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다시 꺼내진 홍범도

여의도에 어슬렁거리는 ‘백두산 호랑이’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독립유공자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 문제가 시끄럽다. 갈등에 이어 역사 왜곡 논란으로 번졌다. 국방부와 육군사관학교가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대통령실이 대못을 박았다. 사실상 ‘홍범도 지우기’에 나서는 모양새다.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두루뭉술한 답변 태도로 일관하던 전하규 대변인의 모습은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삶은 부유하지 않았다. 1868년 평안남도 평양 서문에 위치한 무열사 앞마을의 양반집서 머슴살이하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출생지가 현재 기준 평안남도 양덕군, 자강도 자성군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홍 장군이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머슴살이하던 아버지는 그가 9세 때 세상을 떠났다.

불우한 시절
혼자 성장해

혼자서 10대를 보내야 했던 홍 장군은 자신의 뿌리를 모른 채 다른 양반집에 머슴으로 보내졌다. 10대 중반이었던 1883년 머슴살이를 청산하고 인생을 바꿔보고 싶다는 마음에 평양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상관을 살해하고 탈영했다.

이후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됐다. 신계사에서의 생활은 홍 장군에게 있어서 인생의 전환점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생 교육을 못 받았던 홍 장군은 신계사에서 글을 깨치고 처음으로 한국사를 접했다. 당시 홍 장군이 알았던 인물이 이순신 장군이었다고 한다.

홍 장군이 출가할 때 상좌였던 승려 지담이 수원 사람으로 이순신 가문인 덕수 이씨였다. 환속 이후 신계사를 떠나 오갈 데가 없게 돼 처가가 있는 북청서 아내와 자식을 만나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북청에서는 한동안 제지소서 일했으나 1886년 임금을 체불한 고용주를 말다툼 끝에 살해하고 도주해 강원도 북부 산악지대서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시기까지 10년 동안 평범한 사냥꾼으로 생활했다. 그는 총을 잘 쏘기로 유명했다. 일대 포수들에게 지지를 얻고 ‘포계(砲契)’라는 포수 권익단체를 만들어 대장까지 됐다.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직후 강원도 회양군서 김수협과 의병을 일으켰다. 이유는 일제의 총포기화류 일제 단속법이 발령돼서였다. 사냥을 그만뒀을 때도 ‘이 총으로 짐승이 아닌 왜놈들을 사냥하겠다’는 다짐으로 구국운동을 하는 계기가 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포수 시절에 갈고 닦은 사격술로 일본군과 맞서 싸우게 된 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수십명을 쏴 죽이고 돌아왔다’는 말도 있다. 북상하던 유인석의 의병대와 연계해 일본군과 3차례 전투에 들어갔으나 1896년 이후 을미의병의 기세가 사그라들자 홍 장군 역시 의병을 해체하고 귀향해 다시 산에서 포수 생활을 시작했다.

1905년 대한제국의 을사늑약 체결 시점에는 의병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전후한 시기에 정미의병이 시작되고 일제가 국내 포수들을 대상으로 총포 및 화약류 단속령에 따라 강제 총기 수거령으로 생계까지 막막해지자 함경남도 갑산 일대의 포수들을 모아 다시 궐기했다.

홍 장군은 최대 600~700명으로 생각되는 의병대를 이끌고(대대장) 주로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를 무대로 하는 유격전을 벌였다. 이 시기 일본 헌병대 및 일본 육군 정규부대를 상대로 크고 작은 37회의 전투를 벌였다고 알려져 있다.

1908년 4월 일제에 붙잡힌 아내가 모진 고문으로 옥사한다. 홍 장군의 장남 홍양순도 6월의 함경남도 정평배기 전투서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다. 홍양순은 원래 어머니와 함께 일제의 회유 협박의 대상이었다. 홍양순이 홍 장군에게 “이제 그만 투항하시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홍범도는 그 자리서 아들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면서 “네가 지금 왜놈들 앞잡이가 돼서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러 왔느냐”고 일갈했다고 한다.

