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초대석> 소녀 티 벗은 '소시 출신' 권유리

물오른 연기력 ‘배우를 훔치다’

[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유리는 걸그룹 소녀시대 멤버로 가수가 된 지 15년 차다. 소녀시대의 일원으로 한류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 시대의 아이콘으로 정점에서 빛을 발했다. 하지만 별의 빛이 영원하지는 않은 법. 결국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유리는 10년 전부터 배우의 문을 두드렸다. 혼자만의 힘으로 배우에 도전했지만, 그 빛의 힘은 가수로서의 그것에 미치지는 못했다. 얼마나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했을까. 배우가 된 지 10년, 드디어 오랜 노력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초등학생 5학년, 12세 어린 소녀는 대형기획사의 연습생이 된다. 먹고 싶은 것도, 만나고 싶은 사람과의 대화도, 심지어 고된 훈련에 대한 어리광마저 사치일 정도로 고되지만,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획사 연습생
어리광도 사치

국내 아이돌 업계에서, 아울러 한국에서 아이돌을 가장 잘 기획하는 회사에서 남들 하는 거 다 하면서 상상조차 어려운 경쟁을 뚫을 순 없다. 아무리 예쁘고 누구나 혹할만한 매력을 갖고 있다 해도 ‘1만 시간의 법칙’에 상응하는 노력이 뒤따르지 않으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을 태우고 발화하는 별처럼, 대중의 눈에 보이는 연예계 스타들은 각고의 고통을 견뎌내야만 카메라 앞에서 미소 지을 수 있다. 무대에 서는 꿈을 꾸고 있던 15세 유리도 혹독한 트레이닝과 다투고 이겨냈다. 그리고 누군가는 수능을 준비하던 19세에 소녀시대로 한국 가요계에 혜성처럼 입성한다.

데뷔곡 ‘소녀시대’를 시작으로 ‘다시 만난 세계’ ‘Kissing you(키싱 유)’ ‘소원을 말해봐’ ‘Oh!’(오!) ‘Run Devil Run’(런 데빌 런) 등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권을 뒤흔드는 명곡과 함께 우뚝 선다. 


SES와 핑클에 이어 그야말로 아이돌 2세대의 최정점에 있었다. 누구도 쉽게 경험하지 못할 위치를 10년간 고수했다. 올라가기보다 어렵다는 1위 유지를 10년 넘게 했다. 그 안에서 유리도 20대를 거치며 성장통을 겪었다.

아무리 최정점에 있다고 하더라도 소녀시대가 평생 먹거리를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아이돌의 생명이 그리 길지 않아서다. 새로운 얼굴을 원하는 대중의 욕망을 소녀시대가 전부 채워주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남녀를 막론하고 7년이면 뿔뿔이 흩어지는 ‘7년 차 징크스’를 못 넘기는 아이돌이 허다하지 않은가.

그마저도 극복한 소녀시대지만, 결국 멤버 개개인은 솔로든 예능이든 연기든 다음 행선지가 필요했다. 

연습생에게 연기도 가르친다는 SM엔터테인먼트의 트레이닝을 받은 그는 자연스럽게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한다. 스타라고 해서 학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KBS2 <스타 인생극장>에서는 다른 학생들과 다르지 않게 학업에 열중하다 못해 교수에게 칭찬받는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 

소녀시대 내에서 솔로 활동을 하기도 했고, 각종 예능에서 매력을 뽐낸 그다. 팬들로부터 끼를 잘 부린다고 해 ‘깝율’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건강미 있는 몸매로 섹시함을 과시하면서 ‘율란하다’는 신조어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여러 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했지만, 유리의 마음은 연기자로 향하고 있었다. 연극의 메카인 혜화동을 오고 가며 봤던 연극에 자극을 받았다. 시나리오를 써보기도 했고, 언젠가 연기자로서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수영과 무술, 승마 등 다양한 영역에서 경험을 키웠다. 

MBN 드라마 <보쌈> 화인옹주 열연
시청률 9.8% 주역 ‘그 유리 맞아?’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2012년 SBS <패션왕>에서 비중 있는 조연으로 나섰다. 이전에도 작게나마 연기할 기회가 있었지만, 정극은 처음이었다. 데뷔 치고 혹평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소녀시대라는 이름에 비해서는 아쉬움이 있는 결과였다.

그래도 꾸준히 연기자의 길을 걸으려 했다. 

