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그라운드 떠나는 ‘조선 4번타자’ 이대호

‘홈런 쾅! 쾅!’
세계기록 보유도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영원할 것 같았던 ‘조선의 4번 타자’ 선수 생활에도 끝이 다가왔다. 20년 넘게 프로야구 무대를 누빈 이대호는 ‘박수 칠 때 떠나는’ 길을 택했다. 그는 한 점의 후회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여전한 기량을 과시하고 있다. 이제 남은 건 유일하게 이뤄보지 못한 꿈,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이다.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그는 마지막 불씨를 살리려 구슬땀을 흘린다. 

스타 플레이어에겐 수많은 별명이 붙는다. 이대호 역시 많은 별명을 가졌지만 ‘조선의 4번 타자’만큼 이대호를 잘 설명하는 별명은 없다. 그는 선수생활의 대부분을 KBO(한국야구위원회)리그와 한국을 대표하는 타자로 군림했다.

어려웠던
어린 시절

이대호의 타고난 신체조건과 출중한 기량을 보면 그가 탄탄대로의 엘리트 야구인 코스를 밟았을 것으로 넘겨짚기 쉽다. 하지만 이대호만큼 어려운 환경에서 야구를 접한 선수는 손에 꼽는다. 그는 형과 함께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그가 세 살 때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재가했다. 할머니는 시장 좌판에서 김치와 된장 등을 팔며 형제를 어렵게 키웠다. 

이대호가 야구와 인연을 맺은 건 지금도 절친한 추신수(SSG 랜더스)의 손에 이끌려서다. 롯데 박정태 코치(당시 선수)의 조카인 추신수는 야구를 하기 위해 부산 수영초등학교로 전학 갔다. 그때부터 유난히 덩치가 컸던 이대호는 추신수 눈에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추신수는 감독에게 이대호를 추천했고, 이대호에겐 같이 야구하자고 설득했다.

당시 부산에서 초등학생들에게 야구란 종교와 같았다. 하지만 이대호는 ‘스카우트’ 제의에도 선뜻 야구부에 들어갈 수 없었다. 매달 몇 십만원에 달하는 회비는 곤궁했던 그에게 ‘오를 수 없는 나무’와 같았다. 야구를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대호는 아쉬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야구가 이대호의 운명이었다. 그의 삼촌들은 고민 끝에 그가 야구를 할 수 있게 힘을 합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렇듯 이대호는 천신만고 끝에 야구계에 첫발을 디딜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려운 형편은 여전했고, 지원은 넉넉지 못했다. 이대호는 자신을 스카우트한 중학교 감독의 집에서 2년 반 동안 더부살이하며 야구 경력을 이어갔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이대호는 꾸준히 기량을 갈고 닦았다. 그 결과 부산 지역의 ‘야구 명문’ 경남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대호를 야구계로 이끈 추신수는 라이벌 학교인 부산고등학교로 향했다. 이대호와 추신수는 고교 시절 촉망받는 투수로 발돋움했다. 

이대호는 하루빨리 프로야구에 입성해 할머니를 호강시키겠다는 일념으로 구슬땀을 흘렸다. 하지만 이대호의 꿈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할머니가 고등학생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대호는 “할머니에게 제대로 된 효도를 하지 못한 게 영원한 한으로 남았다”고 자주 언급한다.

이대호의 뒷바라지는 일찍이 취업 전선에 뛰어든 형이 이어받았다.


이대호는 추신수·정근우·김태균 등과 함께 2000년 애드먼턴에서 열린 U-18 야구선수권대회에서 미국을 꺾고 우승을 이끈 주역이 됐다. 당초 지역 야구팀 롯데 자이언츠에서 재회할 것이 유력했던 이대호와 추신수는 또 다른 갈림길에 섰다.

추신수가 롯데 자이언츠의 1차 지명을 거부하고 미국 메이저리그(MLB)의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을 체결하면서다.

