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세의 골프 인문학> 아놀드 파머 - 잭 니컬라우스 숙명의 대결

‘킹’이라 불린 아놀드 파머와 ‘황금곰’ 잭 니컬라우스의 숙명 같은 첫 대결은 언제였을까. 1962년 US오픈이 열리고 있는 필라델피아의 오크몬드 골프장. 아놀드가 독주하리란 예상과 달리 처음부터 물고 늘어진 선수는 오하이오 출신의 신참내기 잭 니컬라우스였다.

당시 잭은 프로 데뷔 1년차였던 22살 청년이었다. 17차례의 PGA 대회를 치르면서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던 무명의 선수이기도 했다. 반면 아놀드는 이미 5번의 메이저를 포함해 33차례나 우승한 천하무적이었다. 아놀드는 잘 생기고 군살 없는 몸매를 지녔지만, 잭은 ‘처비 보이(Chubby Boy)’라 불리는 뚱보였다.

이변 연출

아놀드의 팬들이 니컬라우스를 그냥 둘 리 없었다. 아놀드와 잭이 처음부터 한 조를 이루자 “오하이오 뚱보야 물러가라”며 살기 어린 독설을 퍼부었다.

잭이 버디라도 했다가는 거의 폭동이라도 일으킬 만큼의 거센 야유와 방해가 극에 달했다. 추종자들의 응원에 힘입어 아놀드는 1, 2회전에서 잭을 근소한 차이로 앞서고 있었다.

마지막 3, 4회전을 치르는 토요일. 계속되는 야유에도 불구하고 잭은 아놀드에게 한 타 만 뒤져있었다. 이 한 점이 잭을 앞 조에서 출발할 수 있게 해 다행히 정면 대결을 피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아놀드의 팬들은 앞 조에서 출발한 잭마저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오히려 편을 나누어 일련의 무리들은 잭의 라운딩에 투입됐다. 하지만 잭은 야유가 심하면 심할수록 평정심을 찾고 아놀드보다 더 잘 치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시간은 오후 4시를 가리키며 4회전에 돌입하고 있었다. 앞 조의 잭이 13번 홀에 다다르면서 어느새 아놀드와 공동 선두로 나서자 아놀드의 부대원들은 비상이 걸렸다. 잭이 퍼팅을 하려고 자세를 잡으면 주변의 땅이 흔들릴 정도로 발을 굴러댔다. 잭의 퍼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잭은 필사적으로 평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반세기 함께 한 위대한 두 전설
‘킹’ 겨냥한 신출내기 ‘황금곰’

14번 홀을 걸어가며 잭은 2년 전 아놀드가 US오픈에서 우승할 당시를 떠올렸다. 아깝게 잭은 2위에 머물렀고, 이번에는 달라야 했다.

잭은 조용히 아놀드의 목줄을 죄기 시작했다. 아놀드의 추종자들이 그를 방해하면 할수록 잭은 골프채를 불끈 쥐었다. 이번에도 기세에 눌려 우승을 헌납해 줄 수는 없었다.

잭은 어린 나이 답지 않게 평정을 찾고 있었다. 오히려 다급한 쪽은 뒷 조의 아놀드였다. 어느덧 18번 홀을 먼저 끝낸 잭이 283타로 선두에 올라있었다. 아놀드와 공동 선두에 오르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뒤이어 아놀드가 18번 홀 티박스에 섰다. 잘 맞은 드라이버에 이어 4번 아이언으로 한 세컨샷도 그린에 올렸다.

볼은 홀 컵 3미터 정도에 붙었다. 아놀드가 버디를 잡으면 한 타 차로 승리였다. 마지막 그린 주변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모든 아놀드의 군대들은 눈을 감았다.


왕으로 군림하는 아놀드의 독주를 막으려는 어린 신출내기가 벌인 쿠데타의 전조였을까. 신중한 자세로 퍼터를 떠난 아놀드의 볼이 홀 컵으로 향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의 염원을 뒤로한 채 볼은 애석하게 홀 컵을 스치듯 지나치고 말았다.