평양 양반집 머슴살이…불우하게 태어나
절서 한국사 공부 마치고 나와 독립운동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면서 의병 항쟁 여건은 지속적으로 악화됐다. 이 시기 국내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의 일반적인 조류에 따라 홍 장군 역시 1911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해서 수시로 월경해 접경지대의 친일파 및 일본 군경을 괴롭히는 유격전을 수행했다.

홍 장군이 훗날 공산주의 독립운동 단체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블라디보스토크였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혁명의 저지하기 위해 국제 간섭군이 러시아에 진주(시베리아 내전)할 때 일본군이 연해주에 진주했다. 일본군은 이 기회를 틈타 홍 장군을 포함한 연해주 소재 조선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소탕하려 했다.

이후 함경북도로 진출해 1919년 10월 함경남도 혜산진 일대서의 유격전 성과로 지명도를 높인 그는 1920년 봉오동 일대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이 연합해서 결성한 대한북로군독부 예하 북로 제1군 사령부장(부사령관)으로 선출됐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를 치르고 그로부터 4개월 뒤 청산리 전투에 참여해 활약했다. 청산리 전투의 주도적인 인물로는 김좌진 장군이 있다. 계속된 일본군의 토벌전 및 만주 군벌과의 충돌로 홍 장군을 포함한 독립군 세력은 소련 영내로 탈출하기도 했다.

그 과정서 제국주의에 탄압받던 소수민족과 연대하던 소련의 방침은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곧 홍 장군은 레닌, 트로츠키와 독대해 마우저 권총을 선물받을 정도로 소련 한국계의 거물로 성장하게 된다.

자유시 참변은 소련 측의 무장해제 요구를 수용하자는 홍 장군의 방침을 반대한 사람들의 비극으로 알려져 있다. 일각에선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홍 장군은 자유시 참변에 가담한 사실 자체가 없다는 게 정설이다.

1921년 연해주 및 시베리아로 후퇴한 독립군은 결국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자유시로 이동했으며 이 시기 홍 장군은 그간의 무훈으로 새로 창설된 대한독립군단 부총재가 돼있었다. 하지만 곧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 대한의용군 측 독립군 일부가 목숨을 잃었다.

다만 홍 장군 측 부대는 이미 자유시서 무장해제한 상태였기에 사상자는 없었다.

자유시 참변 이후 포로로 잡힌 대한의용군 독립군에 관한 군사재판서 그는 고려혁명군사법원 재판관의 위원으로 참석하게 된다. 그가 지지한 것은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이 아니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조직한 고려혁명군정의회 주도의 독립군 통합이었다.

자유시 참변서 무장해제당한 쪽도 같은 사회주의 계열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이었고 오히려 상해파가 러시아공산당 극동국의 후원을 받았던 단체다. 애초 1921년 당시 소련은 수립되지도 않았다. 이르쿠츠크파가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후원을 받은 것을 두고 소련공산당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해석되지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중 모스크바와 가까웠던 것은 상해파였다.

제2의 무대
러시아 진출

홍 장군만 이르쿠츠쿠파로 이동한 것도 아니다. 간도서 같이 온 지청천, 안무, 최진동 장군 등도 모두 상해파에 있다가 이르쿠츠쿠파로 이동했다. 이들 모두 독립군 통합의 필요성과 이르쿠츠크파가 보유한 명분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2년 일본의 연해주 간섭군 철수를 조건으로 일본이 요구한 항일무장투쟁 단체의 해산이 이뤄지고 나서, 결국 홍 장군 이하 공산당 측 독립군은 무장을 해제했다. 다른 동료들은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거나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다. 돌아갈 곳도 가족도 없던 홍 장군은 결국 러시아에 남아 제2의 삶을 시작해야만 했다.

1923년 8월 하바롭스크서 홍 장군은 사할린부대 출신 독립운동가 김창수와 김오남에게 자유시 참변으로 동료들을 죽게 한 배신자라는 이유로 불시에 공격을 당해 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홍 장군은 레닌으로부터 받은 권총으로 이들을 사살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레닌의 증명서 덕에 석방됐다고 한다.

