 중 찬성 312명(60.58%), 반대 203명(39.42%)으로 의결 요건을 충족했다. 이후 정 대표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핵심 공약이자 1호 공약이라고 할 수 있는 1인1표제를, 임기 안에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돼 보람 있게 생각한다”며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고 모든 법의 으뜸은 헌법이다. 헌법에서 명령하고 있는 보통·평등·비밀투표, 1인 1표제는 진작에 민주당에서 시행돼야 마땅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1인1표 시행으로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당내 계파가 해체되는 것이라고 예상한다”며 “10년이 넘게 1인1표제, 당원이 주인이 되는 정당, 당원 주권 시대를 부르짖었는데, 드디어 마침표를 찍게 돼 개인적으로도 무한한 기쁨”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1인1표제가 통과되자 권리당원 사이 지지도가 높은 정 대표의 연임 가능성이 탄력을 받았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지난해 8월 치러진 전당대회서 정 대표는 전국 대의원 투표에선 46.91%로 박찬대 의원(53.09%)에게 열세를 보였으나 권리당원 투표서 66.48%의 득표율을 기록해 박 의원(33.52%)을 앞질렀다. 다만 6대 4라는 투표 결과를 놓고 정치권의 분석이 엇갈렸다. 정족수보다 16명 많은 ‘턱걸이 통과’로 리더십을 굳히기엔 명분이 약하다는 점에서다. 1인1표제 재추진에 제동을 걸던 집단의 반대표가 늘어난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치러진 첫 투표 당시 투표율이 62.58%로 두 달 만에 20%p 올랐지만, 반대표 역시 102표에서 203표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에 민주당 권칠승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1인1표가 갖는 대의엔 다 동의하지만 현재 민주당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당이 갖고 있는 당원 구조의 취약성 때문에 1인1표제하는 게 맞느냐는 것에 대한 회의는 좀 있는 것 같다”며 “후속 정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저는 대의엔 찬성하지만 지금 상태에서 그냥 (1인 1표제를) 적용하면 부작용이 있다”고 설명했다. 정 대표의 두 번째 승부수였던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과의 합당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합당에 반대하는 최고위원들이 정 대표를 정면으로 들이 받으며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독주하는 정청래, 승부수는 던졌는데… “합당 못해” 마주하기도 전 무산 위기 민주당 이언주 최고위원은 “혁신당과의 합당 논란이 벌써부터 차기 대권을 의식한 논의로 번져 걱정”이라며 “‘큰 배를 띄우려면 본류를 타야 한다’면서 마치 민주당을 조국 대표의 대통령 만들기 수단으로 여기는 발언까지 나오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지금은 이재명 대통령의 시간이지 차기 대권주자를 밀어줄 시간이 아니”라며 “야당도 아니고 여소야대도 아니고 과반 의석을 차지한 강력한 집권여당에서 대통령 지지율이 60%에 육박하는데 왜 벌써부터 이런 얘기가 나오는지 괴이하기까지 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강득구 최고위원 역시 “어제(3일)부터 지방선거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됐고 중앙당과 시도당은 후보자 공모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런 시점에서 합당을 밀어붙이면 혼란만 커진다. 공천 기준, 경선 룰이 흔들린다”며 “합당 논의를 당장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정 대표는 전체 당원 여론조사와 토론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겠다며 의견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일련의 과정에 대해 한 정치권 관계자는 “공천권만 손에 넣으면 세력은 알아서 따라붙게 돼있다. 정 대표는 ‘축구 경기에서 1대 3이나 3대 0이나 같다’고 말하면서까지 1인1표제를 밀어붙였다. 당 대표 연임에 선을 긋고 있지만 연임을 통한 공천권 확보를 포석에 뒀다고 해석하지 않을 수가 없다”며 “조 대표를 끌어들여 본격적으로 자기 세를 넓히려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해석했다. 정 대표가 띄운 합당론에 혁신당이 휘말리는 듯한 그림이 됐다. 그동안 혁신당 조국 대표는 민주당과의 합당에 선을 그어왔지만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혔고, 이번 합당 논의 역시 자당을 살리기 위해 민주당의 손을 잡은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세를 불려야 하는 정 대표와 대권주자로서 도움닫기 공간이 필요한 조 대표의 니즈가 맞아 떨어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합당 테이블이 마련되기도 전 민주당 내 집안싸움이 불거지면서 혁신당과의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합당 논의에 촉각을 세우는 사이 이번에는 혁신당이 추진하는 토지공개념을 놓고 이견이 갈렸다. 