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세의 골프 인문학> 이방인들이 접수한 세계 골프

1979년 스페인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골프 선수의 등장은 수십 년간 미국이 지배하던 세계 골프의 흐름을 통채로 바꿔놓는다. 1960~1970년대 미국은 국민스타 아놀드 파머와 잭 니컬라우스 2명의 걸출한 전설을 배출하면서 골프 전성기를 구가하던 중이었다.

난공불락이던 미국 골프를 침공해 이방인 골프의 시대를 연 주인공은 세비 바예스테로스였다. 1917년 7월18일 108회 디 오픈이 열리는 스코틀랜드의 유서 깊은 ‘로얄 리덤 앤 샌 앤스’ 골프장.

경이적 기록

1926년 보비 존스이래 이 골프장에서만큼은 우승한 미국 선수가 없었던 관계로, 출전한 미국 선수들은 심기일전했다. 예상대로 대회 첫날부터 잭 니컬라우스, 탐 왓슨, 헤일 어윈, 벤 크랜샤, 쟈니 밀러 등 당대 최고의 미국 선수들이 선두그룹에 포진하기 시작했다.

그들과 대적하는 유일한 선두그룹의 유럽 선수는 3년차 신인이자 22살 풋내기인 골프의 변방인 스페인에서 온 세비 바예스테로스였다. 헤일 어윈이 68타, 벤 크랜셔 71타, 잭 니컬라우스와 탐 왓슨이 72타를 기록하며 선두그룹을 형성했고, 세비는 한 타 뒤진 73타였다.

반전은 둘째 날에 일어났다. 65타라는 경이적인 타수로 세비는 선두 헤일 어윈에 2타 뒤진 2위를 기록한 것. 헤일은 몇주 전 US오픈을 우승했던 관계로 여세를 몰아 메이저 2연패의 꿈을 꾸고 있던 중이었다.


3일째 경기에서 두 사람은 긴장한 탓인지 나란히 75타의 저조한 기록을 냈다. 마지막 4일째 여전히 스코어는 2타차였다.

유럽 6인방 눈부신 활약
우즈 전까지 골프계 호령

잭 니컬라우스는 1타차로 세비 뒤를 쫓고 있었다. 우중충하고 변덕스러운 스코틀랜드 날씨 탓이었을까. 선두그룹 모두 오버파를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비만큼은 예외였다. 그 역시 드라이버 샷을 페어웨이에 올린 적은 거의 없었지만 용케 세컨 샷을 그린에 올리면서 파 세이브를 하면서 선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따금씩 버디를 기록해 거의 원맨쇼를 진행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뒤를 쫓은 벤 크랜샤도 대의를 거스를 수는 없는 듯 세비에게 3타를 뒤지고 말았다. 그렇게 세비는 데뷔 3년차에 디오픈에서 우승을 하면서 유럽대륙 출신 선수로는 72년만에 우승하는 기록을 갖게 됐다.

그는 단숨에 스타가 됐다. 머뭇거림 없는 빠른 스윙, 과감한 결정, 미국의 월터 하겐 이후 구석구석을 과감하게 공략해 세이브 샷을 잘하는 재주꾼, 테니스의 스매싱 같은 드라이브 샷, 그리고 미남형의 호리호리한 체격은 스타가 없던 세계 골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린의 정확도를 요구하는 미국에서의 우승은 절대 못할 것이라는 미국 언론을 비웃듯, 세비는 이듬해인 1980년 마스터즈에서도 최장의 비거리와 정교한 숏게임으로 보란 듯이 우승을 해버렸다.

미국 골프로의 정복이 시작된 것. 1983년 마스터즈에서의 우승, 1984년 세인트 앤드루스의 디오픈에서 다시 우승을 하면서 세계 1위로 랭크 된 그는 유럽에서 온 이방인의 선두주자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를 기점으로 미국 골프의 기세에 눌려 변방으로 전락했던 유럽 골프에서 대규모의 후발주자들이 속속 미국으로 입성을 시도한다. 호주의 그랙 노먼, 영국의 닉 팔도, 스코틀랜드의 샌디 라일, 웨일즈의 이안 우스남, 그리고 독일의 버나드 랭어까지 일련의 유럽 선수들이 차례로 미국 골프를 정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다국적군의 눈부신 활약
차례로 미국 골프 정복

이른바 6인조 이방인들이었다. 유럽 골프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세비는 메이저 승수에 있어선 세간의 바람을 채우지 못하고 5승에 그쳤다. 2007년 은퇴를 한 그는 후배 양성과 유럽 골퍼들에게 로망이 되고자 했으나 2008년 비행장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지면서 뇌종양 진단을 받고 3년간 투병생활 끝에 2011년 54세의 나이로 아쉽게 작고했다.

잭 니컬라우스가 전성기를 지나는 1970년대 미국 골프는 사회 전반에 걸친 분위기와 무관치 않았다. 베트남의 반전 운동과 히피의 출현, 자조적인 분위기에서의 레저 스포츠 공백으로 인한 골프 산업의 부재 등으로 미국이 주도하던 골프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깊은 휴식기에 들어간다.

물론 헤일 어윈이나 탐 왓슨 같은 훌륭한 미국 선수들이 있었지만, 미국 골프 계보를 잇는 관점에서 볼 때 그들에게는 스타성이 미흡하다는 지적이었다.

