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세의 골프 인문학> 그렉 노먼의 파란만장 골프 인생

세계 최고의 선수였으면서 메이저대회에서는 지독하게 운이 없었던 호주의 그렉 노먼이 1986년에 있었던 마스터즈를 훗날 세인들은 ‘노먼의 토요 슬램’이라고 불렀다. 노먼은 골프 세계랭킹 1위에 오른 골프 선수였으며, 비즈니스 제국이라 불릴 만큼 막대한 부를 쌓은 세계 최고의 사업가였다.

 

하지만 어거스타에서의 쓰라린 상처는 평생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청년 시절 서핑을 하다가 상어를 때려잡은, 금발의 냉철한 킬러 같다고 붙여진 별명 ‘백상어’. 프로 골퍼 이상의 실력가인 어머니에 의해 16세라는 늦은 나이로 처음 골프채를 잡은 그는 불과 1년 만에 스크래치 골퍼가 되는 자질을 보이며 5년 뒤인 1976년 프로에 입문하면서 이듬해엔 유럽 상금랭킹 1위로 미국에 진출하게 된다.

불운의 아이콘

비록 미국에서의 첫 우승이 다소 늦은 1984년에 있었지만 과감한 경기 스타일로 많은 팬을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1986년 마스터즈. 3일 내내 노먼은 선두를 달리면서 4일째를 맞았다.

세비 바예스테로스와 잭 니클라우스, 탐 카이트 등이 끈질기게 따라 붙었지만 전반 9번 홀까지 노먼은 리드를 지키고 있었다. 후반 첫 10번 홀. 어이없는 더블보기를 범하면서 노먼에게 불행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승부가 갈린 17번 홀. 극적으로 버디를 잡은 잭이 한 타차로 따라붙었다. 18번 홀에서 노먼은 적어도 파만하면 우승이었다. 하지만 세컨 어프로치 샷이 그만 홀을 지나면서 관중석에 떨어지고 만다.


‘수십 년간 해오던 어프로치 샷이 왜 하필’ 노먼은 입술을 깨물며 자책 해야 했다. 결국 보기를 범하면서 잭과 플레이오프에 돌입한 상황.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기싸움에서는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위대한 백상어’였지만 결국 잭에게 승리를 넘겨줌과 동시에 잭으로 하여금 46세라는 나이에 메이저를 차지함은 물론, 통산 메이저 18승이라는 위대한 기록을 남기게 만들어 준 조연이 돼야 했다.

두 달 뒤 뉴욕 쉬네콕 힐에서 열린 US오픈. 노먼은 역시 3일째 54홀까지 선두를 지키며 마지막 날을 맞았다. 하지만 골프의 여신은 또다시 그를 외면했다.

지독하게 운이 없었던 2인자
떼기 힘든 ‘토요 슬램’ 꼬리표

4일째 경기에서 노먼은 무려 75타를 쳐, 66타를 친 레이몬드 플로이드에게 우승을 넘겨줘야 했다. 실망은 이루 표현할 수 없었지만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는 스코틀랜드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턴베리에서의 디오픈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기일전한 노먼은 역시 3일째 경기가 끝난 뒤 선두에 올랐다. 하지만 일요일 아침 골프장에 나온 그는 두려움이 앞섰다. ‘지난 두 차례의 징크스가 또 재현되는 걸까?’

하지만 영국에서의 징크스는 다행히 없었다. 2위와 5타차를 유지하며 노먼은 비로소 여유 있는 우승을 한 것이었다. 생애 첫 메이저 우승으로 노먼은 비로소 ‘톱’ 선수로 인정을 받게 됐다.

1986년의 마지막 메이저가 열린 미국 오하이오의 인버네스골프장. 디 오픈의 기운이 그대로 전달된 듯 노먼은 이 대회에서도 3일 내내 70타를 밑도는 65-68-69타의 선두로 4일째를 맞았다.


미국에서의 징크스가 다시 살아난 것일까. 마지막 날의 재앙은 시작되고 있었다. 76타로 무명의 밥 트웨이에게 2타차로 허무하게 우승을 넘겨주면서 1986년 한 해의 메이저에서 54홀을 리드하고 지켜내지 못한 최초의 선수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4라운드 작아진 백상어
남달랐던 사업 수완

사람들은 이를 가르켜 ‘노먼의 토요 슬램’이라고 불렀다. 다만 세계 상금랭킹 1위의 타이틀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메이저와의 악연은 다음 해에도 이어졌다. 1987년 마스터즈 연장전 2번째 홀에서 래리 마이즈가 칩샷으로 버디를 하자 그린에 올려놓고도 우승을 놓쳤는가 하면, 1989년 마스터즈에선 닉 팔도에게 한 타차로 패했다.