결국 두 사람은 동타를 기록했고, 일요일에 두 사람만의 연장 18홀을 치러야 했다. 일요일 오전 경기 개시 전에 아놀드는 잭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피하고 싶은 사람이 여기 와 있네” 잭이 즉시 받아쳤다. “그렇게 높게 평가해줘 고맙소”

연장 18홀은 예상과 달리 잭이 주도했다. 결국 오하이오의 뚱보 잭은 아놀드의 홈구장에서 아놀드의 군대를 모두 몰살시키며 총사령관 아놀드를 3타 차로 따돌리고 첫 우승을 차지했다.

아놀드의 군대는 충격 그 자체였다. 필드에 모인 그들 모두 넋이 나갔다. 어떤 이들은 풀밭에 앉아 울기도 했다. 잭은 아놀드를 보기 좋게 이겼을 뿐 아니라, 첫 우승을 메이저에서 기록했다.

홈그라운드에서 천추의 한을 남긴 아놀드는 7월에 열린 디 오픈 2연패로 어느 정도 잭에 대한 상처는 만회했다. 4월의 마스터즈에서 우승을 하면서 최고 절정기에 있었던 아놀드가 만약 잭에게 US오픈을 뺏기지 않았더라면 바비 존스의 뒤를 이어 62년에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도 있었다고 훗날의 골프 역사가들은 회고하고 있다.

2016년 고인이 된 아놀드는 평소 1962년의 US오픈을 가장 아쉬워했다고 한다. 아놀드에게는 다른 골퍼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팬 모임인 일명 ‘오빠부대’가 있었다. ‘아놀드의 군대’라고 일컬어지는 일련의 그룹은 아놀드 파머를 신봉하는 골수팬들로, 아놀드의 애칭인 아니를 총사령관처럼 추대하는 절대 추종자들이었다.

그만큼 아니는 1950~1960년대 골프계의 아이콘이었다. 동네 아저씨같은 푸근함과 미소를 띠고, 시가를 문채 우스꽝스러운 스윙을 할 때면 아가씨들은 열광하며 쓰러졌다.

그는 1950년대 중반 텔레비전을 통해 사람들의 안방으로 서슴없이 들어온 국민스타였다. 사람들은 그를 보기 위해 TV를 켰으며 아니를 ‘골프의 왕’이라 불렀다.

오빠부대 이겨낸 오하이오 뚱보
‘보이지 않는 벽’ 만들어진 계기

‘강철왕’ 카네기를 연상시키는 강철 도시의 명성을 지닌 펜실바니아주의 피츠버그시. 1962년 6월의 일요일 오전 스틸 노동자 4명이 알레게니강을 따라 28번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1958년형 쉐볼레의 라디오에서 지직거리며 흘러나오는 음악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신곡 ‘굿 럭 참( Good Luck Charm)’이었다.

골프광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물러가고 케네디 대통령이 집권한 지 6개월여가 지난 때였다. ‘아니의 군대(Arnie’s Army)’를 자칭하는 이들 노동자들은 오크몬드 골프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아니의 군대로 분류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4명의 강철 노동자들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US오픈 결승에 오른 아놀드를 응원하러 가는 길이었다.

당시에는 3, 4회전이 토요일 오전과 오후에 걸쳐 36홀로 치러졌던 관계로 US오픈 연장 18홀은 일요일에 진행됐다. 1962년 US오픈이 열린 오크몬드 골프장은 아니의 집에서 40여 분이면 닿을 피츠버그 인근의 골프장으로, 그는 이미 십여 차례 이상이나 이곳에서 골프를 친 경험이 있는, 홈구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게다가 수만의 골수팬들까지 자발적으로 동원됐으니, 아놀드의 팬들에게 그와 대적하는 선수들은 모두 적군이었다. 다른 선수들은 아놀드를 이기면 안됐다. 오직 아놀드만 우승을 해야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아놀드는 절대 질 수 없는 신과도 같은 존재로 부상될 수밖에 없었다. 이날 연장전에서 아놀드는 막강한 추종자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잭에게 패했지만, 그들의 충성은 상대인 잭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였다.

숨막힌 경쟁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미국 골프의 양대 산맥으로 지낸 두 사람이었지만 가슴에서 우러나는 사이로는 발전할 수 없었다. 1962년 아놀드의 군대가 보여 주었던 야유는 잭에게 많은 상처를 줬으며, 오랫동안 두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벽으로 작용했다. 충성스러웠던 아놀드의 군대는 그들의 가슴속에 전설처럼 살다가 타계한 골프의 왕을 영원히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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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