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카타르월드컵 깜짝 스타 조규성

보잘 것 없었던 ‘멸치’ 월드컵 그라운드 누비다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벤투 감독이 준비한 비장의 무기였다. 월드컵 무대를 밟은 조규성은 K리그 득점왕의 진가를 어김없이 증명했다. 우루과이전 교체 출전해 예열을 마친 그는 가나전에 선발 출전해 멀티골을 기록했다. 관계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아직 월드컵이 끝나지도 않았지만, 조규성을 향한 국내외 관심이 뜨겁다. 국내 무대를 평정한 그가 더 큰 무대로 나아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조규성은 지난달 28일(현지시각) 카타르 알 라이얀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한국과 가나의 월드컵 조별 예선 H조 2차전 후반전에 2골을 몰아넣었다. 전반전 가나에 2골을 내주고 끌려가던 상황에서 순식간에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은 귀중한 득점이었다. 이는 조규성의 18번째 A 매치에서 나온 5~6호 골인 동시에 월드컵에서 터트린 데뷔골이다.

왜소한 체격
급격한 성장

조규성은 후반 13분 교체 투입된 이강인이 왼쪽 측면에서 올린 크로스를 헤딩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불과 2분 27초 뒤에는 김진수의 크로스를 또다시 다이빙 헤딩슛으로 꽂아 넣었다. 조규성은 이날 두 골로 역대 월드컵 최단 시간 연속골 4위라는 이색 기록을 거머쥐었다.

또 조규성은 한국 선수 최초로 월드컵 한 경기에서 멀티골을 기록한 주인공으로 남게 됐다. 아시아 전체로 놓고 봐도 페널티킥 득점 없이 한 경기 멀티 골을 기록한 선수는 조규성이 처음이다.

조규성을 필두로 선수들이 분전했지만, 결국 후반 23분 가나 선수 모하메드 쿠두스에게 추가 골을 허용하면서 한국은 최종 2:3으로 석패했다. 국민들은 아쉬움을 삼키면서도 조규성의 활약에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아울러 조규성의 잘생긴 외모에 국내외 관심이 폭발했다. 조규성이 우루과이전에 교체한 직후부터 온라인상에는 ‘한국 9번’의 이름과 SNS 계정을 찾는 이가 속출했다. 조규성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에선 영어·아랍어·스페인어 등 언어를 가리지 않고 “잘 생겼는데 축구도 잘한다” “멋있다” 등의 댓글이 달리고 있다.

대회 직전 3만명 정도였던 팔로워는 어느덧 160만명에 육박한다.

이번 대회로 물이 오른 조규성의 기량은 해외에서도 널리 인정받는 사실이다. 조규성은 가나전 선전을 통해 축구 통계 매체들이 주관한 ‘2022 FIFA 카타르월드컵 조별 예선 2차전’ 베스트 11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유명 축구 통계 매체 <후스코어드닷컴>이 지난달 29일 발표한 명단에서 조규성은 평점 8.7점을 받았다.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1골1도움을 기록한 레반도프스키와 함께 2라운드 최고 공격수로 선정됐다. 폴란드 국가대표로 출전한 레반도프스키는 발롱도르 수상자인 카림 벤제마와 함께 현시점 최고의 완성형 공격수로 평가받는 ‘월드클래스’ 선수다.

명단에는 레반도프스키 외에도 앙투안 그리즈만, 브루노 페르난데스, 킬리안 음바페, 테오 에르난데스 등 세계적인 선수들이 함께 이름을 올렸다. <후스코어드닷컴>뿐 아니라 또 다른 통계 매체 <소파 스코어> 역시 베스트11에 조규성을 선정했다. 

이렇듯 조규성은 이제 세계대회에서도 통하는 기량을 가진 선수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높은 기대를 받아온 선수는 아니었다. 그의 축구 인생을 돌아보면, 탄탄대로와는 거리가 멀었다. 

조규성은 1998년 1월 경기도 안산에서 태어났다. 조기 축구를 하던 일반인 아버지와 실업 배구선수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조규성은 초등학생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원곡중학교에 진학한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축구부에 들어가 실력을 다졌다. 


