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다시 꺼내진 홍범도

여의도에 어슬렁거리는 ‘백두산 호랑이’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독립유공자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 문제가 시끄럽다. 갈등에 이어 역사 왜곡 논란으로 번졌다. 국방부와 육군사관학교가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대통령실이 대못을 박았다. 사실상 ‘홍범도 지우기’에 나서는 모양새다.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두루뭉술한 답변 태도로 일관하던 전하규 대변인의 모습은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삶은 부유하지 않았다. 1868년 평안남도 평양 서문에 위치한 무열사 앞마을의 양반집서 머슴살이하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출생지가 현재 기준 평안남도 양덕군, 자강도 자성군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홍 장군이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머슴살이하던 아버지는 그가 9세 때 세상을 떠났다.

불우한 시절
혼자 성장해

혼자서 10대를 보내야 했던 홍 장군은 자신의 뿌리를 모른 채 다른 양반집에 머슴으로 보내졌다. 10대 중반이었던 1883년 머슴살이를 청산하고 인생을 바꿔보고 싶다는 마음에 평양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상관을 살해하고 탈영했다.

이후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됐다. 신계사에서의 생활은 홍 장군에게 있어서 인생의 전환점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생 교육을 못 받았던 홍 장군은 신계사에서 글을 깨치고 처음으로 한국사를 접했다. 당시 홍 장군이 알았던 인물이 이순신 장군이었다고 한다.

홍 장군이 출가할 때 상좌였던 승려 지담이 수원 사람으로 이순신 가문인 덕수 이씨였다. 환속 이후 신계사를 떠나 오갈 데가 없게 돼 처가가 있는 북청서 아내와 자식을 만나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북청에서는 한동안 제지소서 일했으나 1886년 임금을 체불한 고용주를 말다툼 끝에 살해하고 도주해 강원도 북부 산악지대서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시기까지 10년 동안 평범한 사냥꾼으로 생활했다. 그는 총을 잘 쏘기로 유명했다. 일대 포수들에게 지지를 얻고 ‘포계(砲契)’라는 포수 권익단체를 만들어 대장까지 됐다.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직후 강원도 회양군서 김수협과 의병을 일으켰다. 이유는 일제의 총포기화류 일제 단속법이 발령돼서였다. 사냥을 그만뒀을 때도 ‘이 총으로 짐승이 아닌 왜놈들을 사냥하겠다’는 다짐으로 구국운동을 하는 계기가 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포수 시절에 갈고 닦은 사격술로 일본군과 맞서 싸우게 된 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수십명을 쏴 죽이고 돌아왔다’는 말도 있다. 북상하던 유인석의 의병대와 연계해 일본군과 3차례 전투에 들어갔으나 1896년 이후 을미의병의 기세가 사그라들자 홍 장군 역시 의병을 해체하고 귀향해 다시 산에서 포수 생활을 시작했다.

1905년 대한제국의 을사늑약 체결 시점에는 의병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전후한 시기에 정미의병이 시작되고 일제가 국내 포수들을 대상으로 총포 및 화약류 단속령에 따라 강제 총기 수거령으로 생계까지 막막해지자 함경남도 갑산 일대의 포수들을 모아 다시 궐기했다.

홍 장군은 최대 600~700명으로 생각되는 의병대를 이끌고(대대장) 주로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를 무대로 하는 유격전을 벌였다. 이 시기 일본 헌병대 및 일본 육군 정규부대를 상대로 크고 작은 37회의 전투를 벌였다고 알려져 있다.

1908년 4월 일제에 붙잡힌 아내가 모진 고문으로 옥사한다. 홍 장군의 장남 홍양순도 6월의 함경남도 정평배기 전투서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다. 홍양순은 원래 어머니와 함께 일제의 회유 협박의 대상이었다. 홍양순이 홍 장군에게 “이제 그만 투항하시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홍범도는 그 자리서 아들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면서 “네가 지금 왜놈들 앞잡이가 돼서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러 왔느냐”고 일갈했다고 한다.