홍 장군은 그간의 무훈으로 얻은 인망에 힘입어 1923년 연해주 남부서 한인 콜호즈를 비롯한 지역사회의 지도자가 됐고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이후 연해주의 고려인 지도자 중 1명으로서 지속적으로 활동했으나,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지시한 고려인 강제 이주로 당시 소련 영토였던 카자흐스탄 SSR로 이주했다.

1962년 10월25일 대한민국 정부는 홍 장군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했는데, 현재의 건국훈장 대통령장이다. 1991년 카자흐스탄이 구소련서 독립한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유해 송환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당시 남북한 대사관 간에 외교전이 거세게 일어났다고 한다.

홍 장군의 유해 송환을 남한보다도 북한이 앞서서 추진했다. 이미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북한은 카자흐스탄 정부에 홍 장군의 유해를 북한으로 송환하겠다고 했지만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사회가 나서서 나서서 이를 거부했다.

전 주영북한공사인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뒤 북한은 카자흐스탄에 학교도 세우고 교사들도 파견하며 고려인 예술단도 평양에 초청했으나 전반적인 고려인 사회의 반응은 냉랭했다고 한다.

카자흐스탄 내 고려인 일부는 광복 이후 소련군이 주둔한 북한 지역으로 귀환했고 6·25 전쟁에도 조선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이후 김일성의 독재 권력 구축 과정서 숙청돼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오게 된 이도 적지 않았다.

두 번째 훈장
타당성 검토

앞서 2021년 8월12일 청와대는 카자흐스탄 대통령 토카예프의 방한과 연계해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안장돼있는 홍 장군의 유해를 모셔올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유해 봉환을 위해 국가보훈처장 황기철을 특사로 하는 특사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했다.

이 특사단에는 배우 조진웅도 동행했다. 조진웅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홍보대사로도 활동했다. 그동안 영화 <암살>과 <대장 김창수> 등에 출연하면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숭고한 마음이 커졌다고 한다.

홍 장군의 유해를 송환하는 특사단에 끼게 된 것도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회장이자 특사단의 일원이던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의 제안에 따른 것인데 우 의원이 그를 추천했다.

윤석열정부로 정권이 바뀌자 홍 장군 흉상 이전을 두고 논란이 일게 됐다. 국방부는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 장군의 흉상은 이전을 강행하되 국방부 청사 앞 흉상은 건드리지 않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흉상 이전 문제는 국방부와 육사가 결정할 사안이라는 입장인 대통령실서도 훈장과 관련한 내부 검토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청와대의 강력한 의지가 개입돼 중복 서훈이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 최소한 두 번째 받은 훈장(대한민국장)에 대해서는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다”며 서훈 공적심사위원회를 열어 홍 장군과 여운형 선생이 받은 중복 서훈의 타당성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박 장관은 홍 장군과 여 선생을 ‘유이한’ 중복 서훈 사례라고 밝혔지만, 보훈부 독립유공자 현황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한민국장을 포함해 두 차례 서훈이 이뤄진 사례는 유관순 열사까지 3명이다.

홍 장군은 1962년 독립운동 공적으로 대통령장(건국훈장 2등급)을 받았고, 2021년에는 국민통합과 고려인 민족 정체성 형성을 이유로 대한민국장(건국훈장 1등급)을 받았다. 여 선생은 2005년 독립운동으로 대통령장을, 2008년 해방 후 통일을 위한 노력으로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레닌에게 인정받은 고려인 지도자 ‘공산당 가입’
정권 바뀌자 뒤집힌 평가 국방부 사실관계도 몰라

