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승부수’ 박지원의 큰 그림

한마디 한마디에 정치권 술렁

[일요시사 정치팀] 차철우 기자 = ‘정치 9단’ ‘정치꾼’.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을 대변하는 수식어다. 몸풀기에 나선 박 전 원장은 등장과 동시에 정치권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민주당이 분열한 틈을 타 강도 높은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있다며 정치권에 메시지를 던지는 중이다. 박 전 원장이 던진 메시지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을까?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2016년 주류 세력으로 불리던 친문(친 문재인)계와 갈등 끝에 민주당을 뛰쳐나갔다.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몸담았던 국민의당에 합류한 바 있는 4선 중진인 그는 2018년 국민의당을 탈당했고, 2020년에 국정원장으로 임명됐다.

정치 9단
컴백 초읽기

지난달까지 문재인정부의 마지막 국정원장으로 일하다가 새 정부가 박 전 원장에게 사퇴를 통보하며 국정원장직에서 내려왔다. 한동안 잠행을 이어가던 그는 곧바로 SNS를 통해 정치 복귀 신호탄을 쏴 올렸다. 

본격적인 시작은 호남 지역 방문이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을 만나는 등 광폭 행보를 보였다. 본격적인 정치 재개를 선언한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호남행 이후 최근에는 각종 방송에 출연하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 다지기에 돌입한 모양새다. 각종 방송에 출연해 “I’m back”이라는 말로 운을 뗐다. 박 전 원장의 발언은 정치계에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최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국정원이 정치인과 기업인, 언론인에 대한 X파일을 만들어 보관 중”이라고 발언해 논란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해당 자리에서 박 전 원장은 정치인이 돈을 버는 방식, 연예인과의 관계 등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특별법을 제정해 폐기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번 발언으로 여권과 국정원에서는 박 전 원장을 향해 비판적인 논평을 내놓고 있다. 직전까지 몸담았던 국정원은 박 전 원장을 향해 “국정원장으로서 부적절한 처신”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국민의힘은 취지는 동의하나 박 전 원장의 발언이 부적절했다는 반응이다. 논란이 커지자 박 전 원장은 즉각 머리를 숙였다. 자신의 X파일 발언으로 몰매를 맞고 죽을 지경이라며 앞으로 유의하겠다고 사과했다. 

사과를 했음에도 여전히 억울한 게 남은 모양새다. X파일을 띄운 이유가 국정원이 과거 정보수집 등을 할 때 관련 문서가 정쟁으로 이용된 것에 대한 의견을 밝힌 것이라는 입장이다. 정치권에서는 박 전 원장의 X파일 발언을 두고 의도된 실수라는 시각이다. 

최근 민주당 복당을 선언하는 등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위해 자신의 활동 영역을 넓혀가겠다는 초석을 깔고 있는 셈이다. 이런 까닭에 은연 중에 자신이 많은 정보를 쥐고 있다는 메시지를 정치권에 던졌다는 것이다. 

전격 본격 복귀 선언
1선 아니고 2선서만?

호남을 방문한 이유도 박 전 원장의 정치적 기반이 호남에 있기 때문이다. 목포에서 터줏대감으로 불려오고 있는 박 전 원장은 목포에서만 3선 의원을 지낸 바 있다.


박 전 원장은 정치 9단으로 불리는 인물로 자신의 정치적 존재감을 띄우기 위한 발언이라고 분석한다. 활발한 행보를 보이는 박 전 원장이 정치 재개를 시작한 이유는 현재 민주당의 내부 분열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현재 민주당은 계파 문제로 유례없는 내홍을 겪는 중이다.

민주당 세력은 친명(친 이재명)계와 친낙(친 이낙연)계, 친문(친 문재인)계 세력 등으로 갈라져 있다. 내분이 가속화된 상황에서 당 지도부는 지방선거 패배에 책임을 지고 모두 사퇴한 상황이다. 