영화 <노브레싱>을 비롯해 웹드라마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에>, OCN <동네의 영웅>, SBS <피고인>, MBC <대장금이 보고 있다>, 넷플릭스 <마음의 소리 리부트2> 웹드라마 <이별유예, 일주일> 등 여러 분야에서 꾸준히 연기 경험을 쌓았다.

작품 활동에 비해 대중의 각인이 된 작품이 많지는 않았다. 연기자로서 성장하고 있다는 평가만이 그를 위로했을 뿐이다.

배우가 된 지 10년, 권유리라는 이름으로 비로소 자신의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MBN <보쌈: 운명을 훔치다>(이하 <보쌈>)를 통해서다. 여배우를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은 권석장 PD의 작품이다. 

<파스타>의 공효진, <마이 프린세스>의 김태희, <골든타임> 황정음, <미스코리아> 이연희 등 다소 모호한 평가를 받고 있던 연기자들이 권석장 PD의 손을 거쳐 배우로 거듭났다. 그를 거친 배우들은 연기력이 날로 성장했다. 여배우의 연기력 논란은 권 PD의 작품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렇듯 여배우에 대한 특별한 안목을 가진 권 PD는 권유리를 선택했다. 후궁의 딸 옹주에서 이름 모를 시정잡배에게 보쌈을 당한 뒤 온갖 고초를 겪었음에도,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능동적으로 삶을 대하는 수경의 얼굴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무한경쟁이라 해도 무방한 가요계에서 꿋꿋하게 버틴 삶이 거장의 눈에 비췄나 보다. 

대본을 읽고 수경의 삶에 감동한 권유리는 장면마다 진심으로 연기했다. 글을 보고 느낀 감동을 시청자들도 느꼈으면 하는 욕망이 작동했다. 

거장 눈에 띈
단단한 내공

“처음에 대본을 읽고 갖은 고초와 고난 앞에 반응하는 수경의 방식이 매력적이었어요. 당당하고 카리스마 있을뿐더러 위엄도 있었죠. 삶에 있어서 능동적인 부분에 매료됐어요. 수경을 닮고 싶었어요. 권유리가 수경이라는 사람을 거울삼아 극대화해서 표현할 수 있을까에 고민했어요.”

워낙 오랜 기간 인기 연예인으로서 살아가다 보니 자신의 주체성을 발휘하기보단 주위의 시선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익숙했을 테다. 법은 물론이고 도덕과 윤리에 어긋나는 것에 누구보다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환경이 그를 조여왔을 수 있다. 그런 권유리에게 수경이란 인물은 남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보쌈>에서 수경은 광해군(김태우 분)과 후궁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화인옹주다. 궁에서 지내던 시절부터 이대엽(신현수 분)을 좋아했으나, 시아버지 이이첨(이재용 분)과 광해군의 정치적 밀약으로 그의 형과 혼약을 맺는다. 그 혼약이 기구한 삶의 시발점이 된다. 신혼 첫날밤도 치르기도 전에 남편이 죽고 과부가 된다.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조선의 건달이나 다름없는 바우(정일우 분)가 다른 여인 대신 실수로 화인옹주를 보쌈한다. 바우를 설득해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어쩐 일인지 바우는 약속을 어긴다. 진실을 추궁하자 돌아온 대답은 “이미 당신은 죽었다”는 것. 

화인옹주가 없어지자 이이첨은 장례를 치른다.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반정을 노리는 그에게 화인옹주는 눈엣가시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경으로 새 삶을 시작한다. 그때부터 평생 겪어보지 못한 고초에 시달린다. 어떤 고난과 역경이 와도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희생을 통해 이겨낸다. <보쌈>은 이때부터 수경의 성장 드라마로 변주한다.

“제가 수경이 매력 있고 멋지다고 생각한 지점은 수경이라는 인물이 타고난 성품이 정말 좋아서예요. 옹주임에도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수직적이지 않고, 주위를 다 돌봐요. 자신보다 주위에 있는 사람의 안위를 더 걱정해주는 올곧은 성품이죠. 마음도 따뜻하고요. 아무리 힘들어도 늘 멋있게 이겨내요. 이타적인 방식으로요. 그렇다고 불의 앞에서 결코 주눅 들지도 않아요. 당차고 할 말도 다 하고요. 원수나 다름없는 좌의정과 다시 만난 장면에서 심리적 복수를 하는데요. 개인적으론 가장 통쾌했어요. 예의를 갖추면서 싸우는 모습이 단단하게 느껴졌어요.”