어려운 가정환경 딛고 국대 야구 선수로
타고난 신체조건과 유연한 동작으로 평정

반면 이대호는 추신수에 이어 롯데 자이언츠의 2차 지명을 받고 프로 무대에 입성했다. 입단 직후 어깨 부상을 당한 이대호는 타자로 전향했다. 당시 우용득 2군 감독이 이대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타자 전향을 추진했다. 

입단 첫해 이대호는 타자 전향 훈련을 받으며 2군에 주로 머물렀다. 그러다 시즌 막바지 용병 펠릭스 호세의 출장 정지 처분을 계기로 1군 무대를 밟았다. 이대호는 입단 첫해인 2001년 1군 6경기에 출장해 8타수 4안타 1타점을 기록했다.

이듬해인 2002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군 감독으로 승격한 우용득이 이대호를 붙박이 4번 타자로 기용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롯데 전력이 비교적 약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1군 경험이 거의 없는 신인에게 4번 타자를 맡긴다는 상황 자체가 이대호에 거는 기대가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이대호는 개막전부터 4번 타자 출전했다. 시즌 개막 후 한 달간 홈런은 1개에 그쳤지만, 타율은 3할대 중반을 기록하며 신인왕 후보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신인들이 으레 그렇듯, 이대호는 시즌 중반으로 접어들며 타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2군행을 통보받았다.

그러던 중 이대호를 적극적으로 밀었던 우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됐다. 후임 백인천 감독은 “이대호가 좋은 타자가 되기 위해서는 살을 빼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이를 위해 백 감독은 이대호에게 쪼그려 뛰기와 오리걸음 훈련을 지시했다.

거구인 이대호가 무릎 부상에 시달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국 이대호는 무릎 부상 때문에 2002년과 2003년 시즌을 허송세월로 보냈다.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시점은 양상문 감독이 취임한 2004년부터다. 이대호는 이때부터 전 시즌 주전을 꿰차고 성장세를 그렸다. 이때 이대호는 타율은 낮아도 높은 파괴력을 자랑했다. 2004년 2할4푼8리 20홈런 68타점을, 2005년엔 2할6푼6리 21홈런 80타점을 기록하며 조금씩 가능성을 보였다.

문제는 병살타가 너무 많아 항상 의문부호가 따라붙었다는 점이다.

만개한 기량
압도적 성적


하지만 한국 야구의 전설적인 타자 장효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2004년 한 기자와의 대화에서 이대호의 성공을 일찌감치 확신했다. 장효조는 이대호가 194cm라는 거구임에도 뛰어난 유연성을 가졌다는 점에 집중했다. 그는 “(이대호가) 머지않아 터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장효조의 말대로 이대호의 기량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만개했다. 2006년 이대호는 타율, 타점, 홈런 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1984년 이만수(삼성 라이온즈)가 기록한 이후 22년 만의 트리플 크라운이었다. 이대호는 이를 통해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우뚝 섰다. 

이대호는 2007년 1루수 골든글러브 2연패,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등의 기록을 남기며 국내외에서 맹활약했다. 이후 2010년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대호의 2010년은 역대 모든 타자들의 이력 중에서도 손꼽히는 ‘커리어 하이’ 시즌이다. 이대호는 그해 도루를 제외한 모든 타자 기록 1위 자리를 휩쓸며 사상 최초의 타격 7관왕에 올랐다. 이 기록은 여전히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대호는 시즌 MVP까지 수상하면서 시상식에서 상 8개를 독식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아울러 9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면서 이 부문 세계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이 시즌 이대호가 기록한 홈런 수는 총 44개. 종전 롯데의 팀 최고기록 37개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국내 리그를 평정한 이대호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일본 프로야구(NPB) 오릭스 버펄로스 유니폼을 입은 이대호는 정규 시즌 144경기에 모두 4번 타자로 출전했다. 그는 91타점과 24홈런을 만들어내며 각 부문 1·2위에 올랐다. 