평양 양반집 머슴살이…불우하게 태어나
절서 한국사 공부 마치고 나와 독립운동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면서 의병 항쟁 여건은 지속적으로 악화됐다. 이 시기 국내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의 일반적인 조류에 따라 홍 장군 역시 1911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해서 수시로 월경해 접경지대의 친일파 및 일본 군경을 괴롭히는 유격전을 수행했다.

홍 장군이 훗날 공산주의 독립운동 단체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블라디보스토크였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혁명의 저지하기 위해 국제 간섭군이 러시아에 진주(시베리아 내전)할 때 일본군이 연해주에 진주했다. 일본군은 이 기회를 틈타 홍 장군을 포함한 연해주 소재 조선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소탕하려 했다.

이후 함경북도로 진출해 1919년 10월 함경남도 혜산진 일대서의 유격전 성과로 지명도를 높인 그는 1920년 봉오동 일대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이 연합해서 결성한 대한북로군독부 예하 북로 제1군 사령부장(부사령관)으로 선출됐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를 치르고 그로부터 4개월 뒤 청산리 전투에 참여해 활약했다. 청산리 전투의 주도적인 인물로는 김좌진 장군이 있다. 계속된 일본군의 토벌전 및 만주 군벌과의 충돌로 홍 장군을 포함한 독립군 세력은 소련 영내로 탈출하기도 했다.

그 과정서 제국주의에 탄압받던 소수민족과 연대하던 소련의 방침은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곧 홍 장군은 레닌, 트로츠키와 독대해 마우저 권총을 선물받을 정도로 소련 한국계의 거물로 성장하게 된다.

자유시 참변은 소련 측의 무장해제 요구를 수용하자는 홍 장군의 방침을 반대한 사람들의 비극으로 알려져 있다. 일각에선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홍 장군은 자유시 참변에 가담한 사실 자체가 없다는 게 정설이다.

1921년 연해주 및 시베리아로 후퇴한 독립군은 결국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자유시로 이동했으며 이 시기 홍 장군은 그간의 무훈으로 새로 창설된 대한독립군단 부총재가 돼있었다. 하지만 곧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 대한의용군 측 독립군 일부가 목숨을 잃었다.

다만 홍 장군 측 부대는 이미 자유시서 무장해제한 상태였기에 사상자는 없었다.

자유시 참변 이후 포로로 잡힌 대한의용군 독립군에 관한 군사재판서 그는 고려혁명군사법원 재판관의 위원으로 참석하게 된다. 그가 지지한 것은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이 아니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조직한 고려혁명군정의회 주도의 독립군 통합이었다.

자유시 참변서 무장해제당한 쪽도 같은 사회주의 계열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이었고 오히려 상해파가 러시아공산당 극동국의 후원을 받았던 단체다. 애초 1921년 당시 소련은 수립되지도 않았다. 이르쿠츠크파가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후원을 받은 것을 두고 소련공산당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해석되지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중 모스크바와 가까웠던 것은 상해파였다.

제2의 무대
러시아 진출

홍 장군만 이르쿠츠쿠파로 이동한 것도 아니다. 간도서 같이 온 지청천, 안무, 최진동 장군 등도 모두 상해파에 있다가 이르쿠츠쿠파로 이동했다. 이들 모두 독립군 통합의 필요성과 이르쿠츠크파가 보유한 명분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2년 일본의 연해주 간섭군 철수를 조건으로 일본이 요구한 항일무장투쟁 단체의 해산이 이뤄지고 나서, 결국 홍 장군 이하 공산당 측 독립군은 무장을 해제했다. 다른 동료들은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거나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다. 돌아갈 곳도 가족도 없던 홍 장군은 결국 러시아에 남아 제2의 삶을 시작해야만 했다.

1923년 8월 하바롭스크서 홍 장군은 사할린부대 출신 독립운동가 김창수와 김오남에게 자유시 참변으로 동료들을 죽게 한 배신자라는 이유로 불시에 공격을 당해 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홍 장군은 레닌으로부터 받은 권총으로 이들을 사살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레닌의 증명서 덕에 석방됐다고 한다.