배려와 희생
쏟아진 호평


수경은 왕가의 출신으로 늘 용모를 단정히 할 뿐 아니라 옳고 그름에 대한 중심이 명확한 여인이다. 아무리 자신을 괴롭히는 이가 있다 해도 마음으로 먼저 이해하려 한다. 불의에는 분명히 맞선다. 이를 본 시청자들은 ‘조선시대의 인격화’라는 피드백을 남기기도 했다. 조선시대가 사람이 됐다면 수경이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극 중에 그런 대사가 있어요. ‘내가 죽어 없어져야 모든 이가 편해진다’라고요. 온 나라의 국민과 나라가 편해질 수 있다면 죽음도 각오하는 여자예요. ‘내가 과연 저 정도의 대사를 잘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저는 그렇게 단단한 사람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이 작품이 끝날 무렵엔 수경이 내 안에 들어와 있기를 희망했어요.”

캐릭터와 그 인물은 연기한 배우의 능력치를 수치화해서 비교할 수 없겠지만, 결과적으로 수경을 훌륭히 표현해냈다. 권유리에게도 수경이 가진 단단한 내공이 없었다면, 부족한 부분이 아마 시청자의 눈에 다 드러나지 않았을까. 배우를 두고 인물을 담는 그릇이라 하는 것도 그런 이유이니 말이다.

호평이 쏟아지는 건 수경을 담는 그릇으로 권유리의 마음이 부족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저도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수경이 옹주였던만큼 책임져야 할 부분이 많았을 거예요. 누구보다 빨리 성숙해져야 했겠죠. 저 역시도 소녀시대 활동을 하면서 단체생활을 했어요. 열두 살부터 연습생이었고, 열아홉에 데뷔하면서 작은 사회를 또래보다 빨리 경험했어요. 15년 넘게 팀원들과 앨범을 내고 활동을 했고요. 수경이가 감내해야 했던 것들을 저도 소녀시대 경험을 하면서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서로서로 배려해줘야만 밸런스를 잡는다는 걸 비교적 어린 나이에 터득했거든요. 그런 지점이 수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됐어요.”

“매 순간 당당하고 멋진 옹주, 닮고 싶다”
“고통 감내하며 연기, 궁금한 배우되겠다”

아이돌로서의 탄탄해진 마음의 힘과 배우로서 능력을 키우고자 한 노력이 대중의 마음에도 스며들었다. 매력적인 인물을 훌륭히 표현한 결과는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었다. “내가 알던 유리가 맞냐”면서 연기력을 극찬하는 시청자들이 생겨났다.

뼈가 부서져라 매 순간 최선을 다한 노력이 감동으로 전달된 덕이다. 0%대 시청률을 전전하던 MBN 드라마는 9.8%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냈다. MBN 역사상 최고 기록이다. 

“<보쌈> 같은 좋은 작품에 출연한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결과까지 좋아서 정말 기뻐요. 좋은 말을 많이 들었어요. 저에게도 좋은 의미의 자극이 됐어요. 사실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어요. 첫 촬영까지 하루에도 5번은 고민했어요. ‘괜한 도전을 한 게 아닐까?’하고요. 그래도 용기 내서 도전했는데, ‘연기 잘 한다’는 피드백을 받다 보니까 계속 더 용기를 내서 성장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어요.”

대중에 배우로서 진정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고호의 별의 빛나는 밤에> 조수원 PD를 비롯해 그의 능력을 일찌감치 알아본 관계자들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연기에 도전 중인 소녀시대 멤버들은 언제나 그를 응원했다. 주위의 응원과 스스로 일궈낸 성취가 자신감으로 변화하는 중이다. 

“수경이라는 캐릭터가 저한테 준 긍정적인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이 캐릭터를 잘 소화하고 나면 좋은 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는데요.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수경은 태생적 한계 때문에 운명을 받아들이고 살다가 바우를 만나고 비로소 수경이라는 주체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잖아요. 연기하면서 ‘나 역시 수경처럼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면서 성찰을 했어요. 수경처럼 용감해지려고 늘 굳게 각오를 했어요. 그런 면에서 성장한 것 같아요.”

한국을 넘어 전 세계를 호령한 권유리는 여전히 세계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수려한 미모는 주인공을 하기에 손색없으며, 연기력도 충분히 갖춰졌다. <보쌈>에서의 활약상 이후 수많은 제작자가 그와 파트너가 되고 싶다며 손을 내밀고 있다.

