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정인균 기자 = 지난 33년간 중요한 고비마다 맞상대로 만나온 두 원로 정치인이 있다.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과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전 대표다.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은 대한민국 정치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 온 인물들이다. 총 세 차례 만났던 두 사람이 이번 대선에서 다시 한 번 더 만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네 번째 대결이 과연 이뤄질까?
2022년 대선은 비(非) 여의도 출신 후보 간의 대결로 화제를 모았다. 지방 행정직 출신의 여당 후보와 검찰총장 출신의 제1야당 후보의 대결은 변화를 바라는 국민들의 염원이 담긴 구도였다. 그러나 이 같은 신선한 구도가 점점 퇴색돼가는 모양새다. 각 선거대책위원회(이하 선대위) 선봉장에 구시대 인물들이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투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선대위의 총괄선대위원장으로 거론되고 있고, 이재명 선대위에 상임고문으로 명예직에만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는 캠프를 진두지휘할 구원투수로 등판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김 전 위원장의 윤석열 선대위 합류는 이미 기정사실화돼가는 분위기다. 선대위 구성에 대한 사소한 이견 차이만 극복하면, 김 전 위원장은 다음 주에 발표될 윤석열 선대위의 가장 힘 있는 자리로 갈 가능성이 높다.
김 전 위원장과 윤 후보의 사이는 대선 출마 선언 전부터 이미 뜨거웠다. 지난 5월 김 전 위원장은 “윤 총장만큼 현 정부에서 용감한 사람이 없다. 정부가 뭘 잘못했는지에 대해 소신을 갖고 얘기하는 사람”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그는 홍준표 의원과 치열한 경쟁을 펼쳤던 경선 당시에도 “이번 대선은 이재명 대 윤석열이 될 것”이라며 사실상 지지를 선언했다.
윤 후보도 그에게 꾸준히 러브콜을 보내왔다. 지난 7월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은 가까운 시일에 한 번 뵙겠다. 휴가 다녀오시면 뵐 생각”이라며 경선 캠프를 꾸리기 전부터 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지난 15일에는 김 전 위원장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아예 공개적으로 러브콜을 보냈다. 윤 후보는 “‘소방수’ 역할을 하실 때가 다가오고 있다”며 선대위 영입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김 전 위원장도 “그런 계기가 있으면 도와줄 수 있다”고 화답했다. 김 전 위원장의 합류가 거의 정해지자, 이 전 대표 등판설도 솔솔 올라오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의원은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이 전 대표의 등판론을 처음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그는 “김종인 이름이 많이들 왔다 갔다 하는데 그러면 민주당에도 그런 장악력이 센 인물이 누가 있겠는가. 이해찬 전 대표가 아니겠느냐”며 “내부적으로 의원들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말했다.
지난 17일에는 이 후보가 직접 이 전 대표와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만찬 회동을 가졌다. 지지율 정체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이 후보는 여러 방법으로 반전을 시도하고 있다.
이재명 선대위는 “이날 이 전 대표에게 자문을 구한 정도에서 끝났다”고 밝혔지만,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부탁하는 데에 있어서도 긍정적인 입장이라 전했다.
신선한 대결 기대했는데…또 둘이야?
중요한 고비마다 맞상대 “이번이 끝”
김 전 위원장이 윤석열 선대위에 공식 합류한다면, 이 전 대표의 등판도 초읽기에 들어갈 전망이다. 김 전 위원장을 견제할 만한 인사는 현재 민주당에서는 이 전 대표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치 경륜이나 영향력에 있어서 둘만큼 비슷한 인물이 없다. 둘의 관계 또한 오래된 앙숙 사이로 인연은 3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둘은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 지역을 두고 맞상대로 처음 만났다.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 소속의 김 전 위원장은 김대중 총재가 이끌던 평화민주당의 정치 새내기 이 전 대표를 상대로 만났다.
결과는 이 전 대표의 승리로 끝났지만 불과 5000여표 차이의 초접전이었다. 이후 이 전 대표는 관악을에서만 내리 5선을 하는 중진 의원으로 성장했다. 경쟁상대로 만난 악연이긴 했지만, 이때까지는 감정이 상할 만큼 사이가 안 좋았던 건 아니었다.
본격적인 악연은 제20대 총선에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민주당의 전권을 쥐고 있던 김 전 위원장이 이 전 대표를 공천에서 배제하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6선이었던 중진의 이 전 대표를 배제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공천 탈락 이유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김 전 위원장은 “정무적 판단을 어떻게 언론에 이야기하겠나”라며 둘러댔지만, 당의 쇄신을 최우선 과제로 내건 김 전 위원장이 ‘친노(친 노무현)의 좌장’이라 일컬어지는 이 전 대표를 의도적으로 컷오프한 것이 아니냐는 평가가 이어졌다.
친노 세력을 제거해 당내 계파 갈등을 최소화시키려 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전 대표는 김 전 위원장의 결정에 반발해 당을 나와 무소속으로 세종에 출마 후 당선됐다. 그는 몇 개월 뒤 민주당으로 복귀했다.
두 인물은 4년 후 제21대 총선에서 여당과 야당의 장수로 재회한다. 공천 배제의 아픔을 겪은 이 전 대표는 당시 당 대표로 취임해 민주당의 총선을 총괄하고 있었고, 미래통합당에 재차 영입된 김 전 위원장은 비상대책위원장직을 맡으며 이 전 대표의 맞상대가 됐다.
21대 총선에선 의석 수 과반 이상인 177석을 확보한 민주당이 대승리를 거뒀다. 세 번째 만남에서도 이 전 대표가 승리한 것이다.
만약 이번 대선에도 출전한다면, 네 번째 맞대결이 성사되게 된다. 현재 스코어는 2:1로 이 전 대표가 한 발 앞서 있다.
김 전 대표의 선대위 합류는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지만, 친문(친 문재인)의 이 전 대표가 비문(비 문재인)인 이 후보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지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만약 이 전 대표가 김 전 위원장에 대한 앙금이 아직 남아 있다면 직접 나설 가능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윤 후보에게는 ‘킹메이커’로 알려진 김 전 위원장의 도움이 절실해 보이고, 문제가 많다고 평가되는 이재명 선대위에는 이 전 대표 같은 확실한 컨트롤타워가 필요해 보인다.
지겹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재대결을 보고 싶지 않은 국민들도 있다. 또 다시 과거로 돌아가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대선이 되는 걸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전 대표와 김 전 위원장이 돌아온다면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 돼야 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대대적인 개혁을 바라는 국민들의 염원이 이번 대선에서 이뤄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ingyun@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