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세의 골프 인문학<3>

세계 최초의 여성 골퍼는 누구?

문헌에 등장하는 세계 최초의 공식적인 여성 골퍼는 누구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서는 지금으로부터 5백 년 전인 중세의 한가운데로 아득하게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542년 11월24일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5세는 삼촌뻘인 잉글랜드의 헨리 8세로부터 로마 가톨릭을 버리고 신교를 채택하라는 명령에 불복해 2만 병력을 이끌고 출격했다. 하지만 2주 만에 열사병에 걸려 30세의 나이로 전사한다. 솔웨이 모스(Solway Moss)전투에서였다.

남달랐던 인생사

제임스 5세가 죽기 6일 전 스코틀랜드 궁궐에 남아있던 왕비는 유일한 혈육인 공주 메리를 출산한 터였다. 내심 아들을 바랐던 제임스 5세는 임종의 순간에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이렇게 말했다. “Adieu, Farewell, It came wia lass and it will pass with a lass(아듀, 안녕, 결국 우리는 공주를 얻었도다. 스튜어트 왕조는 종말을 고할 것이다)”

선왕의 죽음으로 메리는 태어난 지 6일 만에 스코틀랜드 최초의 여왕이 된다. 선대왕들처럼 메리도 거의 매일같이 골프를 즐겼다. 이 여왕이 공식적인 문헌으로 역사상 골프를 친 최초의 여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가문의 아버지와 프랑스 왕족 어머니, 잉글랜드 튜터가의 할머니 등 최고의 진골로 태생부터 남다른 운명을 지닌 메리였다. 

다섯 살 때인 1548년 그녀는 권력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모면키 위해 유학을 핑계로 비밀리에 프랑스로 보내졌다. 프랑스 유학 시절인 12년 동안 메리는 당시 사교계에서 유럽을 대표하는 남성들의 로망이자 신데렐라로 불리는 디바였다. 


라틴어는 물론 모든 언어에 능통했으며 15세에 이미 178㎝의 늘씬한 키에 작은 얼굴과 긴 목, 적갈색의 머리와 갈색 눈, 가늘고 짙은 눈썹을 가진 여인이었다. 풍만해야 했던 16세기 미인의 기준과는 달리 21세기 모델 같은 몸을 지녀 누구든지 반할 만한 지성과 미를 겸비한 여왕이었다.

스코틀랜드 최초 여왕 ‘메리’
프랑스 왕자와 골프 데이트

메리를 눈여겨보던 프랑스 국왕 앙리 2세는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를 함께 통치하길 원해 아들인 프란시스 왕자와 메리를 정략적으로 결혼시켰다. 당시 잉글랜드와 스페인이 동맹을 맺고 있던 시기여서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와 손을 잡고 이에 대비를 해야 됐다. 

14세의 왕자와 16세의 메리는 골프장에서 사랑을 속삭였다. 프란시스 왕자는 평균치에도 못 미칠 정도로 작은 키였지만 준수한 용모에 학식을 갖추었고 골프 실력도 괜찮았다. 뜨겁게 불타오르는 사춘기의 두 사람이 골프 치는 모습이 프랑스 국민들은 신기해 보였다. 곧이어 하나둘씩 따라 하면서 골프는 프랑스인들을 매료시켰고, 벨기에 등 인근 국가로 퍼지게 됐다.

행복했던 시절도 잠시, 결혼 한 지 불과 1년여 만인 1559년 프란시스가 뇌종양으로 사망하면서 메리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야만 했다. 지체하다가는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원성은 물론, 스코틀랜드에서의 입지도 위태했기 때문이었다. 

과부가 된 여왕은 모든 것을 잊기 위해 골프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메리의 남성 편력과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23세를 갓 넘긴 메리는1565년 3살 연하의 사촌 동생이자 왕족 서열에 있는 단리(Lord Darnley)경과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린다. 

하지만 호시탐탐 왕위 자리를 탐내고 있던 남편과는 사이가 나빴고 이를 견제키 위해 메리는 불륜의 정부를 두고 있었다. 어느 날 단리가 메리의 정부를 죽이자 복수를 꿈꾸던 여왕은 또 다른 제3의 정부와 짜고 남편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단리가 골프를 치고 오던 날 메리는 남편에게 왕좌를 미끼로 그를 별궁으로 초대한다. 들뜬 기분으로 침대에 앉은 단리는 아내가 샤워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지만 여왕은 뒷문으로 빠져 나갔고 뒤이어 굉음과 함께 별궁이 폭파되는 소리가 들렸다. 벌거벗은 단리는 침실에 설치한 폭탄으로 무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과부되면서 심해진 집착
골프 대중화에 이바지

결혼 1년 만에 사고를 가장한 살인극이었다. 그렇게 남편이 죽은 뒤 3일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메리는 당당하게 골프장에 나가 골프만 치고 있었다. 수군대던 국민들의 신망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왕위를 찬탈당한 메리는 잉글랜드로 피신해 엘리자베스1세 여왕에게 몸을 의지한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당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통치하는 동 시대의 두 여왕으로 고모와 조카 지간이었다. 

그러나 도와주리라 기대했던 엘리자베스는 정치적으로 정적인 메리를 성안에 감금시켜버렸다. 복귀만을 노리던 메리는 세력들을 규합해 왕권 탈환을 획책하는 등 여러 차례 거사를 도모했지만 매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골프에 빠지다

반란의 죄목으로 메리는 18년간의 감금 생활을 뒤로하고 1587년 2월7일 길로틴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죄목은 남편 살해와 남편이 죽은 지 이틀 만에 골프를 쳤다는 괘씸죄 때문이었지만, 사실은 왕권 다툼에서 엘리자베스1세에게 패한 것이었다. 

중세시대의 로망이며 최초의 여왕이자 최초의 공식 여성골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메리는 45세의 나이에 그렇게 쓸쓸히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비록 온갖 추문으로 얼룩진 생을 살았던 여왕이었지만 골프의 대중화에 이바지한 공만큼은 간과할 수 없다. 그런 메리의 열정 때문에 골프가 유럽 대륙으로 전파됐음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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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