거듭한 성찰
커다란 성장

“데뷔할 때만 해도 대사가 많이 이해되지 않았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고 연기했던 것 같기도 해요. 이제는 인물에 대한 공감이 더 커진 것 같아요.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한 관심도 많아졌고요. <보쌈> 이후에 감사하게도 많은 작품 제안이 들어왔어요. 머지않은 시일 내에 작품으로 만나면 좋겠어요. 언제나 그랬듯 몸이 부서지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연기할 생각이에요. 늘 다른 매력을 보이는, 그래서 많은 사람이 궁금해지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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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정청래 인싸 플랜

‘아웃사이더’ 정청래 인싸 플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독주가 이어지고 있다. 당원의 명령인 개혁을 완수하기 위한 질주다. 당의 ‘아웃사이더’였던 그가 당을 휘어잡기까지 수많은 당원이 등을 밀어줬다. 비주류에서 주류 ‘인싸’로 자리 잡기 위한 정 대표의 다음 스텝이 주목된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행보가 매섭다. 윤석열정부에서 막힌 과제를 해치우는 동시에 공약이었던 각종 개혁을 빠르게 완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 대표는 같은 당 박찬대 의원보다 덜 알려졌다는 평이 나오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위원장으로서 보여준 ‘사이다’ 면모가 주목받으면서 강성 지지층의 환호를 받았다. 정청래가 걸어온 길 비주류였던 그가 당 대표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21대 국회 때는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 수석 최고위원을 지냈고, 22대 국회에선 법사위원장으로서 국민의힘에 호통을 치며 유튜브 단골 주제가 됐다. 당시 정 대표는 국민의힘이 반대하는 쟁점 법안을 밀어붙이고 상대편 의원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었다. 그동안 정 대표는 언론 대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유튜브 등 SNS를 통해 지지자와 직접 소통해 왔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보다 주목도가 떨어진다는 평이 나오지만 팬덤 정치에 최적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정 대표는 최근에도 자신을 둘러싼 의혹과 청-명 프레임에 대해 직접 입장을 밝혔다. 그는 SNS에 ‘언론의 자유와 횡포 그리고 언론의 게으름의 관성’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조국 전 대표의 사면·복권을 놓고 일부 언론에서 ‘정청래 견제론’을 말한다.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근거 없는 주장일뿐더러 사실도 아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바로 반박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어 “정청래는 김어준이 밀고, 박찬대는 이재명 대통령이 밀었다는 식의 가짜 뉴스가 이 논리의 출발”이라며 “어심이 명심을 이겼다는 황당한 주장, 그러니 정청래가 이재명 대통령과 싸울 것이란 가짜 뉴스에 속지 말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이재명 대통령과 각을 세울 일이 1도 없다. 당정대가 한 몸처럼 움직여 반드시 이재명정부를 성공시킬 생각이 100(이다)”이라고 덧붙였다. 계파 갈등 프레임이 씌워질 조짐이 보이자 이를 사전에 차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 대표의 정치적 뿌리를 따지자면 친노(친 노무현)에 가깝다. 그러나 문재인 전 정부서는 친문(친 문재인),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는 친명(친 이재명)으로 분류되는 등 계파색이 비교적 옅은 편이다. 1989년 미국 대사관저 점거 농성을 주도한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은 등 학생 운동권 출신이지만, 대표 운동권인 민주당 86 그룹과의 친분을 공개적으로 과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 대표는 당의 주류보다 비주류에 가깝다는 게 여의도에 떠도는 평이다. 친문? 친명? 오히려 ‘계파 청산파’ “잘못된 586 문화 배운 97도 청산” 전당대회가 한참이던 당시 한 민주당 의원은 “사석에서 만난 정 의원은 아주 뚝심 있는 사람이었다. 박찬대 의원은 특유의 재치로 호감을 얻는 편이라면 정 의원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할 말은 제대로 하는 캐릭터”라며 “그래서 계파를 분류하기 어려운 것 같다. 나만의 길을 가는 것 같으면서도 한번 정한 길은 꺾지 않고 걷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정 대표는 ‘계파 청산’을 외치는 인물이다. 그는 당 대표 후보이던 당시 “국민께서 비판하시는 586의 운동권 문화는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라디오에 출연해서는 “계파는 당을 좀먹는 독약”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정파와 노선은 필요하지만, 계파는 없어져야 한다. 저 스스로 계파에 가입하지 않고, 그런 데서도 저는 안 불러준다”고 말했다. 이어 “저는 586의 질서, 운동권의 수직적 관계가 싫었다. 