하지만 조규성은 중학교 축구부에 들어가고도 경기를 뛰는 날보다 벤치에 앉아 있는 날이 더 많았다. 비교적 작은 덩치가 발목을 잡았다. 빠른 1998년생인 조규성은 동급생들에 비해 성장 속도가 더뎠다. 

가나전 헤더 멀티골 폭발…한국 축구 새 역사
공 잘 차는 만찢남 신드롬 ‘제2의 안정환’

경기에 잘 나오지 못하면서 자연스레 고등학교 진학도 어려워졌다. 다행스럽게도 안양공업고등학교의 이순우 감독이 조규성의 잠재력을 높게 보고 그를 데려갔다. 

이는 조규성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로 꼽힌다. 조규성이 안양공고에 입학한 직후 지역 프로팀인 FC 안양이 창단했다. 이듬해에는 안양공고가 FC 안양의 U-18 팀으로 선정됐다. 이에 조규성은 2학년부터 자연스레 K리그 주니어에 참가하는 프로 유스 선수가 됐다.

한국 유소년 축구계에서 프로 산하 팀에 들어가는 건 하늘의 별따기다. 각종 지원이 뒷받침되고, 프로 지명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고등학교 축구부에 들어가는 것에 비하면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이 부분에서 고교생 조규성은 큰 행운을 누린 셈이다. 

그럼에도 조규성은 고교 시절 축구를 그만두는 걸 진지하게 고민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도 여전히 작았던 체구가 또 걸림돌이 됐다. 조규성은 지난 1월 국가대표 전지훈련장에서 당시 상황을 직접 회상했다. 

그는 “중학생 때 키가 1m60㎝대였다. 안양공고 2학년 때 ‘축구로 대학 진학이 힘들겠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받았다”며 “어머니에게 ‘겨울까지만 마지막으로 해보고 안 되면 공무원 준비할게요’라고 말씀드렸다”고 전했다.

절실했던 조규성은 훈련에 매진했다. 당시 그는 새벽 5시부터 훈련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키가 갑자기 1m80㎝대까지 자랐다. 지금 조규성의 키는 1m89㎝에 달한다. 졸업반이 된 조규성은 키도 기량도 모두 급격하게 성장했다. 

조규성은 팀 성적의 수직 상승을 견인했다. 안산공고는 전년도 K리그 주니어 A 권역에서 17위를 기록했지만, 이듬해 조규성의 활약에 힘입어 4위까지 도약했다. 조규성은 여러 승부처에서 큰 신장을 활용한 헤더 골로 팀 승리를 이끌었다. 

자신의 잠재력을 여실히 보여준 조규성은 FC 안양의 우선 지명을 받아 광주대학교에 진학했다. 1학년 때는 중앙 수비수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바꾸며 출전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는 감독이 교체되면서 벤치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전화위복이 됐다. 새로 부임한 이승원 감독은 조규성의 공격적 재능에 주목했다. 결국 조규성은 이 감독의 지도에 따라 공격수로 변신했다. 공격 부문의 재능이 만개했고, 과거 후방에서 뛴 경험이 큰 자산으로 남았다. 

수려한 외모
스타성 장착


공격수 조규성은 기본적인 득점력을 갖춘 동시에, 안정적인 전개와 번뜩이는 위치 선정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왕성한 활동량과 큰 키를 활용한 제공권 장악도 강점이다. 이를 기반으로 조규성은 대학 무대에서 인정받는 공격수로 자리매김했다. 3학년 때는 팀의 2018 U리그 8권역 우승에 기여했다.

조규성은 2019년 1월4일 FC 안양을 통해 프로 무대에 입문했다. 그는 안양공고 출신 중 최초로 FC 안양 1군에 우선 지명으로 입단한 선수가 됐다. 데뷔 시즌 33경기 14골 4도움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프로 무대 정착을 알렸다. 득점 3위를 기록하면서 당해 K리그2 베스트11에도 이름을 올렸다. 

다음 시즌에는 K리그1의 강호 전북 현대로 이적하면서 전 소속팀인 안양에 8억8000만원이라는 구단 사상 최고 이적료를 안겨줬다. 이적 후에는 시즌 34경기 8골 3도움을 기록했다.