홍 장군은 그간의 무훈으로 얻은 인망에 힘입어 1923년 연해주 남부서 한인 콜호즈를 비롯한 지역사회의 지도자가 됐고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이후 연해주의 고려인 지도자 중 1명으로서 지속적으로 활동했으나,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지시한 고려인 강제 이주로 당시 소련 영토였던 카자흐스탄 SSR로 이주했다.

1962년 10월25일 대한민국 정부는 홍 장군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했는데, 현재의 건국훈장 대통령장이다. 1991년 카자흐스탄이 구소련서 독립한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유해 송환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당시 남북한 대사관 간에 외교전이 거세게 일어났다고 한다.

홍 장군의 유해 송환을 남한보다도 북한이 앞서서 추진했다. 이미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북한은 카자흐스탄 정부에 홍 장군의 유해를 북한으로 송환하겠다고 했지만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사회가 나서서 나서서 이를 거부했다.

전 주영북한공사인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뒤 북한은 카자흐스탄에 학교도 세우고 교사들도 파견하며 고려인 예술단도 평양에 초청했으나 전반적인 고려인 사회의 반응은 냉랭했다고 한다.


카자흐스탄 내 고려인 일부는 광복 이후 소련군이 주둔한 북한 지역으로 귀환했고 6·25 전쟁에도 조선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이후 김일성의 독재 권력 구축 과정서 숙청돼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오게 된 이도 적지 않았다.

두 번째 훈장
타당성 검토

앞서 2021년 8월12일 청와대는 카자흐스탄 대통령 토카예프의 방한과 연계해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안장돼있는 홍 장군의 유해를 모셔올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유해 봉환을 위해 국가보훈처장 황기철을 특사로 하는 특사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했다.

이 특사단에는 배우 조진웅도 동행했다. 조진웅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홍보대사로도 활동했다. 그동안 영화 <암살>과 <대장 김창수> 등에 출연하면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숭고한 마음이 커졌다고 한다.

홍 장군의 유해를 송환하는 특사단에 끼게 된 것도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회장이자 특사단의 일원이던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의 제안에 따른 것인데 우 의원이 그를 추천했다.

윤석열정부로 정권이 바뀌자 홍 장군 흉상 이전을 두고 논란이 일게 됐다. 국방부는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 장군의 흉상은 이전을 강행하되 국방부 청사 앞 흉상은 건드리지 않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흉상 이전 문제는 국방부와 육사가 결정할 사안이라는 입장인 대통령실서도 훈장과 관련한 내부 검토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청와대의 강력한 의지가 개입돼 중복 서훈이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 최소한 두 번째 받은 훈장(대한민국장)에 대해서는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다”며 서훈 공적심사위원회를 열어 홍 장군과 여운형 선생이 받은 중복 서훈의 타당성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박 장관은 홍 장군과 여 선생을 ‘유이한’ 중복 서훈 사례라고 밝혔지만, 보훈부 독립유공자 현황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한민국장을 포함해 두 차례 서훈이 이뤄진 사례는 유관순 열사까지 3명이다.

홍 장군은 1962년 독립운동 공적으로 대통령장(건국훈장 2등급)을 받았고, 2021년에는 국민통합과 고려인 민족 정체성 형성을 이유로 대한민국장(건국훈장 1등급)을 받았다. 여 선생은 2005년 독립운동으로 대통령장을, 2008년 해방 후 통일을 위한 노력으로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레닌에게 인정받은 고려인 지도자 ‘공산당 가입’
정권 바뀌자 뒤집힌 평가 국방부 사실관계도 몰라