“동일 공적에 대해 훈장 또는 포장을 거듭 수여하지 않는다”는 상훈법에 어긋나지는 않는다. 이에 견줘 유 열사는 독립운동 공적으로 1962년 독립장(건국훈장 3등급)을 받은 뒤 ‘활동에 비해 서훈의 격이 낮다’는 지적에 따라 동일 사유로 2019년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정작 상훈법의 중복 서훈 잣대에 해당하는 인물은 유 열사지만 이념적 색채가 없다는 점을 고려해 문제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는 당초 지난달 25일 무렵까지만 해도 육사에 있는 홍 장군 흉상만 이전하고 국방부 청사 앞 흉상은 그대로 두는 쪽으로 대략적인 방향을 정했다. 하지만 주말 동안 기류가 바뀌면서 같은 달 28일에는 국방부 앞 흉상에 대해서도 “이전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다가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또다시 존치하는 방향으로 유턴을 한 셈이다.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의 함명 변경 문제 역시 졸속으로 내놨다가 혼선만 노출한 끝에 사실상 백지화되는 분위기다. 박종선 육군사관학교(육사) 총동창회장은 홍 장군이 회개하지 않았다며 종교를 언급했다. 그는 “회개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 또 나라에 끼친 공적이 큰 사람과 적은 사람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며 육사 내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육사 49대 교장을 지낸 박 총동창회장은 지난달 31일 MBC 라디오 <뉴스킹 박지훈입니다>서 “홍범도 장군이 독립운동을 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육사 교정에 설치했던 홍 장군 흉상 철거를 검토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찬반 논란이 가열되자 지난달 29일, 육사 총동창회는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도 빨치산으로 참전했다는 의혹이 있다”며 철거에 찬성한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냈다.

박 총동창회장은 홍범도 장군이 소련군 활동에도 불구하고 과거 박정희정부와 박근혜정부서 훈장을 추서하고, 해군 잠수함 이름에 홍범도함이라는 이름도 붙였다고 보는 이유에 관해 “박정희정부 때는 소련과 수교 전이었기에 공산주의 전력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일각서 제기된 백선엽 흉상 설치 주장에는 찬성 입장을 밝혔다. 박 동창회장은 “회개하는 사람과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도 회개하면 봐주지 않느냐”며 “홍범도 장군은 독립운동은 했지만, 소련군에 입적해 연금을 받다 돌아가신 분이고 전향도 안 했다. 백선엽 장군은 일본군 장군은 했지만, 광복 이후엔 대한민국을 위해 백살 넘도록 헌신하다 돌아가셨다”고 비교했다.

정부 바뀌자
달라진 대우

2018년 홍 장군 흉상 설치 당시엔 총동문회가 반대하지 않았던 이유를 두고 “흉상이 건립될 때엔 동문들이나 총동창회서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은 독립기념관에 갔으면 더 좋겠고, 육사에 두는 것은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본다”며 “(대체할 흉상으로는)역사적으로 이견이 없는 사람들,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사람들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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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깊은 늪에 빠진 국민의힘