지난해에는 국군체육부대에 입대해 김천 상무FC 소속으로 뛰었다. 시즌 중 27경기 8골 3도움을 기록하며 K리그2 베스트11 공격수 부문 후보에 선정됐다. 조규성은 입대 이후 오히려 기량이 한층 상승했다. 본래 강점이었던 왕성한 활동량과 좋은 연계에 높은 골 결정력과 피지컬까지 탑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같은 성장은 결국 지난해 9월, 생애 처음으로 성인 국가대표팀에 발탁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조규성은 올해 커리어하이 시즌을 기록했다. 시즌 도중 친정팀 전북으로 복귀(전역)한 조규성은 두 팀을 오가며 리그를 폭격했다. 그는 이번 시즌 35경기 21골 5어시스트, 리그 17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단골 우승팀인 전북에서도 13년 만에 나온 득점왕이었다.


국가대표팀 안에서의 입지도 점차 올라갔다. 파울루 벤투 축구 대표팀 감독은 지난해 9월 레바논과의 카타르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조규성을 처음 출전시킨 이후로 꾸준히 발탁했다.

이때는 기량이 완전히 올라오기 전인 상무 시절이었다. 조규성이 매번 발탁되자 의문부호가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벤투 감독은 조규성의 선발 이유로 제공권과 기술적인 움직임을 꼽았다. 벤투 감독은 조규성이 다양한 전술에 녹아들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평소에는 국가대표 주전 골잡이 황의조와 유사한 유형으로 뛰지만, 때로는 타깃형 스트라이커로 뛸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규성은 데뷔 초 황의조처럼 공간으로 빠져 나가는 공격 패턴을 주로 구사했다. 하지만 점차 최전방에서 버텨주고 공을 지켜내는 등 연계 관여도를 높이는 역할을 맡게 됐다. 탄탄한 피지컬과 안정적인 연계 능력이 뒷받침되면서 장점이 극대화됐다.

조규성의 이 같은 움직임은 국가대표팀의 전술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조규성이 넓혀둔 공간을 손흥민·황인범 등이 마음껏 활용하면서 다양한 공격 패턴을 구현하는 게 가능해졌다. 

이와 관련해 조규성은 “K리그1 강팀 전북, K리그2 강팀 김천에서 뛰다 보니 공간이 안 생겨서 스타일에 변화를 줬다. 벤투 감독님도 ‘앞에서 많이 싸워주고 버텨줘야 한다’고 강조하셨다”고 밝혔다.

준비된
스트라이커

파울루 벤투 감독은 조규성의 좋은 경기력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벤투 감독은 인터뷰에서 “앞으로도 조규성에게 몇 가지 더 전수해주겠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조규성은 이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지난해 11월 카타르 도하에서 치러진 이라크와의 월드컵 최종 예선 6차전에서 첫 풀타임 경기를 완벽하게 마쳤다. 강점인 왕성한 활동량과 공중볼 경합 능력이 돋보였고, PK까지 얻어내는 등 알토란 같은 활약을 펼쳤다.

이후로도 조규성은 최종 예선 7차전과 각종 평가전에 출장하며 최종 명단 승선이 일찌감치 예견됐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조규성은 주전보다는 ‘백업 자원’으로 분류됐다. 국가대표팀에서 수년간 최전방 공격수 주전 자리를 꿰찬 황의조의 벽은 높았다.

조규성은 잇달아 선발되면서도 차선책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대회 직전까지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면서 황의조와 충분히 주전 경쟁을 할 수 있다는 의견이 점차 힘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규성은 이를 결과로 증명해냈다.

조규성은 가나전 직후 “나도 솔직히 별거 없는 선수인데 월드컵이라는 세계적 무대에서 골도 넣었다”며 “끝까지 자신을 믿고 열심히 꿈을 위해 쫓아가면 이런 무대에서도 골을 넣을 수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어린 선수들도 꿈을 갖고 열심히 하면 된다. 지금은 이런 세계적 무대에서 골을 넣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런 마음뿐”이라고 덧붙였다.