“동일 공적에 대해 훈장 또는 포장을 거듭 수여하지 않는다”는 상훈법에 어긋나지는 않는다. 이에 견줘 유 열사는 독립운동 공적으로 1962년 독립장(건국훈장 3등급)을 받은 뒤 ‘활동에 비해 서훈의 격이 낮다’는 지적에 따라 동일 사유로 2019년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정작 상훈법의 중복 서훈 잣대에 해당하는 인물은 유 열사지만 이념적 색채가 없다는 점을 고려해 문제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는 당초 지난달 25일 무렵까지만 해도 육사에 있는 홍 장군 흉상만 이전하고 국방부 청사 앞 흉상은 그대로 두는 쪽으로 대략적인 방향을 정했다. 하지만 주말 동안 기류가 바뀌면서 같은 달 28일에는 국방부 앞 흉상에 대해서도 “이전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다가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또다시 존치하는 방향으로 유턴을 한 셈이다.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의 함명 변경 문제 역시 졸속으로 내놨다가 혼선만 노출한 끝에 사실상 백지화되는 분위기다. 박종선 육군사관학교(육사) 총동창회장은 홍 장군이 회개하지 않았다며 종교를 언급했다. 그는 “회개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 또 나라에 끼친 공적이 큰 사람과 적은 사람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며 육사 내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육사 49대 교장을 지낸 박 총동창회장은 지난달 31일 MBC 라디오 <뉴스킹 박지훈입니다>서 “홍범도 장군이 독립운동을 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육사 교정에 설치했던 홍 장군 흉상 철거를 검토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찬반 논란이 가열되자 지난달 29일, 육사 총동창회는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도 빨치산으로 참전했다는 의혹이 있다”며 철거에 찬성한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냈다.

박 총동창회장은 홍범도 장군이 소련군 활동에도 불구하고 과거 박정희정부와 박근혜정부서 훈장을 추서하고, 해군 잠수함 이름에 홍범도함이라는 이름도 붙였다고 보는 이유에 관해 “박정희정부 때는 소련과 수교 전이었기에 공산주의 전력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일각서 제기된 백선엽 흉상 설치 주장에는 찬성 입장을 밝혔다. 박 동창회장은 “회개하는 사람과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도 회개하면 봐주지 않느냐”며 “홍범도 장군은 독립운동은 했지만, 소련군에 입적해 연금을 받다 돌아가신 분이고 전향도 안 했다. 백선엽 장군은 일본군 장군은 했지만, 광복 이후엔 대한민국을 위해 백살 넘도록 헌신하다 돌아가셨다”고 비교했다.

