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윤석열 당선인 파란만장 인생사

희로애락 드라마 같은 62년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제20대 대선. 그 대장정의 끝은 5년 만의 정권교체였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상대로 0.73%p 차이로 신승을 거뒀다. 그가 정치를 시작한 지 불과 8개월 만의 일이다. 사시 9수생이 특수통 강골 검사로 거듭났고, 좌천됐다가 검찰총장으로 파격 영전했다.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다 사퇴한 뒤에는 1년 만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렇듯 윤 당선인의 인생역정은 유난히 파란만장했다.

윤 당선인은 1960년 12월18일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서 태어났다. 윤기중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와 최성자씨 사이의 1남1녀 중 첫째다. 유복하고도 학구적인 가정환경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서울 대광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목사가 되고 싶었다. 

각종 위기 극복
야 결집 진땀승

또래보다 큰 덩치에 골목대장을 도맡아 했고, 똘똘하다는 뜻의 ‘돌돌이’로 불렸다. 이어 충암중학교, 충암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979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 유명한 일화로는 ‘전두환 모의재판’ 사건이 있다. 5·18민주화운동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던 1980년 5월, 윤 당선인은 학생회관에서 열린 교내 모의재판에 피고로 선 전두환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는 그 후폭풍으로 석 달간 강원도 강릉 외가로 피신해야 했다.

대학 4학년 때 사법시험 1차를 통과했다. 교수가 되고자 했던 그는 ‘사시에 붙고 유학을 다녀오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2차 시험에서 연거푸 낙방하면서 최종 합격까지는 총 9번의 도전이 필요했다. 그는 SBS 예능프로그램 <집사부일체>에 출연해 “온 동네 관혼상제를 다 챙기고 다녔다”고 회상했다.


이어 “9수 시험 직전에도 대구에서 결혼하는 친구 함을 지러 갔다”며 “그때 고속버스에서 봤던 비상상고가 이례적으로 시험에 나온 덕에 합격했다”고 말했다.

비상상고란 검찰총장만 청구할 수 있는 형사소송법상 고유권한이다. 후에 윤 당선인은 이를 두고 “운명”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1991년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윤 당선인은 3년 뒤인 1994년 사법연수원을 제23기로 수료한다. 당초에는 변호사 개업을 염두에 두고 ‘3년만 경험해보자’는 생각으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 결심은 26년이라는 기나긴 공직생활로 귀결됐다.

첫 발령지는 대구지방검찰청이었다. 이후 약 8년간 각지 지검‧지청을 거치며 무난한 이력을 쌓았다. 2002년 1월에는 검사복을 벗고 대형 로펌 ‘태평양’에 들어갔다. 하지만 윤 당선인은 1년 뒤 다시 광주지검으로 복귀하며 검사 생활을 이어간다.

“검찰청 복도에서 나는 짜장면 냄새가 그립다”는 게 그 이유였다. 참여정부에 들어서는 굵직한 특수 사건들을 연달아 맡으며 일명 ‘특수통 칼잡이’로 거듭났다.

정권 초기인 2003년에는 SK 분식회계 사건, 불법 대선자금 사건을 맡았다. 대선자금 수사에서는 당시 ‘살아 있는 권력’이었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인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와 고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등을 구속하기도 했다.

2006년 현대차그룹 비리 사건 때 “정몽구 전 회장을 구속하지 않으면 사표를 내겠다”며 지휘부에 맞선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에도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론스타 사건), 2007년 삼성그룹 비자금 사건, 한나라당대통령후보범죄혐의진상규명특별검사(일명 BBK특검) 수사에 모두 참여했다.

0선 정치 8개월 ‘왕초보’
뚝심 하나로 대권 잡았다

이때 수사 능력을 인정받아 이명박정부 들어서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와 서울중앙지검 요직을 두루 거쳤다. 윤 당선인이 이명재‧정상명 등 당시 검찰총장들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법조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일반 대중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은 것은 2013년. 박근혜정부 때 국정원 댓글 사건을 수사하면서다. 수원지검 여주지청장으로 있다가 해당 사건의 특별수사팀장을 맡았다.