아직 대회가 채 끝나지도 않았지만, 조규성을 향한 관심은 이미 뜨겁다. 특히 유럽 축구계 일각에서는 조규성 영입 의사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유럽리그들은 스트라이커 기근 현상에 허덕이고 있다.

양발을 모두 활용하고 유럽 리그에서도 제공권을 발휘할만한 신장을 가진 조규성은 실제로도 매력적인 매물이라는 게 중론이다. 더군다나 한국 선수들의 커리어를 위협하는 병역 문제가 이미 해결된 점 역시 유럽 진출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꼽힌다. 

'벤투호 골잡이’에 쏟아지는 관심
완성형 공격수 유럽 기회 잡을까?

이와 관련해 이영표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지난달 29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우루과이와 첫 경기가 끝나고 유럽의 아주 괜찮은 구단 테크니컬 디렉터(기술이사)가 스카우트와 관련해 연락이 왔었다”고 전했다.

이 부회장은 연락이 온 구단이 어디인지는 직접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다만 “기술이사가 저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함께 뛰었던 친구”라고 귀띔했다. 이에 여론은 연락의 출처가 독일 분데스리가 소속 구단일 가능성을 높게 치고 있다.

독일 언론 <푸스발 뉴스>에 따르면 이영표와 도르트문트에서 뛰었고 현재 구단의 테크니컬 디렉터를 맡고 있는 사람은 독일 도르트문트의 기술이사 제바스티안 켈, 그리고 헝가리 페렌츠바로시의 기술이사 허이날 터마시 등 2명이다.

이 부회장은 “이게 두 골 넣기 전에 왔던 연락이었는데, 이제 두 골을 넣었으니까 유럽 팀들에서 훨씬 더 조규성 선수에 관해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고 내다봤다.

튀르키예 언론사 <탁빔>에서는 ‘터키 페네르바흐체 SK와 프랑스 스타드 렌 FC가 조규성 영입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탁빔>은 과거 김민재의 페네르바흐체 시절 바이아웃 조항 내용을 처음으로 보도한 언론사로, 공신력이 비교적 높다는 평이다.

페네르바흐체와 조규성의 현 소속팀 전북 간에 선수 거래가 활발했던 점도 눈에 띈다. 올해 들어 전북 유스 소속의 조진호(3월), 이건혁(11월)이 잇달아 페네르바흐체로 이적했다. 도중에 다른 팀을 거치긴 했지만, 김민재 역시 전북에서 2년간 뛴 경험이 있다.

다만 원 소속팀 전북과 김상식 감독이 조규성의 이적을 쉽사리 허용할지가 의문이다. 전북은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리그 5연패를 달성했지만, 올해는 우승컵을 놓쳤다. 이에 절치부심해 다음 시즌 우승컵 탈환을 노리고 있다. 이 가운데 득점왕 조규성의 이적을 허용한다면 계획에 큰 차질이 빚어진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조규성에게도 아직 증명할 요소가 조금 남아있다. 조규성은 괄목할만한 침투와 공간 능력을 가지고도 페널티 박스 안 쉬운 찬스를 더러 놓친다는 단점을 여러 번 지적받았다. 점점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는 있지만, 여전히 세밀한 플레이 보강에 관한 주문이 이어지고 있다.

또 페널티킥을 잘 차기는 하지만, 득점 중 페널티킥 골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는 지적도 있다. 조규성은 이번 시즌 리그와 컵대회에서 기록한 18골 중 7개를 페널티킥으로 넣었다. 조규성이 해외리그로 이적하고도 페널티킥 키커로 발탁될지 확신할 수 없다.

만약 페널티킥을 차지 않는다면, 지표처럼 득점력이 크게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다.

빅리그
초읽기?

조규성은 10여년간의 선수생활 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왔다. 막다른 길이라 여겼던 난관에서 늘 기대 이상의 도약을 보여줬다. 이제 또 다른 증명의 장 앞에 섰다. 국민들은 조규성이 이번 월드컵에서도 보여준 것처럼 앞으로 크게 도약하리라 기대하고 있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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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