‘점점’ 더 깊은 늪에 빠진 국민의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지방선거 공천에선 인물난 속에서도 조직표를 놓지 못하는 흔적들이 감지된다. 서울시장 경선 참여자들은 장동혁 대표의 지원 유세에 난감해하고 있다. 조직표에 기반한 정당이 집권하지 못했던 과거 사례들은 국민의힘을 더 깊은 늪으로 몰고 있다. 리얼미터·한국갤럽이 지난달 각각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지지율은 높지만, 국민의힘의 지지율은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리얼미터가 발표한 이 대통령의 지지율은 62.2%로 확인됐다. 이 조사는 지난달 23일부터 27일까지 5일 동안 전국 만 18세 이상 유권자 2513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가면 갈수록 지지율 격차 민주당 지지율은 51.1%로 집계됐고, 국민의힘 지지율은 30.6%로 집계됐다. 이 조사는 지난달 26일부터 27일까지 이틀 동안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두 조사 모두 무선 자동응답 방식을 활용해 무작위 생성 표집틀을 통한 임의 전화걸기 방법으로 실시했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한국갤럽도 비슷한 기간 동안 유사한 조사를 진행했다. 한국갤럽이 발표한 이 대통령 지지율은 65%였다. 정당 지지율은 민주당 46%로 집계됐고, 국민의힘은 19%로 집계됐다. 이 조사는 지난달 24일부터 26일까지 3일 동안 전국 만 18세 이상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두 조사 모두 무작위로 추출된 무선전화 가상번호에 전화 조사원이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이 조사 결과들을 놓고 “민주당과 국민의힘 간 지지율 격차가 상당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는 지방선거에서 언제나 중요한 승부처로 거론되는 서울시장·경기도지사 선거와 관련해 국민의힘이 인물난을 겪고 있는 현 상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민의힘에선 양향자 최고위원·새누리당 함진규 전 의원 등 2명이 경기도지사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민주당에서 김동연 경기도지사·추미애 의원·한준호 의원이 치열한 경쟁을 하는 것과 대비된다. 이 때문에 국민의힘에선 유승민 전 의원에게 지속해서 출마를 권유했다. 국민의힘으로선 “중도 성향 유권자에게도 설득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 유 전 의원이 경기도지사 후보로 적임이란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 전 의원은 “국민의힘 의원들이 지난달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절연을 선언한 이후에도 당의 강경 노선에 큰 변화가 없다”는 인식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난달 27일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만났던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출마 권유에도 “불출마한다는 생각엔 변화가 없다”면서 끝내 거절했다. 그러자 양 최고위원은 같은날 KBS 라디오 <세상의 모든 정보 윤인구입니다>에 출연해 “정당·국가 운영과 공천은 원칙·절차적 정당성 확보가 중요하다”며 “어떤 분이 제게 ‘절대로 떠밀려서 나오는 선거는 하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 확실한 소명 의식을 가진 사람이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이정현 전 공천관리위원장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공천이 마무리되는 대로 당이 필요로 하는 가장 어려운 곳에서 제 역할을 다할 준비를 하겠다”며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곳에서 또 다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썼다. 이는 전남·광주통합특별시장 출마 암시로 해석됐고, “유 전 의원에게도 출마를 간접 압박하는 것”이란 해석도 나왔다. 겹치는 악재에 강경 보수 조직표 의존? 장동혁 지원 유세? 각지 후보들 ‘난색’ 하지만 유 전 의원은 불출마 의사를 바꾸지 않았다. 이 전 위원장은 지난달 31일 “유 전 의원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며 “현재 신청하신 훌륭한 두 분을 포함해 여러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지방선거 공천이 사실상 완료됐다”며 전남·광주통합특별시장 출마를 선언한 후 사퇴했다. 부산에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과 부산시장 후보 경선을 치러야 하는 박형준 부산시장이 손영광 울산대 교수를 공동선대본부장으로 임명했다. 손 교수는 윤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를 주도한 손현보 목사의 아들이다. 이는 박 시장이 직접 지난달 24일 CBS 라디오 <박성태의 뉴스쇼>에 출연해 “손 교수는 역량이 뛰어난 사람이고, 누구의 아들이라고 매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해명해야 할 정도로 큰 논란이 됐다. 박 시장은 국민의힘 내에서 합리적 보수 이미지가 강한 인물로 평가된다. 손 교수 영입에 대해선 “경선을 앞두고, 부산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대형 교회 조직표를 의식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대구시장 후보 경선에서 공천 배제된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에 대해서도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 전 위원장은 지난달 29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진행된 2026 KBO리그 개막전을 방문해 ‘대구시장 예비후보 이진숙’이란 어깨띠를 두르고 시민들에게 인사했다. 