이후 오릭스에서 2년간 뛴 이대호는 2014년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이적해 팀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대호는 우승 반지와 함께 한국인 최초로 일본 시리즈 MVP 선정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2016년 이대호는 소프트뱅크의 파격적인 제안을 뒤로한 채 또 다른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 메이저리그로 향했다. 연봉과 출전 보장 등의 조건을 크게 낮추면서, 정말 꿈 하나만 바라보고 감행한 모험이었다.

그는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을 체결했다. 고정적으로 출전하지 못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14홈런과 49타점을 생산했다. 

2017년 한국으로 돌아온 이대호는 어느덧 30대 후반을 바라보는 노장이 돼있었다. 복귀 후 잠시 부침을 겪으며 “예전만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결국 2017년과 2018년 모두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가장 큰 부침은 2019년 찾아왔다.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는 15년 만에 최하위를 기록했고, 개인 성적도 신통치 않았다. 그나마 개인 통산 300홈런을 달성한 것을 위안거리로 삼을 수 있었다. 

이대호는 2020년과 지난해 시즌을 거치면서 4번 타자 자리에서 내려왔다. 선수 생활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무거운 책임감을 한결 덜어낸 셈이다. 타율은 3할을 살짝 밑도는 등 기대치는 채웠지만 특출나진 않았다. 김태균‧정근우 등 오랜 시간 함께 뛰어온 동갑내기 선수는 하나둘 은퇴를 선언했다.

결국 이대호도 지난해 시즌이 끝나고 은퇴 시기를 공식적으로 못 박았다. 2년 계약이 끝나는 올해가 이대호의 마지막 시즌이다. 그 사이 유한준‧이성우 등이 은퇴하면서 이대호는 리그 최고령 선수가 됐다. 처음 ‘은퇴 투어’가 논의됐을 때는 리그 안팎의 상황이 좋지 못해 이견이 갈렸다.

헤어질 결심
뜨거운 안녕

이에 부담을 느낀 이대호 본인도 고사하면서 무산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이후 10개 구단의 논의 끝에, 그의 공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은퇴 투어 시행이 확정됐다. ‘국민타자’ 이승엽에 이은 두 번째 공식 은퇴 투어다. 등번호 ‘10번’의 영구결번도 사실상 확정된 상황이다. 현재 롯데 자이언츠의 영구결번은 대투수 최동원의 ‘11번’ 뿐이다.

이대호는 지난 3월 자신의 마지막 KBO 미디어데이에 참석해 “마지막 전지훈련과 시범경기가 모두 끝났다. 후배들에게 마지막 시범경기라고 얘기했는데, 뭔가 울컥하는 게 있었다”고 심경을 전했다. 아울러 ‘친구’인 추신수와 오승환(삼성 라이온즈)을 두고 “실력이 좋은 친구들이기 때문에 오래 더 좋은 성적을 가지고 그라운드에서 뛰었으면 좋겠다”고 덕담을 건넸다.

이들은 모두 1982년생 동갑이지만, 이 중 이대호가 가장 생일이 빨라 최고령 타이틀을 떠맡았다.

추신수는 “대호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 자라면서 많은 시련을 겪으며 이 자리까지 왔다. 부산에서 야구대회를 하면서 라이벌로 성장해오면서 (대호가)있었기 때문에 내가 미국까지 가서 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아직 은퇴를 생각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나도 겪어야 할 일이다. 당장 내년, 내후년이 될 수도 있다”며 “이렇게 박수를 받고 떠날 수 있다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야구를 전 세계에 알리고 떠나는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대호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다. 은퇴를 앞뒀다는 사실이 무색하도록 연일 불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다. 팬과 리그에 전하는 마지막 ‘뜨거운 안녕’이다.

