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세의 골프 인문학> 골프를 대하는 대통령 온도 차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골프를 가장 많이 즐겼다. 그만큼 골프에 관한 한 말도 많았다. 전 전 대통령은 1983년 청남대에 파4 홀 2개 크기 부지에 5홀의 그린을 만들어 9홀 플레이가 가능하도록 설계했다.

간이 골프장은 파3, 140m인 9홀을 제외한 나머지 홀을 2홀씩 짝을 지어 그린 하나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이중 그린 형태였다. 5번과 8번 홀은 각각 353m, 355m 거리의 파5 홀이었고, 파3 2개, 파4 홀 5개 등으로 구색을 갖췄다.

담 쌓거나

골프 마니아였던 전 전 대통령은 정석 스윙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담당 캐디들에 의하면 드라이버 비거리가 250m에 달했고, 핸디는 80대 중반이었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골프를 많이 자제했다. 덕분에 공무원들도 눈치를 보면서 골프를 쳐야 했다. 측근이 애로사항을 전하자 그는 “내가 언제 골프를 치지 말라고 했나”라며 “한 번 나가면 경호 비용까지 400만원을 써야 하니 나만 안 치겠다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주최로 골프대회를 열고 군 인사를 초청하는 등 나름대로 골프를 장려했다. 다만 일부 측근은 “일은 안하고 골프만 쳤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핸디를 조절하기도 했다.


전두환, “나만 안 하겠다”
김영삼, 혹독했던 금지령

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골프를 더 많이 쳤고, 구설수에도 많이 올랐다. 1992년 6월16일 퇴임 이후 처음으로 경기도 화성의 기흥골프장에서 5공 시절 각료들의 모임인 무궁화회 27명 회원이 모인 가운데 골프대회가 열렸다.

그는 조용히 골프를 치기보다는 대규모 인원을 동원해 시끌벅적하게 골프를 쳤다. 골프장 측은 전두환의 일행들이 골프를 칠 때는 늘 앞뒤 한 홀을 비워 그의 라운딩 리듬이 끊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배려를 했다.

‘대통령 골프’라는 신조어는 이렇게 전 전 대통령에 의해 만들어졌다. 1994년 현 블루원 용인의 전신인 태영 골프장에서 일어난 해프닝이다. 그날따라 골프장 측이 유난히 회원들을 재촉했다. 헐레벌떡 라운딩을 마친 회원들이 씩씩거리며 불만을 터뜨렸다.

알고 보니 전두환 일행 8팀(경호원 2팀, 이순자 2팀, 전두환 2팀, 다시 경호원 2팀)이 골프를 시작했는데, 골프장 측이 앞뒤로 한 홀씩을 더 비우면서 총 10개 홀을 차지한 것이었다.

가진 재산이 29만원에 불과했다던 그는 무려 30여곳의 골프장에서 VIP 대접을 받으면서 20여년간 골프를 즐겼다. 그는 개별 소비세와 교육세 2만원만 내고 골프를 쳤다. 경기도 용인 아시아나 소유 컨트리클럽, SK그룹 소유 제주 핀크스, CJ그룹 소유 제주 나인 브릿지, GS그룹 소유 앨리시안 컨트리클럽 등이 전직 대통령 예우를 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가족이 보유했던 회원권이 골프장 시세 흐름에 변동을 줄 정도였다. 차남인 전재용씨와 처남 이창식씨 부부가 소유했던 서원밸리 회원권만 142장에 달했다. 한 장에 1억7000만원이던 회원권은 총액수만 200억원에 가까웠다.


전 전 대통령은 골프장에서 인심이 후했다. 라운딩 도중 풀을 뽑는 아주머니를 보면 즉석에서 금일봉을 전달하기도 했으며, 프로 선수들에게도 후한 용돈을 주곤 했다.

그의 부인은 강남 300클럽 모임에서 홀인원 기념으로 고가의 나무를 심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2012년 8월 한 달 간 대부도의 아일랜드 리조트에서 장세동 전 경호실장 등과 함께 라운딩을 하며 측근들과 파티를 열기도 했다.

9사단장 시절부터 골프를 친 노태우 전 대통령은 테니스와 럭비 등을 섭렵했던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그의 재임 시절 전국의 골프장 허가 건수만 138건에 이르자, 노태우정부를 두고 ‘골프 공화국’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김대중, 골프 대중화 앞장
노무현, 진지한 스윙 연습

하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은 ‘보통 사람’이라는 이미지 관리 때문에 서너 달에 한 번 정도만 골프를 친 것으로 알려졌다. 핸디캡은 20 수준이고, 주로 청와대 골프 연습장에서 김옥숙 여사와 함께 부부 라운딩을 즐겼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골프와 담을 쌓았다는 이미지와 달리, 때때로 골프는 즐겼다. 통일민주당 총재 시절인 1989년 10월에는 김종필 전 총리와 안양 베네스트골프장의 전신인 안양CC에서 27홀을 라운딩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드라이버를 치면서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로 문외한이었지만, 골프를 치면서 정치적 이해관계를 풀었다. 김종필, 노태우, 김영삼 세 사람은 골프 회동을 거쳐 3당 합당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재임 시절에는 오히려 골프 금지령을 내렸고, 공직자와 모든 공무원에게 골프를 금지시켰다. 골프를 사치성 스포츠로 몰아 많은 세금까지 물리게 했고, 청와대 골프 연습장까지 철거했다. 자신도 대통령에 당선된 뒤부터 골프와 담을 쌓고 지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골프 대중화에 앞장섰다. 그의 재임 시절에 골프가 귀족 놀이가 아닌 레저 스포츠로 인식되면서 차차 대중들에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몸이 불편해 자주 골프를 즐기지 못했지만, 골프에 대한 배려는 역대 어느 대통령 못지않았다. 재임 시기는 박세리, 최경주, 박지은, 김미현 등 골프 1세대들이 미국에서 활약하던 때와 맞물린다. 그는 미국에서 선전하던 프로선수들을 청와대에 초청해 격려하기도 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골프 대중화에 앞장섰다. 1983년 만들어 진 이후 20년간 대통령 전용 골프장으로 쓰였던 청남대를 개방했고, 2005년 충남 계룡대에 골프장과 별장이 만들어졌다.

청남대 개방을 앞두고 각 정당 대표를 초청해 라운딩을 하기도 했다. 전반 9홀의 스코어는 53타로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라운딩 후 소감에서 골프를 ‘재미있는 운동’으로 말했다. 그럼에도 재임 기간에 그다지 골프를 많이 접하지 못했고, 늘 100타 수준이었다.


태릉CC에서 생전 처음으로 94타를 쳤던 것으로 전해진다.

권양숙 여사는 남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의 보기 플레이어 수준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골프 스승까지 자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인의 응원에 힘입은 노 전 대통령은 골프책과 비디오 등을 통해 스윙을 분석했다.

즐기거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안 골프보다는 테니스를 즐긴 대통령이었다. 골프는 그가 현대 그룹에 근무하던 시절에 자주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래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라운딩에서 정 회장이 홀컵에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컨시드를 안 주고 “마무리하시죠”라고 말해 동반자들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의 핸디는 80타 중반 정도로 수준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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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