그는 검찰 수뇌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정원 직원들의 체포·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했다. 국정원 압수수색은 헌정사상 최초였다. 아울러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등은 공직선거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했다.

이에 검찰 수뇌부는 윤 당선인을 수사팀에서 배제했다. 영장 청구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게 명분이 됐다.

윤 당선인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을 직격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황 장관이 수사 지휘권을 틀어쥐고 있다며” “법무부와 검찰 일부에서 다른 뜻이 있는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당해 10월 열린 국정감사 증인으로 출석해 조영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과 입씨름을 벌이기도 했다. 윤 당선인은 국감장에서 “수사 초기부터 ‘외압’이 있었다”면서 “대놓고 ‘야당 도와줄 일 있느냐’는 질책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발언도 남겼다. 그가 대중들의 눈에 ‘강골 검사’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정권에 밉보인 그는 지방 고검 한직으로 사실상 좌천됐다. 대구고검과 대전고검 검사로 재직하며 4년간 야인으로 지냈다. 이맘때 민주당에서 총선 출마 권유를 받기도 했지만 고사했다. 그는 “검찰에 남아 후배들을 챙겨야 한다” “후배들이 나를 ‘정치 검사’로 보지 않겠느냐”고 고사의 변을 밝혔다.

정권 밉보여 
사실상 좌천

그의 특수통 이력은 사실상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인고의 시간을 버텨내며 끝내 화려하게 재기한다. 2016년 탄핵 정국에 들어 최순실등국정농단특별검사(일명 최순실 특검) 수사팀장을 맡게 되면서다. 


이른바 ‘촛불 혁명’의 중심에 서게 된 그는 문재인정부 들어 파격과 출세의 상징이 됐다. 출범 직후인 2017년 5월, 윤 당선인은 ‘검찰의 꽃’으로 불리는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영전한다. 검찰 내 기수와 서열문화에 철저히 반하는 파격 인사라는 평가가 검찰 안팎에서 나왔다.

전임자인 이영렬 전 서울지검장은 사법연수원 18기 출신으로 윤 당선인과 다섯 기수 차이였다. 동기나 후배 기수가 총장이나 고검장으로 올라서면 스스로 물러나는 검찰의 ‘용퇴’ 관행을 고려하면, 청와대가 윤 당선인을 이용해 고위직 검사들에게 사실상의 거취 압박을 가한 것이라는 분석이 쏟아졌다.

이처럼 윤 당선인은 문재인정부 초기 적폐 청산의 ‘칼’ 그 자체이자 ‘칼잡이’였다. 존재 자체만으로 검찰개혁의 초석을 놓은 것에 이어,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수사를 진두지휘해 중형을 이끌어냈다. 박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줬다는 혐의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기소했고,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수감시켰다.

윤 당선인은 2019년 6월 차기 검찰총장으로 지명됐다. 문 대통령은 야당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임명을 강행했다.

고민정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윤 지검장은 검사로 재직하는 동안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권력의 외압에 흔들리지 않는 강직한 모습을 보여줬다”며 “윤 지검장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은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를 뿌리 뽑고, 시대적 사명인 검찰 개혁과 조직 쇄신 과제도 훌륭히 완수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인선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청와대의 바람과는 달리, 윤 당선인은 검찰개혁 계획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양측은 검찰개혁 계획의 핵심으로 꼽히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을 두고 정면충돌했다.


윤 당선인은 “살아 있는 권력도 엄정히 수사하라”는 문 대통령의 당부를 그대로 따르며 청와대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월성 원전 경제성 조작 의혹 등에 칼끝을 겨눴다.