정부 바뀌자
달라진 대우

2018년 홍 장군 흉상 설치 당시엔 총동문회가 반대하지 않았던 이유를 두고 “흉상이 건립될 때엔 동문들이나 총동창회서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은 독립기념관에 갔으면 더 좋겠고, 육사에 두는 것은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본다”며 “(대체할 흉상으로는)역사적으로 이견이 없는 사람들,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사람들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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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회 문턱을 넘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이 사법부를 강타했다. 검찰은 1999년 특별검사제 도입 이후 권한을 조금씩 잃다가 올해 해체가 결정됐다. 검찰이 26년 전 느끼다가 현실이 된 불안을 이젠 사법부가 느낄 차례일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범여권이 지난 24일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내란 사건만 맡는 전담재판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취지의 예규 제정 방침을 밝혔다. 특별재판부 영장전담 법관 하지만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같은 날 논평을 통해 ‘24일 처리 방침’을 밝혔다. 이날 법안 처리는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 박 대변인은 지난 21일 오전 기자 간담회에서도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예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이 원래 처리하려던 법안은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법’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됐다면, 12·3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맡을 특별재판부가 설치되고, 영장 심사를 맡을 특별영장 전담 법관이 따로 배정됐을 것이다. 이들은 국회·판사회의·대한변호사협회가 3명씩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규모의 추천위원회의 2배수 추천과 대법원장의 임명을 거칠 예정이었다. 아울러 상고심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대법관은 모두 제척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에 대해선 각계에서 위헌 논란을 제기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지난 16일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명칭도 특별재판부에서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 전담재판부 후보추천위원회는 법무부 장관·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 외부 인사를 제외한 후 법관으로만 구성될 예정이다. 추천위원회에 들어갈 법관 중엔 각급 판사회의·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포함된다. 전담재판부에 소속될 법관은 추천위원회·대법관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등 12·3 비상계엄 주요 연루자들은 이미 형사재판 제1심을 받고 있다. 전담재판부는 항소심부터 맡을 예정이다. 대법원은 민주당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대법관 행정회의를 열어 ‘국가적 중요 사건에 대한 전담재판부 설치 및 심리 절차에 관한 예규’를 제정하기로 했다. 여기엔 “형법상 내란·외환죄와 군형법상 반란죄 사건을 전담해 집중 심리하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대법원이 규정하는 전담재판부는 무작위 배당을 거쳐 사건을 배당받을 재판부가 지정되는 방식이다. 전담재판부로 지정된 재판부가 원래 맡던 재판은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된다. 예규엔 “해당 재판부는 이후 내란·외환과 관련 없는 새로운 사건은 맡지 않는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하지만 민주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박 대변인은 “사법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늦게 했느냐”며 “왜 그동안 국민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국회의 입법권을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맞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란 전담재판부 신설이 갖는 ‘진짜 함의’ 대법원 예규 제정…반격 혹은 타협안 제시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 중 “대법원이 헐레벌떡 자체 안이라고 내놨다”며 “더 일찍 해야 하지 않았느냐. ‘조희대 사법부’답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국내 헌정사에서 특별재판부는 단 2회만 설치됐다. 제헌헌법 부칙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했다. 반민특위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설치됐다. 특별검찰부는 검찰총장 등 9명으로 구성됐고,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법조인 6명 ▲사회 저명 인사 5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국회가 선출했다. 두 번째 특별재판부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개정된 제4차 개정 헌법을 근거로 설치됐다. 당시 개정 헌법엔 “3·15 부정선거 및 4·19 혁명 관련자들과 관련된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취지의 부칙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설치된 특별재판부는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정을 거쳐 설치됐다. 민주당조차 ‘특별재판부’를 ‘전담재판부’로 수위를 낮춰 처리했다는 이유로 내란 특별재판부에 대해 불거진 위헌 시비를 거론한다. 법원은 ‘무작위 전산 재판 배당’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재판부에 특정 재판을 배당한다”는 취지의 특별재판부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위헌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관련 합헌·위헌 여부를 가린 적도 없다. 하지만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 배당의 무작위성은 재판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압력·영향력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해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원칙이다. 이는 위헌 시비가 불거진 핵심 이유였다. 그래서 과거엔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기 전에 개헌 과정 중 헌법 부칙에 그 근거를 규정했다. 헌법 부칙은 헌법 본문과 똑같은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위헌 시비가 불거질 일은 없었다. 피해 가는 위헌 시비 하지만 위헌 시비를 피하려고 제시한 ‘내란 전담재판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기존 재판부 배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사법부는 이미 무작위 배당의 예외를 운용하고 있다. ▲특허법원 ▲서울행정법원 ▲지역별 가정법원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법원이 따로 설치돼있는 것도 무작위 배당의 예외다. 또 각급 법원은 이미 지식 재산·환경·의료 등 특정 전문 분야를 전담할 재판부를 분류한다. 법원장 재량에 따라, 재판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특정 사건은 ‘적시 처리 필요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특정 재판부에 배당해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추진한다. 기소된 사건이 이미 진행 중인 재판과 사실 관계·쟁점·피고인이 같으면,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에 배당한다. 