불혹을 넘긴 이대호는 롯데가 치른 경기 대부분에 나섰다. 그가 결장한 경기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면서도 타율 3할3푼3리, 18홈런 83타점 46득점 152안타 등 전성기 못지않은 활약을 보이고 있다. 오히려 앞선 몇 년간의 시즌보다도 높은 성적이다.

베테랑의 투혼은 리그 전체 타격 지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타율 3위, 홈런 8위이고, 타점과 안타 각각 7위와 4위에 올라있다(지난 6일 기준). 또, 장타율과 출루율을 합친 OPS 역시 7위를 기록 중이다.

그와 경쟁을 중인 선수 면면을 살펴보면 이대호의 위상이 여전히 건재함을 확신할 수 있다. 리그를 통틀어 타율에서 이대호보다 앞선 선수는 외국인 용병 호세 피렐라(삼성 라이온즈)와 이정후(키움 히어로즈)뿐이다. 여타 기록에선 박병호(kt 위즈)와 김현수(LG 트윈스) 나성범(기아 타이거즈) 김혜성(키움 히어로즈) 등과 경쟁 중이다.

‘박수 칠 때 떠난다’ 현역 생활 마무리
‘이대호는 이대호다’ 마지막 목표 우승

이대호는 적게는 3살부터 많게는 16살까지 차이나는 후배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자웅을 겨루고 있다.

팀 내부적으로도 도드라지는 지표다. 이대호는 롯데 자이언츠 타격 지표에서 도루를 제외한 사실상 모든 부분을 이끌고 있다. 현재 이대호는 롯데 자이언츠 안에서 타율 2위, 홈런 1위, 타점 1위, 득점 4위, 안타 1위, 장타율 2위, 출루율 2위, OPS 2위를 기록 중이다. 

올 시즌 후반기 영입돼 표본이 적은 잭 렉스를 빼고 보면 이대호는 타율과 장타율, 출루율, OPS 등에서도 사실상 선두다. 은퇴가 목전인 선수가 무려 6개 부문에서 팀 내 1위를 싹쓸이하고 있는 셈이다.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 우승은 마지막까지 이대호 몫이었다. 이대호는 지난 7월15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에서 10개의 아웃카운트를 모두 소진하기도 전에 5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당당히 우승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이번 우승으로 이대호는 3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특히 3번 우승한 선수는 더러 있어도,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에 모두 우승해본 선수는 이대호가 유일하다.

여전히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는 이대호. 그만큼 은퇴에 대한 아쉬움은 커지는 법이다. 하지만 이대호가 은퇴를 번복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미 은퇴 투어를 진행하며 전국을 돌고 있는 데다, 지속적으로 은퇴를 번복할 의사가 없다는 입장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8일 이대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아이들이 지난해까지는 관심이 없었는데 올해에는 야구에 재미를 붙였다. 내가 TV에 나오면 좋아하더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나보고 ‘아빠, 야구 더 해’라고 한다. 작년에 이랬으면 올해 은퇴를 안 했을 것 같은데 남자가 한 번 말을 뱉으면 지켜야지 않나”라고 난감한 표정과 함께 농을 던졌다.

타들어 가는 롯데 팬들의 마음과는 반대로, 이대호의 은퇴 투어는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마음을 비운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욕심이란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이다. 

롯데는 6위에 올라 있다(지난 6일 기준). 가을야구 마지노선인 5위 자리의 기아 타이거즈와는 네 경기 차이다. 우승까지 갈 길은 멀지만, 가을야구라도 할 수 있다면 나름의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다. 이 역시 잔여 경기 수를 감안하면 쉽진 않겠지만, 아직 포기할 수준은 아니다.

끝까지
최선을

특히 최근 기아가 3연패 수렁에 빠지면서 롯데가 순위 공략에 박차를 가하는 모양새다. 이대호 역시 “시즌 초반에 많이 이겼으면 좋았겠지만 지금도 열심히 이기고 있다. 나도 선수들도 포기하지 않고 매 경기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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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