골목대장 ‘돌돌이’
9수 끝 강골 검사로

특히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에 대한 전방위 수사를 고수해 여당과 정부의 눈엣가시가 됐다. 조 전 장관 딸의 입시비리 의혹, 부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의 사모펀드 의혹 등을 집중적으로 수사했다. 윤 당선인은 당시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조 전 장관 일가 수사에 대한 의견을 나눈 뒤 “수사를 안 하면 우리가 검사냐”며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다고 알려졌다.

조 전 장관의 후임자인 추미애 전 장관이 윤 당선인에게 공공연한 거취 압박을 가하면서 갈등은 더욱 격화됐다. 윤 당선인은 다시 국정감사에 출석해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갔다.

그는 추 전 장관의 수사 지휘권 발동을 두고 “(검찰)총장은 (법무부)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측근들이 모두 좌천당한 인사 결과에 대해서는 “전례가 없는 인사”라고 반발했다. 이 같은 추‧윤 갈등은 추 전 장관이 윤 당선인에게 검찰총장직 직무 정지를 명령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법무부 검사 징계위원회는 그에게 정직 2개월 처분을 내렸다.

윤 당선인은 두 건 모두 행정소송 제기로 응수했다. 결국 법원이 가처분신청을 인용하면서 총장직에 복귀했다. 하지만 지난해 3월, 결국 스스로 물러났다. 임기 종료까지 넉 달가량 남은 시점이었다.

그는 사퇴하면서 “정의와 상식이 무너지는 것을 더는 볼 수 없다”며 “검찰에서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라는 말을 남겼다. 윤 당선인은 이미 사퇴 이전부터 반문(반 문재인) 세력의 중심으로 떠오른 지 오래였다. 정치 입문 선언은 시간문제라는 분석이 줄을 이었다. 차기 대권주자 여론조사에서는 줄곧 선두를 달렸다.

문정부 초
기사회생

그는 사퇴 후 석 달간 잠행을 이어갔다. 그동안 각계 원로와 전문가를 두루 만나며 실력 쌓기에 주력했다. 그리고 지난해 6월29일, 대권 도전을 공식 선언했다. 그는 이날 “공정과 상식이라는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정권교체를 이뤄내겠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출마 선언 직후부터 그는 국민의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받았다. ‘윤석열 X파일’과 처가 비리 논란, 고발 사주 의혹 등 각종 검증에 시달린 탓이다. 도덕성 리스크가 급부상하는 동시에, 여의도 문법과 동떨어진 과감한 화법으로 각종 발언이 줄곧 입방아에 올랐다.

한 달 뒤 국민의힘에 전격 입당한 후에도 부침은 계속 이어졌다. 입당 직후부터 불거진 당 대표 ‘패싱’ 논란부터 전두환 옹호 논란, ‘개 사과’ 논란 등이 잇따라 터지면서 갖은 위기를 맞았다.

홍준표·유승민·원희룡 등 당내 유력 경쟁주자들이 논란과 처가 비리 의혹 등을 묶어 융단폭격을 가했다. 그럼에도 윤 당선자는 압도적인 당내 지지율을 유지하는 저력을 보였다. 심지어 보수 궤멸에 앞장섰다는 주홍글씨와 박 전 대통령 구속 책임론마저 버텨냈다.

결국 윤 당선인은 당내 경선에서 홍준표 의원의 맹추격을 따돌리고 승리했다. 여론조사에서 수세에 몰렸지만, 탄탄한 당내 지지를 끝까지 지킨 것이 주효했다.

우여곡절 끝에 당 대선후보가 됐어도 원팀 구성은 요원한 일이었다. 계속 지적돼왔던 당 대표 패싱 논란이 더욱 심화됐고, 함께 터진 윤석열 핵심 관계자(윤핵관) 리스크도 골칫거리였다. 경선 패배로 내상을 입고 칩거에 들어간 유승민 전 의원, 홍준표 의원 등의 적극적인 협력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여기에 야심차게 구성했던 매머드급 선대위에서도 각종 논란이 쏟아지자, 경선 승리 직후 40%를 넘겼던 지지율이 20%대까지 수직 하락하면서 다시 위기를 맞게 됐다.

