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4월 정신과 5월 정신

  • 김삼기 시인·칼럼니스트
  • 등록 2023.04.17 17:09:45
  • 호수 1423호
  • 댓글 10개

3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정치는 4·19 혁명을 지지하는 진보 세력과 5·16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보수 세력이 각각 4월 정신과 5월 정신으로 대립각을 세워왔다. 그러나 30년 동안 정치적 역동기를 거쳐 지금은 진보 세력이 지지하는 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이 4월 정신과 5월 정신을 대표하고 있다.

4·19 혁명의 경우 군사정권이 5·16 군사정변의 정당성을 부각하기 위해 5·16은 ‘혁명’으로 명명하고, 4·19는 ‘의거’로 명명해 4·19를 폄하했지만, 문민정부 들어 제1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제2공화국을 탄생시킨 4·19의 의미와 가치를 부활시켜 ‘혁명’으로 바꾸면서 4월 정신으로 복귀됐다.

5월 정신을 상징하는 5·18 민주화운동도 초기에는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간주돼 5·18 광주소요사태로 불렸으나, 시대가 변하고 진실이 밝혀지면서 쿠데타 세력에 대한 최고의 저항권 행사로 인정돼 현재는 5·18 민주화운동으로 불리고 있다.

한편 5·16 군사정변은 무능한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 장악에 성공했다는 이유로 5·16 혁명으로 불렸지만, 결국은 군사 쿠데타로 밝혀져 5·16 군사혁명이라는 명칭을 거쳐 지금은 5·16 군사정변으로 불리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30년 전 4·19 의거는 4·19 혁명으로 바뀌면서 현재도 4월 정신을 상징하고 있지만, 5·16 혁명은 5·16 군사정변으로 바뀌면서 5월 정신에서 빠졌고, 5·18 민주화운동이 5월 정신을 대신하게 됐다.

최근 보수 세력이 4월과 5월만 되면 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을 폄하하는 발언을 가끔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과거 보수 세력이 지지했던 5·16 군사정변은 5월 정신에서 사라지고 진보 세력이 지지하는 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만이 4월 정신과 5월 정신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보수 논객의 좌장격인 국민의힘 김재원 수석최고위원이 “5·18 민주화운동의 헌법 수록을 반대한다”는 취지로 말했다가 논란이 일자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고 사과했지만, 그래도 김 최고위원이 5·18 민주화운동을 폄하한 건 사실이고, 5월 정신을 깎아내린 것도 사실이다.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황교안 전 대표도 2009년 저술한 집회시위법 해설서에서 4·19 혁명을 ‘혼란’으로, 5·16 군사 쿠데타를 ‘혁명’으로 표현한 적이 있는데, 이는 4·19 혁명이 상징하는 4월 정신을 폄하한 것이다. 황 전 대표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폄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4월과 5월은 보수 세력이 진보 세력의 기운에 눌려 힘을 못 쓰는 계절 같다. 그래서 보수 세력이 4월과 5월에 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가끔 안티 발언을 하는 건 이해가 된다. 그러나 궁색하다는 생각이 더 드는 이유는 뭘까? 

오는 19일 4·19 혁명 63주년 기념식에서 “새로운 희망과 도전으로 4·19 혁명 정신을 계승시켜 나가자”는 윤석열 대통령의 메시지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을 폄하하고 5·16 군사정변을 정당한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김광동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을 위원장으로 임명한 윤 대통령의 메시지가 과연 우리 국민에게 얼마나 진정성 있게 들릴지 의문이다.

필자의 생각은 이번 4·19 혁명 기념식이 진보 정부 때보다 더 진지하게 거행돼야 하고, 특히 4·19 혁명이 대구 2·28 민주운동, 대전 3·8 민주의거, 마산 3·15 의거를 거쳐 일어났다는 점을 부각해 4·19 혁명의 의미를 오히려 더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4·19 혁명 과정 전체를 살펴보면, 먼저 1960년 2월28일 3·15 대선을 앞두고 대구서 고등학생들이 이승만정부와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했고, 3월8일에는 대전서 고등학생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섰다. 그후 이승만정부가 정권 연장을 위해 3월15일 부정선거를 강행했고, 야당의 지지표를 무효표로 만드는 등 각종 부정을 저질렀다.

그러자 마산서 3월15일 선거 당일 학생들이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로 선거를 포기했고, 그후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여론이 거세지던 때 4월 초 마산 앞바다서 당시 16세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발견됐다. 

이에 4월19일 전국서 학생과 시민이 부정선거와 독재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경찰의 총에 쓰러져 갔지만, 일주일 후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하게 만든 게 4·19 혁명이다.