마스터즈가 외면한 그의 마지막 불운은 1996년이었다. 역시 3일째 선두로 이번에는 2위와 무려 6타차. 하지만 4일째 경기는 이전의 징크스보다 더 지독했다. 2위 닉 팔도가 67타를 친 반면 노먼은 최악의 78타를 쳤다. 두 사람 간에 무려 11타차가 난 것. 마스터즈의 신이 장난을 치지 않고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모두들 경악했다.

30년 골프 인생에서 위대한 선수의 반열에 올랐지만 노먼은 마스터즈의 신으로부터는 외면을 당하고 말았다. 노먼의 또 다른 일화 하나를 더 소개해본다.

 

2010년 플로리다주에 위치한 쥬피터 섬. 타이거 우즈의 5백억 원짜리 대저택 등 세계적 갑부들만 살 수 있는 섬의 호화 골프장인 메달리스트 코스에서 그렉 노먼이 연습라운딩을 하고 있었다. 12번 홀에 다다를 즈음 휴대폰이 울렸다. 리복 인터내셔널의 CEO 폴 파이어맨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노먼이 소유하고 있는 리복과 아디다스-살로몬사 간의 인수합병 작업에 난항이 예상된다는 보고였다.

나무 그늘에 잠시 앉아 노먼은 20여분을 소비했다. 그의 휴대폰은 쉴 새가 없었다. 이번에는 노먼 어패럴의 인터내셔널 책임자인 바트 콜린스였다. 호주 본사에서 날아온 골프의류 ‘그레이트 샤크’ 책임자와 내일 오전 미팅이 있다는 통보였다.

전화통에 불이 나면서도 어찌어찌 18홀을 끝내고 이제 클럽하우스로 가서 대기 중인 와인생산 책임자를 만나야 했다.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에 있는 노먼 소유의 와이너리에서 생산된 새로운 5종의 시음을 위해서였다.

그를 통하지 않고 시판되는 와인은 없을 만큼 와인 전문가였던 그는 미국과 호주에 거대한 와인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1970년대 유럽에서 선수 생활을 하면서부터 와인에 심취돼 있었던 그는 호주에서만도 한해 20만 상자가 넘는 와인을 팔 정도로 호주 와인을 세계에 펼쳐놓은 장본인이기도 했다.

클럽하우스에서 시음한 5종의 와인이 노먼으로부터 합격점을 받자 와인 책임자는 가벼운 목례로 경의를 표했다. 저녁 식사 이후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출판사를 통해 제작될 ‘프로골퍼와 기업운영’의 마지막 수정원고까지 읽어야 했다.

사업에는 남다른 기질이 있었던 노먼은 현존하는 프로골퍼 중 최고의 세계적 갑부로 제국에 버금갈 정도였다. 골프 관련 의류업만 해도 지난해 한화 20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부동산 투자만 해도 호주를 비롯해 1만 군데가 넘는 골프장 안에 체인 레스토랑과 주택을 짓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한화 5조원에 달하는 인수자금이 필요했던 골프클럽제조사 킹코브라를 비롯해 몇 개의 골프클럽 회사도 보유하고 있다.

은퇴 후 전성기

골프장 디자인 사업과 미국에 여러 곳의 골프장을 건설하고 소유하고 있음은 물론이어서 사람들은 그의 사업적 기질에 혀를 내둘렀다. 사업은 앞을 내다보고 꼭 투자할 곳에 해야한다는 그는 “아놀드 파머가 내복 사업, 세차장 등등 너무 이름을 남발했으며, 잭 니클라우스는 대중들에게 어필되지 못했고, 무분별하게 부동산에 과잉 투자를 했다”면서 시행착오를 한 선배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노력했다.

미국인 스튜어디스와 첫 결혼 후 2년, 테니스 스타 크리스 에버트와 재혼 후 1년, 2010년 인테리어 디자이너 커스텐 커트너와 3번째 결혼을 한 그는 비록 마스터즈에서는 치욕을 맛보았지만 세계적인 재벌 중의 재벌로 보상받고 있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