화려한 인생 2막 열어
새로운 드라마 써낼까?

윤 당선인은 ‘선대위 해산’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김종인 전 총괄선대위원장과 과감하게 결별하고, 실무형 선대본부로 체질 개선에 주력했다. 이준석 당 대표와의 갈등은 울산 회동, 의원총회장 방문 등 직접 뛰며 봉합에 나섰다.

삼고초려 끝에 유승민 전 의원과 홍준표 의원의 합류도 성사시켰다.

이후 윤 당선인은 빠르게 지지율을 회복했다. 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의 지지율이 답보상태에 빠진 것을 틈타 그간 잃었던 부동층 지지율을 다시 거둬들였다. 호남·MZ세대 등 기존에 보수정당을 등한시하던 유권자들을 집중 공략하며 소구력을 높이는 전략을 지속적으로 구사했다.

선거 막판 이 후보와의 지지율 격차가 오차범위 내로 나타나는 초접전이 이어지자,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선후보와의 단일화를 통해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 전까지 야권 단일후보 논의는 국민의당의 결렬 통보, 국민의힘의 협상 내용 공개 등으로 공전을 거듭해왔다.

윤 당선인은 심야 회동을 통해 안 전 후보의 마음을 돌렸다. 안 전 후보는 사전투표 전날 오전, 자진사퇴 후 윤 당선인 지지를 천명했다.

단일후보를 배출한 보수 야권 일각에서는 윤 당선인의 낙승을 전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투표 당일 뚜껑을 열어보니, 역대급 박빙 결과가 나왔다. 윤 당선인과 이 후보 간의 표차는 단 24만7000표. 득표율은 0.73%p 차이에 불과했다.

윤 당선인은 승리가 확실시된 지난 10일 오전 4시30분경 서울 여의도 국회에 마련된 국민의힘 대선 개표 상황실에 방문해 당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의회를 존중하고 야당과 협치하면서 국민들을 잘 모시겠다”며 “빠른 시일 내에 합당을 마무리 짓고 외연을 넓혀 더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게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고비마다
먹힌 승부수

지난 26여년간 검사로서 드라마 같은,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겪어온 윤석열 당선인. 정치인으로 환골탈태한 지 8개월 만에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인생 2막의 초입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다만 앞길은 가시밭길이다. 여소야대 정국·코로나 시국 수습 등 각종 난제가 산적해 있다. 과연 ‘대통령 윤석열’은 어떤 해법을 제시할까. 온 국민의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jeongun15@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새로 쓴 윤석열 대선 기록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제20대 대선에서 승리와 함께 각종 최초·최고 기록들을 받아들었다.

우선 윤 당선인은 직선제 시행 이후 최초로 ‘10년 주기설’을 깬 후보로 기록됐다.

윤 당선인 이전에는 노태우-김영삼, 김대중-노무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등 보수와 진보 진영이 각각 10년마다 정권을 주고받았다.

또 1639만4815표를 받으며 역대 최고 득표수를 갱신하고도 역대 최소 표차·득표율 차를 기록하는 진풍경도 연출했다.

종전 기록은 제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1577만3128표와 제15대 대선 당시 김대중·이회창 후보 간의 39만557표(1.53%p) 차였다.

‘서울대 법대 필패론’ 징크스도 최초로 깨트렸다.

지금까지 서울대 법대 출신들의 대권 도전은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이번 선거를 포함하면 이회창·이인제·이낙연·최재형·원희룡 등 서울대 법대 졸업생들이 대권에 도전한 바 있다.

이외에도 윤 당선인은 최초의 0선 출신 대통령, 최초의 서울 출생 대통령, 최초의 검사 출신 대통령 등의 타이틀도 거머쥐었다.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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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