미국 골프의 이 같은 공백을 틈타 1979년 세비 바예스테로스의 등장 이후 유럽 선수들은 19 80~1990년대 2세기 동안 미국과 전 세계의 골프를 이방인들의 무대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유럽 6인방이 1979년부터 19 96년까지 17년 동안 PGA와 유럽 등지에서 거둔 승수는 377승이었으며, 메이저의 승수는 모두 18승이었다.

세비 바예스테로스가 메이저 5승을 포함해 통산 91승, 영국 정부로부터 기사의 작위까지 받은 닉 팔도는 메이저 6승에 총 40승, 샌디 라일은 메이저 2승 포함 총 28승, 이안 우스남은 메이저 1승에 총 47승, 그랙 노먼은 메이저 2승에 총 88승, 그리고 버나드 랭어는 메이저 2승에 총 83승을 기록했다.

다만 이들이 아쉬워하는 점은 18승의 메이저 승수에도 불구하고 이들 6명 중 어느 누구도 US오픈만은 유일하게 기록하지 못했다. 훗날 1994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신예 어니 엘스가 등장하면서 US오픈에서 우승, 목말랐던 그들은 갈증을 해소해준다.

찬란한 업적

유럽 6인방의 활약은 골프 역사에 큰 획을 그으면서 세계 골프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으나 1996년 타이거 우즈라는 ‘골프 황제’가 등장하면서, 다시금 미국으로 그 주도권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세비가 등장한 1979년부터 1996년까지 17년 동안 유럽 이방인들은 그렇게 세계 골프를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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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일요시사 취재1·정치팀] 오혁진·박희영·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났다. 특검이 출범하면서 관련 수사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핵심 인물들의 수사 기록이 일부 보도됐다. 그러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일요시사>는 경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의 ‘노상원 수사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하기로 했다. “부정선거 증거가 차고 넘치고 나중에는 드러날 것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이다.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처럼 부정선거 음모론에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상 수년 전부터 망상에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생각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노 전 사령관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노 전 사령관이 전 목사와 개인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당시 분위기와 참석자들이 윤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텔레그램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1년간 ‘극우 집회’를 분석한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상호, 정성욱, 김봉규 등과 만날 때 주로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 “선관위를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고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여러 번 선관위의 부정선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네이버로 찾아도 봤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를 주로 누구에게서 들었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는 “관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들었고 특정 인물이 누구인지 실명을 거명하긴 그렇다. 나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여론조사 조작이나 선거 부정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했다. 전 주도 윤 지지자 극우 집회 직접 참석 김과 텔레그램으로 부정선거 자료 공유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의 근거로 “선관위 산하에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있다.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해야 한다. 여론조사기관의 갑이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9명으로 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과 강성봉 등이고 그 밑에 쭉 있는데 7명이 진보 계열 인물이다. 여론조사기관이 편향되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임시선거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2021년 국회의원 선거 때 동작구 선거사무소가 있는데 옆을 임대해서 임시선거사무소를 만들었었다. 언론에 나오니까 발뺌했었고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김 전 장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내 줬었다”고 했다. 노 전 사령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며 “결국에는 다 까질 것이다. 전산은 한 번 까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폭파하거나 고물상에 갖다 버리지 않는다면 전산은 결국 까진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서울 상공에 포를 쏜 것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께서는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시고 정국이 전시에 준하는 사태라고 민감한 상황이라고 보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행동한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시간짜리 호소였다. 만약 국회 결정을 윤 전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윤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 초, 선관위가 서버 교체를 검토했다가 교체하려 했던 것을 두고 “윤 전 대통령께서 어디에선가 확실하고 핵심적인 정보를 들으셨을 것 같다. 서버 조작이 있었기에 그 서버를 우리가 확보하려 할 때 선관위 측이 폭파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군검찰·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초 ‘정보사 군무원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등 인물들에 대해 “비상대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법체계, 형사소송법, 방탄국회 및 재판지연 아래에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조치’ ‘2시간짜리 계엄’ 겹치는 윤·노 발언 "서버 확보하려 했다면 선관위가 폭파했을 것” 주장 윤 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한 조치”를 언급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이 대통령과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 전 사령관도 마찬가지다. 노 전 사령관은 경찰에 “김용군(대령)과 구삼회 등에게 ‘이재명은 죄가 7개인데 봐주고 지연시키고 구속도 안 되고 당 대표까지 하는데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 중앙지검장, 판사 등을 모두 탄핵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세상이냐’고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과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말이 일치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2일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선관위가 헌법기관인데 스스로 깨끗해야 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황제·세자 채용 등 문제가 나왔다. 각종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전산 해킹이 언급될 때 서버 본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일부 샘플만 살짝 보여줬는데 얼마든지 전산 조작이 가능하고 해킹에 얼마나 취약하면 비밀번호가 ‘1234’냐. 이미 그런 게 다 나왔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본체를 못 열어주나”고 말했다. 그러나 조태용 국정원장은 같은 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시스템에 보안상 취약점이 발견됐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단서는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과 직접 비화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보고 있다. 실제 노 전 사령관도 지난해 12월2일 자신의 지인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노 전 사령관은 당시 “나 같은 경우는 브이(V, 윤 전 대통령 지칭)하고 이렇게 좀 도와드리고 있다. 원래 한 4~5년, 3~4년 전에 알았다뿐이고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좀 도와드리고 있다. 비선으로”라고 했다. 친분 과시 노 전 사령관은 안산 ‘롯데리아 회동’에 참석했던 구삼회 전 육군 2기갑여단장에게도 “며칠 전에는 김용현과 함께 대통령도 만났다. 갈 때마다 대통령이 나한테만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오셨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대통령과 장관 같이 만난다. 나는 벌써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