이에 대해선 “이 전 위원장이 대구시장 선거에 무소속 출마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반대로 “국민의힘이 이 전 위원장의 공천 자체를 배제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분석도 있다.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은 지난달 24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 전 위원장은 정권의 무도함에 맞선 최전선 투사”라며 “대구시장 후보에 현역 의원이 공천되면, 그 지역구 재보궐선거에 이 전 위원장을 공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전 위원장을 경기도지사 후보로 공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국민의힘 조광한 최고위원은 지난달 26일 기자들을 만나 “이 전 위원장이 경기도지사 후보로도 추천되고 있다”며 “이 전 의원장의 결심 여하에 따라 선택지가 굉장히 다양하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이 전 위원장은 경기도지사 공천 가능성은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이 전 위원장은 지난달 25일 <조선일보>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경기도지사 출마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제 인지도 하나만 달랑 갖고 경기도지사를 하겠다는 건 경기도민에 대한 우롱”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경기일보>는 지난달 27일 ‘국힘, 경기지사가 경선 탈락자 처리장이냐’는 제목의 사설을 공개했다. 이 사설엔 “국민의힘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에 나선 주자는 중량감·연고성 등이 모두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2명”이라며 “급기야 대구시장 탈락자 차출설도 나오는데, 이쯤 되면 경기도민 모욕 아니냐”고 비판했다. 낮은 당 지지율과 공천 과정의 잡음이 이어지면서 급기야 지방선거 출마자들이 장 대표의 지원 유세에도 난감해하는 상황도 이어졌다. 유권자에게 “공개적 절윤 선언과 달리 인적 절연이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 영향이라고 분석되고 있다. 7년 만에 대표 거부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달 27일 SBS 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 출연해 “저도 장 대표를 선거 유세에 모시고 싶다”면서도 “변신한 모습으로 와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했다.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한 국민의힘 박수민 의원도 지난달 26일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해 “장 대표의 지원 유세는 조금 예민한 문제”라며 “시민 눈높이에서 해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선거는 후보가 시민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잘 전하는 시민을 위한 시간”이라며 “장 대표는 노선형 정치인이 됐으므로, 정책 선거 현장이 정치 선거로 비화하면 유불리를 떠나 서울시민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다 논란이 이어지자 지난 1일엔 의견을 바꿔 채널A 라디오 <정치시그널>에 출연해 “저는 국민의힘이 확장해야 한다는 것에 공감대가 확실히 있다고 생각한다”며 “정공법을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주요 선거 후보들이 당 대표의 지원 유세에 난감해하는 것은 지난 2018년 지방선거 당시 주요 후보들이 자유한국당 대표였던 홍준표 전 대구시장의 지원 유세를 거부한 상황을 연상시킨다. 낮은 지지율과 혼란을 거듭하는 국민의힘의 현 상황에 대해선 “이미 예고됐던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국민의힘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 2024년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후 대규모 집회 개최 및 참여 등 강경 보수 행보를 유지했다. 당시 진행됐던 대규모 집회는 손 목사·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담임목사·유튜버 전한길씨 등이 주도했다. 울림이 큰 방에서 나는 소리는 메아리가 돼 돌아온다. 이는 특정 성향·신념이 일치하는 사람들이 모여 비슷한 정보·주장을 계속 접하면서 그 의견이 굳어지는 현상을 비유하는 데 활용된다. 이를 두고 에코 체임버 현상이라고 한다. 보통은 SNS에서 일어나지만, 최근엔 정치권에서도 구조화되고 있다. 정치인의 관점에서 대규모 집회에서 동원한 인파·우호적인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열렬한 지지는 쉽게 눈에 띈다. 선거에선 이게 독이 되는 경우가 많다. 후보의 캠프에선 이를 유권자의 보편적 정서로 착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최근엔 당원투표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당원의 뜻이 공천에 반영되면, 정당의 민주적 구조가 탄탄해진다. 하지만 조직표 동원 경선이 될 위험이 커진단 치명적인 단점도 있다. 당내 강경파·특정 조직의 관성은 중도층·무당층까지 포함하는 전체 민심과 방향이 다른 경우가 많다. 