3·9 대선 패배 이후 지도부가 총사퇴한 뒤 급하게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지만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윤호중·박지현 공동비대위원장이 물러났다. 새로운 비대위원장으로 계파색이 옅은 우상호 전 원내대표가 고삐를 잡았지만 전당대회까지 남은 시간이 짧은 탓에 무언가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한 편이다.

이 틈을 재빨리 간파한 인물이 박 전 원장이다. 그는 민주당으로 복당 선언을 하며 최근 민주당에게 연일 쓴소리를 내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박 전 원장이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 일찍부터 포석을 깔고 있는 게 아니냐는 시선이 나온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데 라디오에 출연해서도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에 대해 빼놓지 않고 언급하고 있다. 

본인 입으로는 대표로 나서지 않고 2선에서 당을 돕겠다고 선언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직접 친명과 친문 계파 싸움에 뛰어들겠다는 액션으로 읽힌다. 박 전 원장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도 당 대표 도전설에 대해 강력하게 선을 그었다.

그는 ‘민주당으로 복당을 선언을 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민주당 내에서 할 역할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김 전 대통령이 만들었던 당이 민주당이고, 과거 김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서 이념을 이어가고 싶기 때문이라는 점이라는 게 이유다.

입만 열면
폭탄급 파장

그는 “현재까지는 1선에 나서서 하지 않겠다. 민주당에 복당하더라도 2선에서 후배들이 잘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병풍 역할만을 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민주당 복당 후 당 편이 아닌 윤석열 대통령에게 협력할 사안에 대해 협력을 요구하고, 잘못해나가는 부분은 야권 입장에서 대안을 제시하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언급했다. 보수와 진보가 극렬히 대립하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제시한 셈이다.

박 전 원장은 최근 대선 등 선거에서 연패한 후로 민주당이 싸우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는 21대 총선에서 목포서 낙선할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떨어져 한동안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탓에 자신의 과거 결과와 민주당의 현 상황 역시 비슷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컸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민들레, 수박 등 계파 전쟁을 끝내고, 싸움보다는 여야가 국회를 정상화한 후 머리를 맞대고 대책 논의해야 할 적임자가 자신이라는 주장이다.

정치 일선에 나서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도 부담을 느끼면서도 정치 원로, 정치 9단으로서 중재자 역할을 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과거 민주당 당 대표 경선 과정이나 대통령선거 과정에서도 박 전 원장은 문재인 전 대통령을 강하게 공격한 바 있다. 아침에 눈 뜨면 쓴소리를 해대는 탓에 문모닝이라는 별명까지 생겼을 정도다. 문 전 대통령 당선 이후 박 전 원장은 곧바로 쓴소리를 멈췄다. 오히려 문 전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는 발언으로 여론을 주도했다. 

아직은
시기상조?

현재 민주당에 강한 어조로 비판하는 이유도 과거와 비슷하게 성공할 수 있도록 협력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게 그의 정치 재개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민주당 내부에서 느껴지는 시선은 다르다. 박 전 원장의 민주당 복당 선언 자체가 민주당 당권잡기 경쟁에 참전했다는 것이다. 


현재 민주당은 이낙연 전 대표가 미국행을 택해 친문, DJ계, 친노 세력을 묶을만한 리더가 딱히 없다. 이들 세력을 통합할 인물로 몇몇 인사가 거론되긴 하지만, 현재 친문 세력인 초금회(청와대 출신 초선 의원들의 금요일 모임) 역시 당내에서 정치적 입지를 발휘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런 탓에 박 전 원장이 친명 세력을 견제할 카드로 DJ계, 친노계, 친문계를 통합하려는 포석을 깔고 있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한 민주당 중진 의원 역시 박 전 원장의 민주당 복귀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놨다.