이언주 최고위원이 토지공개념에 반대 의사를 표하자 조 대표가 “헌법재판소가 합헌이라고 판시한 것. 어이없다”고 맞받아치면서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꼿꼿한 자존심 토지공개념이 난타전으로 번진 이유는 최근 집값 등 부동산을 저격하는 이재명 대통령과의 행보와도 맞물려 있다는 분석이다. 이 최고위원은 “토지공개념은 과거 공산주의 몰락 이전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AI 대전환과 글로벌 자본 유치, 기술 경쟁이 국가의 생존 과제가 된 지금의 시대 현실과는 분명한 괴리가 있고, 시대착오적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어 “대통령이 강력한 부동산 공급 대책을 내놓고 있는데 토지공개념 입법화를 주장하는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주장이 대두되면 대통령의 건강한 개혁 의지마저 희석되고 곡해돼 공격받을 여지가 크다”고 강조했다. 혁신당이 주장하는 토지공개념은 토지의 사유재산권을 전면 인정하되,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그 이용을 제한할 수 있다는 원칙을 골자로 한다. 지난 2일 열린 ‘신토지공개념 입법추진단 출범식 및 토론회’서 혁신당 차규근 의원은 입법을 비판한 여당을 향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틀린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차 의원은 “토지공개념은 토지의 사유재산권을 전면 인정하되,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이용을 제한할 수 있다는 원칙”이라며 “헌법재판소도 1989년 토지거래허가제 사건 판결에서 모든 사람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토지 소유권은 절대적인 권리가 될 수 없으며, 공공복리 증진을 위해 의무와 제약을 수반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고 판시했다”고 설명했다. 이 최고위원의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다. 차 의원은 민주당 강령을 언급하며 “토지 재산권 행사의 합리성을 담보하는 제도적 장치를 구축해 지대 수익으로 인한 경제 왜곡과 불평등을 방지한다고 명시돼있다”며 “현재 시행 중인 토지거래허가제와 개발이익환수제 역시 모두 토지공개념에 기반한 제도”라고 꼬집었다. 혁신당과의 합당 논의가 진행 중인 민주당 일각에서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토지공개념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합당 논의는 불가능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그럼에도 혁신당이 이를 추진하는 이유는 혁신당이 민주당에 흡수 합당되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는 분위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에 혁신당 DNA가 섞이는 게 아닌, 혁신당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민주당과 함께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점에서다. 논의를 띄운 이상 합당을 하든 약속을 파기하든 결과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주판알을 굴렸을 때 합당 가능성이 낮다”는 게 한 여의도 관계자의 전언이다. 로망을 현실로? 이 관계자는 “어떤 방법으로든 조 대표가 민주당과 함께한다면, 차기 당권을 놓고 정 대표와 경쟁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봤다. 이어 “두 사람(정 대표, 조 대표) 모두 대권주자로서 욕심이 있다. 시기가 언제가 됐든 다음 대선을 위해 경쟁하는 사이가 될 것”이라며 “종래에 서로를 집어삼키려는 계파 싸움으로까지 번질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조 대표를 등에 업고 빠른 보폭으로 걷는 정 대표의 시선 끝에는 김민석 국무총리가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김 총리가 “당 대표에 로망이 있다”고 말하면서 8월 전당대회 출마설에 스스로 불을 지핀 것이 화근이다. 여기에 청와대에서까지 김 총리를 차기 당 대표로 세우려 한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정 대표의 셈법이 더욱 빨라졌다는 해석이다. 그동안 김 총리의 대표 도전설은 꾸준히 회자했다. 지난달 23일 국무총리실은 공지를 통해 서울시장 선거 여론조사에서 김 총리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김 총리가 서울시장이 아닌 민주당 당 대표를 노리는 게 아니냐고 봤다. 