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공개 청와대 캐비닛 파일 공개

  • 최현목 기자 chm@ilyosisa.co.kr
  • 등록 2017.07.31 10:21:03
  • 호수 11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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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안 해도 알지? 무언의 시그널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청와대 캐비닛서 이전 정권서 작성된 문건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당초 청와대는 박근혜정권 당시 제작된 문건을 공개하며 추가 공개는 없을 것이라고 예고했지만 최근 이명박정권 당시 문건이 발견되면서 문건 발견 사실을 언론에 알리는 등 추가 공개 가능성을 열어뒀다. 이에 아직도 청와대에 남아있을지도 모를 문건의 존재에 대해 국민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청와대가 새로운 캐비닛 문건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과거 정권이 남기고 간 문서 목록을 전수조사하는 과정서 이명박(MB)정권 당시 청와대가 생산한 문건을 찾았다는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지난 25일 <연합뉴스>를 통해 “MB정부 당시 작성된 문건이 발견됐다”며 “그중에는 제2롯데월드 인·허가와 관련한 내용도 포함돼있다”고 전했다.

계속 발견되는
문건들 내용은?

제2롯데월드 인허가 건은 당시 각종 의혹을 낳으며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국방부는 성남 서울공항 이·착륙 전투기의 안전성 문제를 제기하며 인허가를 반대했지만 MB정부는 공항 활주로 각도를 3도 트는 조건으로 롯데에 신축 허가를 내줬다. 일각에선 MB가 직접 신축 허가를 지시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STX 관련 문건도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STX와 MB정부 사이에 오갔던 의혹으로는 해군 차기고속정 사업 수주가 있다. 당시 STX는 군수 사업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는 세간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MB정부로부터 해군 차기고속정 방위산업체로 추가 지정돼 논란이 일었던 바 있다.

당시 해군의 수장이던 정옥근 전 해군참모총장은 옛 STX그룹 계열사로부터 7억7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징역 4년형을 확정 받은 상태다. 최근 발견된 STX 문건에 당시 군 고위 관계자 내지는 정권 인사가 연루된 내용이 들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단 청와대는 문건의 추가 발견 소식에 발을 빼는 모양새다.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언론 보도에 대해 청와대 측은 “확인해드릴 수 없다”는 입장이다. 청와대의 다른 관계자는 “설사 문건이 존재한다고 해도 공개를 할 것인지, 공개를 해도 무방한지 여부에 대해서는 법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실제 청와대는 이번에 발견된 문건의 공개 여부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의 알권리’를 고려한다면 공개하는 것이 맞지만, ‘야당의 반발’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롯데·STX
무슨 내용?

또 외교·안보 같은 중대한 내용도 함께 공개될 수 있어 고심 중이다. 추가 문건이 발견된 곳은 청와대 국가안보실. 앞서 안보실서 박근혜정권 때 제작된 문건이 발견되자 청와대는 관련 소식을 알리면서도 외교·안보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해당 내용은 발표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캐비닛 문건의 존재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시점은 지난 14일이다. 당시 청와대는 박근혜정부 때 사용한 민정수석실 캐비닛서 300쪽의 문건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삼성 경영권 승계’ ‘문체부 압력’ ‘세월호 유족의 대리기사 폭행 사건’ 등 담고 있는 내용이 파격적이었다. 

청와대는 발견된 문건 가운데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돼있다고 알려 파장을 낳았다.


해당 민정수석실 자료들은 2013년 1월 작성된 MB정부 시절 자료 1건을 제외하면 모두 박근혜정부 때인 2014년 6월11일부터 2015년 6월24일까지 만들어졌다. 내용은 장관 후보자 등 인사 자료, 국민연금 의결권 등 각종 현안 검토 자료와 지방선거 판세 전망 등 기타 자료 등이다. 

해당 자료들 중 일부는 박영수 특별검사팀으로 이관됐으며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이원석)에 배당됐다.

이후에도 문건 발견 소식이 이어졌다. 3일 뒤인 지난 17일 청와대는 정무기획비서관실서 박근혜정부 시절 정책조정수석실서 생산한 다량의 문건을 추가 발견했다고 밝혔다. 

박수현 대변인은 “(총 1361쪽의 문건 중 254쪽에 대한 분류 및 분석 작업을 마쳤는데) 254쪽의 문건은 비서실장이 해당 수석비서관에게 업무를 지시한 내용을 회의 결과로 정리한 것”이라며 “문서 중에는 삼성 및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내용, 현안 관련 언론활용 방안, 위안부 합의, 세월호, 국정교과서 추진 등에 대한 내용이 포함돼있다”고 밝혔다.