그런 분들과 몰려 다니는 게 너무 비생산적”이라며 “586의 안 좋은 문화를 따라 배운, 너무 빨리 늙어버린 97 세대들의 그런 것도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가 민주당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원들의 요구를 파악해 발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8·2 전당대회에서 정 대표는 당선 이후 “이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것은 민주당 주류가 바뀌었단 뜻이고, 민주당에서 정청래가 대표가 됐다는 것은 당의 주인인 당원들이 당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대가 왔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했다. 이날 전당대회를 “예전에는 당원들이 국회의원 눈치를 봤지만, 이제는 국회의원들이 당원 눈치를 봐야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민주당의 민주화’가 드디어 그 깃발을 높이 든 8·2 전당대회”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 대표를 탄탄히 받쳐주는 건 여의도 인맥이 아닌 당원이었다. 정 대표는 이들을 대주주 삼아 힘을 키워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는 당원권에 힘을 쏟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평당원 최고위원’ 선출을 시도하는가 하면 당원 주권 정당 실현을 강조하기 위해 ‘대의원 1인1표제’를 띄우기도 했다. 대의원 1인1표제는 당원들의 권한을 대폭 향상하는 방안이다. 정 대표는 지난 18일 열린 국회 당원주권 정당특위 출범식에서 “10년 넘게 당원주권정당, 1인1표를 주장해 왔지만, 아직까지도 열리지 않았다”며 “헌법에서 얘기하고 있는 평등 선거가 민주당에서도 구현이 될 수 있도록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3대 개혁 풀가동 이어 “대한민국 헌법에는 평등 선거가 명시돼있고, 많은 선거에서 1인1표가 행사되지만 유독 더불어민주당에선 누구는 1표, 누구는 17표를 행사한다”며 “헌법적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재명정부가 국민주권시대를 강조하는 만큼 이에 발맞추기 위해서라도 민주당은 권리당원의 권리를 보장하고 상징적인 ‘1인1표’ 시대를 반드시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밖에도 정 대표는 당헌·당규 개정을 비롯한 ▲평당원 선출 준비 지원 ▲연말 당원 콘서트 지원 등을 약속했다. 당원의 힘이 커질 수록 정 대표의 정치적 입지도 넓어진다. 정 대표는 연일 국민의힘 때리기에 집중하며 당원으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민주당의 목표로 3대 개혁 완수를 내걸었다. 이는 비주류였던 자신의 정체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으로도 읽힌다. 이 대통령이 ‘사이다’ 발언으로 당권까지 올랐다면 정 대표는 각종 특위를 띄우며 거침없는 개혁가의 모습을 굳히겠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강성 지지층의 요구에 따라 검찰개혁에 속도를 내고 있다. 검찰청을 폐지하는 대신 가칭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과 공소청을 신설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다음 달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정 대표는 지난달 21일 의원총회에서 이 대통령과 당 지도부의 만찬 회동을 언급하며 “검찰청 폐지, 공소청·중수청 설립을 담은 정부조직법을 9월 내 본회의에서 처리하자고 당과 대통령실이 입장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약속드린대로 추석 귀향길 뉴스에서 ‘검찰청은 폐지됐다’ ‘검찰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는 기쁜 소식을 국민 여러분께 전해드릴 수 있도록 당에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임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 추미애 의원 역시 “법사위원장 선출은 검찰과 언론, 사법개혁 과제를 완수하라는 국민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전폭적으로 힘을 실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위원회도 속속들이 들어섰다. 우선 민주당은 ‘국민주권 검찰정상화 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정 대표는 출범식 및 1차 회의에 참석해 “지금의 시대적 과제는 내란 종식, 내란 척결, 이정부 성공에 있다”며 “가장 시급히 해야 할 개혁 중 개혁이 검찰개혁”이라며 “개혁도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저항이 거세져서 좌초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시기가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특위의 주요 과제로는 ▲수사·기소 완전 분리 ▲국민 주권 실현 및 민생 뒷받침 등을 제시했다. 새로운 구심점 이어 언론개혁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언론 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추석 전까지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언론의 허위·조작 보도에 대해 피해자에게 손해액의 최대 5배 배상을 의무화하는 법적 장치다. 언론뿐만 아니라 ‘유튜버’도 포함하는 안이 논의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중심 사법개혁특별위원회’도 출범했다. 