집권은 불가능 후보도 선거를 치르면서 조직표를 움직이는 지역 토착 세력·강경 지지층을 만나는 과정에서 현장 분위기를 착각한다. 설령 당선되더라도 이들의 포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확증 편향 현상은 “누구나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을 본다”던 고대 로마 정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격언이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조직표는 장단점이 명확하게 나뉜다. 일정한 득표를 보장하는 것은 분명한 장점이다. 하지만 득표 이상의 목표 달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전형적인 사례는 일본 공명당이다. 공명당은 창가학회란 종교를 배경으로 두고 있다. 덕분에 공명당은 엄청난 조직력을 동원할 수 있다. 창가학회 회원 1명은 강력한 선거운동원이 된다. 그 1명은 주변 지인 모두에게 공명당 선거운동을 한다고 보면 된다. 정치와 종교의 결합이 흔히 발생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일본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공명당과 연정을 하면서 창가학회·공명당의 조직력을 토대로 많은 정치적 이익을 얻었다. 공명당 후보가 출마하지 않는 지역구에선 그 조직력이 고스란히 자민당 후보의 선거 조직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명당은 종교 기반 정당이기 때문에 그 틀을 벗어나긴 어려웠다. 그래서 공명당이 정치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최대치는 집권당의 연정 파트너였다. 공명당과 손을 잡았다고 무조건 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얻는다고 보긴 어렵다. 이는 지난 2월 진행된 제5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이하 중원선)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제1야당 입헌민주당(이하 입민당)은 자민당과 결별한 공명당과 손잡고 ‘중도개혁연합’이란 선거 연대를 구성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참혹했다. 입민당·공명당은 원래 총 169석을 보유했지만, 선거 결과 49석만 확보하는 대참패를 당했다. 이 중 입민당이 확보한 의석수는 21석에 불과했다. 중도개혁연합이 해체되면 각각 28석을 확보한 공명당·국민민주당이 제1야당 반열에 오를 수 있을 정도의 대참패였다. 조직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민심이란 걸 보여준 선거였다. 경기도지사 후보 인물난…유승민은 거듭 고사 손현보 아들 등장·컷오프 이진숙 못 놓는 이유? 절대로 몰락하지 않는 안정적인 하한선을 보유했지만, 상한선·기대치도 낮은 사례로 일본 공명당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향이 강한 특정 집단을 기반으로 유지되는 정당은 그에 대한 다른 유권자의 거부감 때문에 집권이 불가능하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독일 좌파당 ▲영국 민주연합당 ▲이스라엘의 샤스·유대교 토라 연합 등을 거론할 수 있다. 독일 좌파당은 독일 통일 이후 구동독 지역 사회주의 통합당 후신이 모여 조직됐다. 따라서 구동독 지역의 고령 유권자·옛 공산당 관료·강성 노동계급 등이 핵심 지지층을 이루고 있다. 이런 연유로 구동독 지역에선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전체 민심과 조화를 이루긴 어렵고, 주요 정당의 연정 파트너로 주로 거론된다. 영국 민주연합당은 북아일랜드 강성 개신교·연합주의자 조직에 기반한다. 이들의 강경한 종교 성향은 잉글랜드·스코틀랜드 등의 정서와 많이 멀다. 따라서 이들도 북아일랜드 지역 정당 겸 주요 정당의 연정 파트너로 거론된다. 지난 2017년엔 영국 보수당이 과반 확보에 실패하자 민주당과 신임 공급 협약을 맺고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샤스·유대교 토라 연합은 이스라엘 내 극단적인 유대교 원칙주의자들로서 사회적 민폐라고 거론되는 하레디를 기반으로 구성된 정당이다. 이들은 사회적인 활동보다 경전 공부에 몰두한다. 극단적인 일부 하레디는 19세기 생활 양식을 고집하고, 일체 생산 활동을 하지 않면서 정부 보조금에 의존한다. 이들은 출산율이 높아 이스라엘 재정에 부담을 주지만, 이스라엘 내 유대인 인구 비율 유지를 고려하면, 정부가 이들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는 측면도 있다. 이들은 랍비의 지시에 따라 절대적인 투표 성향을 유지한다. 이스라엘의 보수 정당 리쿠드당은 이들과의 연정을 통해 조직표를 동원한다. 일본 자민당은 원래 다양한 성향의 여러 파벌이 모여 구성된 특성을 역설적으로 정권 유지 비결로 활용했다. 총리를 배출하는 회파만 바뀌어도 국정 기조가 바뀌어 유권자에게 정권교체 체감을 주는 유사 정권교체 효과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2월 중의원 의원 선거 대승은 자민당으로서도 기존과 다른 형태였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기민한 유튜브·SNS 활용 ▲실용적 포퓰리즘으로 통하는 사나에노믹스 등 다카이치 총리의 개인 팬덤이 강력하게 형성된 것이 승리로 연결됐다. 공명당 등 해외 사례 표면적으로는 국민의힘은 이미 지난 2월에 입증된 자민당의 승리 비결을 외면하고, 공명당의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주요 후보들이 당 대표 지원 유세에 신중한 반응을 보이는 것 자체가 국민의힘이 ‘더 깊은 늪’에 들어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일면일 수도 있다. 국민의힘은 늪에서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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