여기에 김 총리가 한 유튜브를 통해 정 대표와 차기 대표 자리를 놓고 경쟁할 수 있다는 관측에 대해선 “민주당의 당 대표는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로망은 있다”고 말하면서 본격적으로 불씨를 댕겼다. 다만 김 총리는 “세상(일)이 욕심을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안다. 욕망의 정치로 뭔가를 풀려고 하지 않는 편”이라며 조심스럽게 입장을 전했다. 그러던 중 민주당-혁신당 합당 논쟁에 김 총리가 뛰어들면서 당권을 둘러싼 경쟁이 시작됐다는 관측이 다시 나왔다. 김 총리는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총리공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런 시점, 이런 방식으로 진행될 줄은 몰랐다”며 정 대표의 합당 방식을 꼬집었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뿌리 깊은 정당이기에 당원들의 뜻을 묻는 민주적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통합 자체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김 총리는 당 대표 선출 전당대회 출마설과 관련해 “(앞서 대표직에 대해 언급한) 로망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많은 말들을 불러올지는 몰랐다”며 “(당시 대표 출마 여부는 직접적으로 묻지 않기에) 국정에 전념한다고 했고, 오늘 기자간담회 내용을 주의 깊게 보면 굉장히 강력한 국정 전념 의지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앞으로는 서울시장 선거로 본인(김민석)이 할 생각 없는데 서울시장 선거와 관련돼 거론되는 것이 국정 운영에 도움도 안 돼 거론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며 “당과 관련한 부분에 대해서도 제가 대표라는 평소 로망을 이야기한 것이고 또 합당 등 모든 문제들은 당의 질서 속에서 충분히 논의될 것으로 보고 제가 더 이상 현재 당내 문제와 연관돼서 소환되거나 호출되거나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민석 카드’ 청와대가 띄웠다? “당 대표 로망” 한마디에 ‘술렁’ 이후 김 총리는 3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전날 신년 기자간담회를 언급하며 “기자간담회의 핵심은 한층 높은 ‘책임감’으로 국정에 ‘전념’한다는 것이다. 정책 관련한 질문에는 훨씬 적극적으로 답하겠다”며 출마 의지가 없음을 강조했다. 김 총리가 거듭해서 출마설에 선을 긋지만 계속해서 이름이 오르내리자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를 정 대표의 대항마로 김 총리를 띄우기 위한 청와대의 물밑작업으로 봤다. 김 총리는 지난 총선 상황실장을 맡아 합을 맞춰오는 등 이 대통령과 연이 깊은 인물로 이 대통령의 의중인 ‘명심’을 등에 업어 민주당 수석최고위원 자리까지 오르기도 했다. 지난 2024년 민주당 전당대회서 김민석 의원의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했지만, 사전 득표율이 저조했다. 이에 이재명 대표 후보는 첫 지역 순회 이후 김 후보와 함께 차 안에서 유튜브 라이브를 진행하면서 “(김 후보) 왜 이렇게 표가 안 나오느냐”며 “제 선거를 도와주느라 본인 선거(운동)를 못 해 결과가 잘못되면 어쩌나 부담된다”고 언급했다. 이후 민주당 커뮤니티 등에서는 “이재명이 김민석을 낙점했다”는 글이 퍼졌고, 빠르게 순위가 뒤집혀 단숨에 수석최고위원으로 올라섰다. 이처럼 청와대에서 정청래 체제의 힘을 빼기 위해 다시 한번 ‘김민석 카드’를 띄우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청와대가 정 대표를 견제하는 것은 정 대표가 ‘당원 주권 정당’ 등을 명분으로 당을 강하게 쥘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다. 한 여권 관계자는 “정 대표의 행보가 모두 이해는 간다. 명분도 좋다. 문제는 시기가 너무 빨랐던 것”이라며 “이재명정부 출범 극초기부터 갈등이 불거졌다. 청와대 입장에서는 대놓고 발톱을 드러내는 정 대표가 장기간 민주당을 주무르는 게 달갑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집안싸움이 격화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혁신당 역시 합당 논의가 잘 풀리지 않을 경우 조 대표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방선거가 끝나는 대로 정치권의 시선은 8월 민주당 전당대회로 쏠리는 만큼 6월 전 합당 논의가 매듭을 지을지가 최대 관건이다. 숨길 수 없는 불편한 심기 혁신당 황현선 인재영입위원회 부위원장(전 사무총장)은 자신의 SNS를 통해 이 대통령과 김 총리, 정 대표를 모조리 언급하며 현 상황을 직격했다. 황 위원장은 “이 싸움(합당)의 최대 피해자는 이 대통령이다. 언젠가 후계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겠지만 집권 1년도 안 돼 심각한 내분에 직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친K(김민석 국무총리) 세력이 선공을 하고, 선방 맞은 친J(정청래 대표)의 반격도 시작될 것”이라며 “지금은 대통령 눈치보며 권력투쟁을 벌이겠지만 총선에 다다를수록 눈치 보지 않는 싸움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