정 대표는 “대법관의 증원과 추천 방식을 변경하는 내용의 사법개혁안을 추석 전까지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구석구석 눈도장을 찍기 위한 지역별 공략에도 나섰다. 지난 21일 호남발전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다들 대한민국 민주화에 대해서 호남이 기여한 바가 지대하다는데, 국가는 ‘호남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답을 이제 할 때가 되지 않았나”라고 꼬집었다. 정 대표는 “호남만 발전시키면 되겠느냐”며 영남발전특위도 띄웠다. 이는 내년 6월에 있을 지방선거를 대비해 대구·경북 등의 표밭을 다지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광폭 행보를 보이는 정 대표를 구심점으로 신흥 세력이 탄생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정 대표는 계파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고 거듭 밝혔지만, 권력자의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다는 해석이다. 정 대표의 편에 선 동료 의원들에게도 시선이 쏠린다. 전당대회에서 정 대표를 공식적으로 지지했거나 개혁 선봉에 함께 섰던 의원 등이다. 정 대표가 당권 도전을 선언한 국회 기자회견장에는 장경태·최기상·문정복·임오경·양문석 의원 등이 자리했다. 여의도 이야기를 종합하면, 정 대표는 ‘당원 중심 정당’ 철학에 부합하는 인사로 장 의원을 꼽았다. 현재 장 의원은 평단원 최고위원 선출 절차를 위한 특위위원장을 맡고 있다. 최민희 의원은 정 대표를 공개 지지한 인물이다. 당시 정 대표가 수박 논란에 휩싸였을 당시 최 의원은 “심하게 비난받는 정청래 후보를 지켜보면 짠하다”며 “비난에도 역비난하지 않고 여전히 유쾌·상쾌하게 선거운동하는 정 후보를 격하게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 밖에도 한민수·김영환·이성윤 의원은 경선 유세 현장에 함께하며 힘을 실어줬다. 왼쪽으로 붙는 민주당…좁아지는 공간 강성 지지층 등에 업고 개혁가의 길로 개혁가의 길을 걷는 정 대표의 존재감이 커지자 일각에서는 조기 대선을 거치며 ‘중도 보수론’으로 넓혀놨던 민주당의 정치 공간이 다시 좁아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 대표의 강경한 태도가 민주당의 기조가 된다면 야당과의 협치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평이다. 실제 정 대표는 “악수는 사람하고만 한다”며 국민의힘을 척결 대상으로 대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6주기 추모식에서 정 대표는 국민의힘 송언석 비상대책위원장(이하 비대위원장)과 악수는커녕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송 비대위원장 역시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그야말로 ‘국회 빙하기’ 시대가 열렸다. 여당인 민주당은 좌우를 넓게 아우르는 정당이 돼야 앞으로 다가올 선거에서 유리한 구도를 유지할 수 있다. 지금처럼 국민의힘이 보수로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왼쪽은 조국혁신당, 진보당 등에 맡겨둔 채 중도 보수를 자처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당원의 힘으로 대표가 된 만큼 그는 개혁을 완수하기까지 지금과 같은 태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민주당 상임고문단도 “집권여당은 당원만 바라보고 정치를 해선 안 된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당 상임고문단 간담회에서 “정당의 주인은 당원이어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면서도 “우리 국민은 당원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도 “내란의 뿌리를 뽑기 위해 전광석화처럼, 폭풍처럼 몰아쳐 처리하겠다는 대목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과유불급이다. 의욕이 앞서 결과를 내는 게 지리멸렬한 것보다는 훨씬 나으나, 지나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또 다른 민주당으로 민주당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포스트 이재명’ ‘이재명 키즈’가 아닌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 대표가 민주당의 새로운 길을 열어야 당이 계속해서 순환하는 등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어 “민주당의 주류는 강성 지지층이다. 당원이 당을 좌지우지하는데 그들의 숫자가 얼마가 되든 목소리가 커 여론을 만드는 것”이라며 “이 주류의 흐름에 올라탄 사람이 정 대표다. 이 대통령이 대표이던 때와는 다른 모습의 민주당을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아직 남은 정 견제 세력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SNS에 올렸다 곧바로 삭제한 게시글이 화제다. 민주당은 지난달 19~20일 양일간 경주를 찾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준비 상황을 점검했는데 정 대표가 마치 천마총 금관을 쓰고 있는 듯한 착시 사진이 문제가 된 것이다. 정 대표가 금관을 직접 착용한 것은 아니지만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시에 왕 노릇을 한다” “벌써 왕인 것처럼 군다” 등 거친 비판이 쏟아졌다. 현재 해당 사진은 삭제됐지만 8·2 전당대회 때 불거진 박찬대 의원과의 앙금이 아직 남은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온 이유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