그는 박 전 원장의 정치 재개에 대해 “자신의 정치적 공간을 만들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며 “과거 민주당은 젊은 이미지가 강했다. 현재는 너무 고루한 이미지”라고 평가했다. 이어 “민주당은 젊고, 역동적인 본연의 민주당으로 복원돼야 하는데 그의 참전은 거꾸로 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젠 정치원로로서 막후에서만 지원할 때라는 말로 읽힌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박 전 원장이 띄운 586 용퇴론도 쉽게 꺼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그의 등판으로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점도 걱정거리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는 박 전 원장이 아직 정치적인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민주당 인사들에게 자기 세일즈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중재자 역할은 가능
내부선 부담 목소리

아직까진 박 전 원장 본인이 당권을 잡겠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사실상 당 대표 등 큰 역할에 관심을 보인 것이라고 해석된다.

정치권 관계자 역시 민주당 중진 의원의 의견과 비슷하다. 민주당에서 전당대회가 제대로 열리지 않을 경우 최소한 비대위원장 혹은 당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싶어한다는 분석이다.

현재 당 대표 및 지도부에 오르내리는 인사들은 10명에 이른다. 친명계에서는 단연 이재명 의원 본인이 거론된다. 현재 친명계에서 당권에 도전할만한 인물로 이 의원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인물은 없다.

친문계에서는 설훈·홍영표·전해철 의원이 거론된다. 이들은 모두 3선 이상이지만 당내 기반이 확고하지 않은 만큼 현실적으로 이 의원을 제외하고는 중량감을 가진 인물이 없는 셈이다.

박 전 원장은 자신의 인지도가 민주당 내 거론 인사들 중에서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정치권 관계자도 “민주당의 지도부, 차기 당 대표로 오르내리는 사람이 박 전 원장에 비해 급이 떨어진다는 게 그의 생각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언급되는 인물들이 정치력도 부족하고,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 때문에 당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려 한다는 게 이유다. 또 자신의 몸값을 띄우기 위한 것으로 읽히는 가운데 민주당에서 그에게 역할을 제시하길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등판만 한다면 당내서 중재자 역할은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친명 세력과도 DJ 계열인 박 전 원장이 척을 지려고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는 민주당 내 대세가 이 의원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정치권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민주당과 박 전 원장의 물밑 접촉은 활발하다. 다만 민주당 입장에서는 박 전 원장 카드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민주당 내부적으로 박 전 원장의 이미지가 좋은 편이 아닌 탓이다.

박 전 원장이 완벽한 민주당 편이라는 분위기도 크지 않다. 정치 9단으로서의 중재자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을 하게 될 경우 국민적 신망을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다만 당장 국정원장직을 마무리한 뒤 정치권에 등장했다는 점에서는 새롭지 않다는 평가가 내려질 수 있다. 박 전 원장이 민주당의 빈틈을 파고든 이유는 민주당 지도 체제가 붕괴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나름의 역할론을 제시해 구심점 역할을 하고 활동영역을 넓히려는 시도라고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지도부가 탄탄했다면 박 전 원장의 역할론 자체도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구심점 
역할론

한 정치권 관계자는 “박 전 원장 스스로는 당 대표설 등에 선을 긋고 있지만 사실상 원하는 것과 다름없는데 이는 노욕”이라며 “본인 스스로 말하긴 어렵고, 민주당에서 등 떠밀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도부에 참여하고 싶은 의지를 강하게 표현한 셈”이라고 해석했다. 

<ckcjfdo@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박지원 복귀와 악재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이 정치 복귀를 선언했지만 상황은 순탄치 않은 모양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가 박 전 원장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가 인정된다며 재판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탓이다. 

공수처 수사2부는 공직선거법 및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로 박 전 원장에 대해 공소 제기를 검찰에 요구했다. 

공수처는 박 전 원장이 지난해 언론과의 인터뷰서 윤 전 총장이 “윤우진 사건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관련 자료를 가지고 있다”는 취지로 언급한 바 있다.

공수처는 박 전 원장의 발언이 국민의힘 대선 경선 과정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봤다. 

최근에는 국정원 X파일과 관련해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을 언급해 논란이 일었다.

하 의원은 “나누지도 않은 대화를 날조해 국민과의 신뢰에 흠집이 났다. 국가 기밀을 언론 관심 끌기용으로 이용한 행위”라며 박 전 원장에 대해 법적 대응을 시사했다.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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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