이같이 4·19 혁명은 대구 2·28 민주운동, 대전 3·8 민주의거, 마산 3·15 의거와 함께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 중 최초로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의 항거로서,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남을 유산이다.

‘운동’은 사회를 개혁하거나 변화시키기 위해 단체나 집단이 벌이는 적극적인 활동이고, ‘의거’는 정의를 위해 개인이나 집단이 의로운 일을 도모하는 운동이며, ‘혁명’은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기초·사회제도·경제제도·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강력한 저항운동이다.

바로 4·19 혁명이 이런 일련의 과정(운동→의거→혁명)을 거쳐 생긴 완벽한 혁명이다.

공교롭게도 1945년에 태어난 해방둥이 세대는 고등학생 때 4·19 혁명을 주도한 후 1세대 정치인이 됐고, 1960년에 태어난 4·19둥이 세대는 대학생 때 5·18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후 2세대 정치인이 됐다. 그리고 1980년에 태어난 5·18둥이 세대는 큰 저항운동 없이 3세대 정치인이 됐다.

이렇듯 해방 이후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견인해온 동력은 4월 정신과 5월 정신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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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국방부, 내란 문건 ‘대청소 프로젝트’

[단독] 국방부, 내란 문건 ‘대청소 프로젝트’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와 관련된 국방부 문건이 대규모로 파쇄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 조치는 오영대 전 인사기획관의 지시로 이뤄졌다. 오 전 기획관은 검찰 특수본과 재판서 정보사와 수사2단 인사안의 문제점을 증언했던 인물이다. 자신이 비상계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수사에 협조한 것으로 의심되는 대목이다. “올해 초 신년맞이 대청소라면서 문서를 대량으로 파쇄했다.” <일요시사>와 접촉한 국방부 직원들의 말이다. 파쇄된 문건들은 12·3 내란 사태와 관련된 자료라고 한다. 지시자는 오영대 전 국방부 인사기획관이다. 검찰 수사에 협조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는 게 군 내부자들의 주장이다. 뭘 숨기나 안규백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말 취임하면서 시작한 첫 번째 군 개혁은 인사다. 신임 인사기획관에 일반 공무원 출신인 이인구 군사시설기획관을 임용한 건 안 장관이 강조해 왔던 ‘군 문민통제’와도 맞닿아 있다. 인사기획관은 본래 예비역 장성이 맡아왔다. 이 신임 기획관의 전임자였던 오 전 기획관도 예비역 준장 출신이다. 군 내부에서는 국방부에 여전히 12·3 내란 사태에 협조한 군인들이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핵심으로 인사기획관실의 총괄과이자 인사기획관의 일정, 예산 등을 모두 관리하는 인사기획관리과가 언급된다. 다수의 국방부 관계자들은 “오 전 기획관은 물러났지만 책임져야 할 다수의 인물이 아직 자리를 보전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부서의 간부들은 전부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과장 김모 대령은 오 전 기획관이 대령이었을 때 소령으로 근무했고, 총괄 이모 중령은 오 전 기획관이 특전사 여단장을 역임했던 1공수여단서 중대장과 707중대장을 거쳤다. 장군인사팀장 김모 대령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수도방위사령관으로 근무했던 시절 비서실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 전 장관과 가깝거나 육사 출신인 이들이 국방부 인사의 핵심부서인 인사기획관리과에 포진하면서 계엄 실행을 위한 보직 이동이 이뤄진 셈이다. 김 전 장관은 실제 대통령경호처장일 때부터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과 군 인사에 대해 논의했다. 직무에서 배제되지 않은 인사기획관리과 간부들은 ‘장관이 모든 책임을 오 전 기획관에게 묻는 형식으로 퇴직을 시켰으니 우리는 지시를 받아 어쩔 수 없이 한 것처럼 조용히 지내면서 정부초기 개혁의 소나기만 피하면 진급 가능’이라며 서로서로 쉬쉬하고 있다고 한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인사기획관리과 간부들은 내란 이후인 지난해 12월 중순 오 전 기획관의 지시에 따라 문건 파쇄를 계획했다. 김 전 장관이 물러난 이후 인사기획관리과장 김 대령 및 총괄인 이 중령 외에는 계획되지 않은 대면보고는 금지했고 내부 보안에 심혈을 기울였다. 