물론 민주당이 거둘 수 있는 실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는 민주당이 ‘특별’을 ‘전담’으로 바꿔가면서도 서둘러 개정안을 추진하는 이유를 분명히 짚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부와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재판부는 내란·외환 사건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침대 축구하듯 질질 끌었다”며 “조 대법원장은 경고·조치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보다 못한 입법부가 나서기 전에 사법부가 진작 내란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면, 지난 1년 동안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이 분통 터지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의 주장 중 핵심 단어는 ‘조희대’와 ‘지귀연’이다. 민주당이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할 당시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지난 9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 부장판사를 지칭해 “재판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인사들을 전보·징계한다면, 굳이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들기 위한 입법 조치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 도중 “조희대 사법부는 특검 수사 훼방꾼이 됐다”며 “조 대법원장이 지휘하는 대법원이 지난해 12월3일 내란에 동조한 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조 대법원장의 권한 일부를 사실상 박탈하고, 지 부장판사를 내란 관련 재판에서 손 떼게 할 수 있다면, 민주당은 상당한 실익을 거둘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판부 배당에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힘 실어준 진짜 이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이후인 지난 2018년 4월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갖고 설치됐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이를 일컬어 “지나치게 민주당에 친화적”이라고 비판한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설치 직후 첫 의장으로 선출됐던 최기상 당시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지난 9월 민주당이 주장한 의제 ‘대법관 증원론’을 포함한 상고심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어 “사법부는 대법관 증원안을 경청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공개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일컬어 “민주당에 힘을 설어주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한 게 아니냐”는 비판 목소리도 제기됐다. 대법원의 이재명 대통령에 대판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지난 9월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조 대법원장 사퇴 권고 등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각에선 “대법원의 예규 제정은 반격”이라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는 “내란 전담재판부를 줄곧 반대하다가 갑자기 예규 제정을 밝힌 의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당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외에도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꿀 만한 사법개혁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대해선 “민주당의 공세를 적절한 선에서 수용해 더 큰 공세에 대비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특별재판부’가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사법개혁안 통과 시도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으로선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꾸려는 민주당의 시도를 보면서 검찰이 해체되는 과정을 되새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민주당이 주도하는 사법개혁안 자체가 사실상 ‘기존 법원 해체’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조금씩 권한 잃다 해체 결정 검 종착역은 헌재 최고법원 등극? 민주당 등 범여권이 검찰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분리해 완수했던 검찰 해체에 대해선 “헌법은 검찰 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검찰총장의 존재를 규정했다”면서 위헌 논란을 제기하는 반대 측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범여권은 이를 강행했다. 큰 틀에서 보면, 검찰은 ▲특별검사제도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분리 등 과정을 거쳐 해체됐다. 최초의 특별검사(이하 특검)는 지난 1999년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에 대한 옷 로비 의혹과 한국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 진행됐던 최병모 특검이었다. 특검이 성립됐던 배경은 “검찰이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었다. 아울러 당시 국회 구도는 여소야대였다. 한나라당은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흐름을 타고 강하게 밀어붙여 특검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후 현재까지 개별 특검법은 총 16개가 통과됐고, 상설 특검은 6회 추진됐다. 검찰로서는 1999년 최병모 특검 설치가 수사권·기소권 독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총 22회의 특검이 성립됐다는 것은 검찰에 대한 각계의 불신을 상징하는 중요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검찰을 노리는 다음 단계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었다. 최초의 검경 수사권 조정은 지난 2011년 진행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법경찰관이 검사의 수사 지휘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지휘 건의 제도 신설 등의 내용이 담긴 안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해 의결했다. 지난 2016년엔 ▲진경준 게이트 ▲정운호 게이트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스폰서 의혹 ▲최순실 게이트 등이 연이어 발생해 검찰의 신뢰도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장기간 논의된 검경 수사권 논의로 연결된다. 공수처도 설치됐다. 민주당 집권 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강하게 기억하는 지지자들의 비원을 외면하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검찰은 서서히 권한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지난 9월에 이르러 검찰은 내년부터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으로 갈라질 운명에 처했다. 특히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로 옮겨진다. 서서히 권한을 빼앗기다가 끝내 해체를 앞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민주당 등 범여권은 ▲법원행정처 폐지 ▲법 왜곡죄 도입 ▲대법관 증원 ▲재판소원 도입 등 사법개혁안을 시도하고 있다. 범여권이 사법개혁안을 모두 통과시킨다면, 사법부로서는 “검찰에 이어 사법부도 한순간에 와해된다”고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순간에 와해된다 법원행정처가 없어지면 대법원장의 권한이 줄어든다. 법 왜곡죄가 도입되면, 판사의 재판도 법적 처벌 범위 안에 포함될 위험에 노출된다. 대법관이 늘어나 대법관의 권위·희소 가치가 줄어든 후 재판은 헌법소원 제기 범위 안에 포함된다. 최종 종착지는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을 제친 후 최상위 사법기관으로 규정될 순간임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 24일은 사법부가 느낄 법한 공포가 처음 피부에 와닿은 날이었을 수도 있다. 새해엔 민주당과 사법부의 전쟁이 더욱 거칠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