인사과 간부들 계엄 실패 후 12월 계획···1월 파쇄 “지시자는 검찰 수사 응했던 오영대 전 인사기획관” 한 달여 뒤 이 중령은 모든 과에 ‘신년맞이 대청소’를 하라고 전파했다. TF 자리 배치와 오래된 문건을 정리한다며 유독 인사기획관리과만 복도로 책상을 빼고, 대량 세절이 가능한 세절실을 예약해 엄청난 양의 문서들을 파쇄했다. 여기엔 내란 핵심 파일도 포함된 것으로 파악됐다. 안 장관은 이와 관련해 국회에서 오 전 기획관에게 여러 차례 질문한 바 있다. 당시 오 전 기획관이 당황해하며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퍼지기도 했다. 이 중령은 동영상을 보며 웃는 직원들의 명단과 안 장관에게 제보한 인물을 색출하기 위해 탐문 활동을 벌여 오 전 기획관에게 추정해 보고했다. 이들은 모두 오 전 기획관으로부터 승진추천, 성과상여금, 각종 포상 등 인사상 불이익을 본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이 문건을 파쇄한 이유는 내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내란 당일 오후 10시가 넘은 시각임에도 퇴근하지 않고 사무실에 있던 오 전 기획관의 지시를 받은 이 중령은 각 과의 총괄 담당자들을 소집해 ‘계엄 선포가 됐는데 선제적으로 인사 관련 조치를 왜 안 하냐’ ‘합참에는 계엄사령부가, 지작사령부에는 지역계엄사령부가 곧 창설될 텐데 각 군 본부 및 지작사와 인사 지침을 협의해 계엄령 취지에 맞게 배포하라’고 강조했다. 특히 오 전 기획관은 계엄 해제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 테이블을 통과했음에도 합동참모본부 전투통제실에서 이 중령에게 “(계엄이) 해제되긴 했는데 다시 시행될 수도 있으니 빨리 계엄사 창설 지원을 위한 인사 조치를 완성하고 지작사 병력에 대한 휴가 지침 및 통제 등 건의 사항을 받아보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 전 기획관은 내란 직전까지 김 전 장관의 의중에 따라 군 인사를 반영했다. 최근 내란 특검팀이 군 장성급 인사 자료 확보에 나선 것도 이에 관해 들여다보기 위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검팀은 최근 국방부 장군인사팀과 육군본부 장군인사실 등을 압수수색해 해당 부서 내 인사 관련 파일 등을 확보했다. 정치권에선 지난 2023년 11월과 지난해 4월 이례적인 인사가 이뤄졌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진급에 절박한 군 인사들을 계엄 실행 세력으로 활용했단 의혹이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윤석열정부 장군 인사는 특이하고, 이례적인 경우가 유독 많았다”며 “인사를 통해 군을 장악하고, 내란을 준비했다는 의혹 관련 특검의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3차 계엄 대비 문건 없애” 증거 인멸 국회서 해제 불구 지작사와 인사 논의?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은 지난 2023년 11월 인사에서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했다. 박안수 전 계엄사령관은 ‘75주년 국군의 날 행사기획단장 겸 제병지휘관’ 등 한직에서 2023년 10월 육군참모총장에 발탁됐다. 지난해 4월엔 지휘부에 이어 작전본부 인사가 이어졌다. 원천희 당시 육군 소장이 4차 진급으로 합참 정보본부장으로 승진했고, 이승오 소장은 군단장을 거치지 않고 합참 작전본부장으로 진급했다. 안찬명 당시 육군22사단장은 임명 5개월 만에 합참 작전부장으로 보직을 옮겼다. 통상 사단장은 1년 반~2년가량 보직을 맡는다. 군 안팎에서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왔던 이유다. 경질 위기이던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은 유임됐다. 그는 지난해 6월 정보사 군무원의 블랙요원 명단 국외 유출 사건 및 박민우 전 정보사 100여단장과의 갈등 등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신원식 전 안보실장은 지난해 8월 국회에서 “후속 조치를 강하게 할 생각”이라고 언급했지만, 다음 달 본인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는 군 관계자에게서 “노 전 사령관과 김 전 장관이 장군들 인사에 대해 논의했고 오 전 기획관에게 전달됐다”는 진술을 확보한 바 있다. 위기감을 느낀 오 전 기획관은 특수본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오 전 기획관의 특수본 진술조서를 보면 그는 “신원식 (전 국방부) 장관이 저와 원천희 국방부 정보본부장에게 문 전 사령관에 대한 보직해임·정보사령관 교체 검토를 지시했으나 지난해 9월6일, 김 전 장관이 취임하면서 문 전 사령관에 대한 ‘현 보직 유지’를 지시했다”며 “납득하기 어려운, 이해하기 어려운 인사였다”고 했다. 앞뒤 달랐다 오 전 기획관은 “(문 전 사령관이 박 준장으로부터 고소당한 혐의가) 어느 정도 사실로 확인됐지만 문 전 사령관에 대한 인사 조치는 없었다”며 “공론화된 문제고 어느 정도 사실로 확인됐는데도 이렇게 유야무야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hounder@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