한장 한장 캐비닛 여는 청와대 속셈은?
대놓고 못하고…정치적 메시지 담겼나

그런 가운데 청와대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전반의 과정이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이른바 ‘김관진 문건’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드 도입결정부터 조기배치 과정까지 수많은 의혹을 풀 수 있는 단서로 작용할 것이란 기대가 있었지만, 민감한 외교·안보 관련 내용들이 다수 포함돼있어 비공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명박근혜 정권 9년 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각종 의혹들 중 문건 내용에 포함된 것이 있는 반면, 아직 거론되지 않은 사안도 존재한다. 청와대의 전수조사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서 정권과 연결된 의혹들을 추가로 발견할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먼저 MB정권과 관련된 대표적인 의혹은 4대강 사업이다. 4대강 사업은 이미 지난 2010년부터 3차례 감사원 감사를 받았다. 박근혜정권서 관련 정보가 문건으로 작성돼 캐비닛에 보관됐을 가능성이 크다.

MB정권서 있었던 ‘노무현 논두렁 시계’ 공작도 핵심 사건 중 하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2009년, 당시 대검 중수부장이었던 이인규 변호사는 6년 뒤인 2015년 2월 <경향신문> 기자들과 저녁자리서 “논두렁 얘기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국정원이 언론에 흘린 것”이라고 폭로했다. 이 사건의 배후로 청와대를 지목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4대강·성완종
핵심 의혹들

자원외교 사업도 MB정권서 시작돼 박근혜정권 시절 큰 주목을 받은 사안이다. 지난 2015년 3월 검찰은 자원개발과 관련해 그동안 의혹의 중심에 있었던 한국석유공사와 경남기업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였다. 사정기관을 통한 정보 수집이 일상 업무인 민정수석실서 이와 관련된 서면 보고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검찰의 자원외교 수사는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자살로 이어졌다. 비리 의혹으로 검찰의 수사선상에 있던 성 전 회장은 지난 2015년 4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에 앞서 성 전 회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나는 MB맨이 아니다”며 “오히려 피해자”라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시신으로 발견된 성 전 회장의 상의 주머니에선 메모지가 발견됐는데 ‘유정복 3억, 홍문종 2억, 홍준표 1억, 부산시장 2억’ 등 실명과 로비로 추정되는 구체적인 액수까지 기록돼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성완종 리스트’라 불렀다. 2015년 가장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사건 중 하나라는 점에서 청와대 측이 그냥 지나쳤을 리 만무하다.
 

지난 2007년 대선 경선서 MB와 맞붙은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후보는 MB의 BBK 사기 연루를 주장했다. 이후 서로에 대한 고소·고발전이 이어졌고 결국 MB는 당선자 신분으로 BBK 특검 수사를 받아야만 했다. 이 때의 앙금은 18대 총선서 친이(친 이명박)계의 친박(친 박근혜)계에 대한 공천 학살로 이어졌다.

‘논두렁 공작’ 배후는?
‘정윤회 수사’ 보고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만기 출소한 김경준 전 BBK 투자자문 대표는 자신에게 ‘기획입국’을 제안한 사람이 박 전 대통령의 변호인인 유영하 변호사라고 주장했다. 유 변호사는 한나라당 경선 때 박근혜 후보 측에 있었다. MB 측과 갈등을 벌였던 박 전 대통령이 BBK와 관련된 정보들을 수집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박 전 대통령 집권 2년 차에 터진 정윤회 비선실세 의혹은 최순실 사태의 전초전이었다. 청와대는 당시 유출된 문건에 대해 ‘찌라시’라고 비난하면서 이 같은 의혹을 보도한 <세계일보> 사장과 기자 등을 검찰에 고소했다.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검은 형사1부에 문건 내용의 진위를 특수2부에 문건유출 부분을 배당해 뒷말을 낳았다. 실제 검찰은 문건 유출 경위에 초점을 맞춰 수사하는 등 석연찮은 점을 보였다. 

곧 청와대가 개입해 짜맞추기식 수사를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다. 이에 대한 동향보고가 민정수석실을 통해 이루어졌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박근혜정권에서 채동욱 전 검찰총장 혼외자 논란을 기획해 찍어내기를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채 전 총장은 취임 후 곧바로 ‘국정원 대선 댓글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국정원의 공직선거법 위반이 의심된다”고 결론 내렸는데, 이는 정권의 정통성을 흔들 수 있는 사안이었다. 이에 불안함을 느낀 당시 청와대가 지시를 내려 채 전 총장에 대한 뒷조사를 실시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정윤회·채동욱
의혹의 키맨들

이 같은 의혹을 담은 문건이 추가로 발견될지는 미지수다. 발견된다고 해도 내용을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공개 여부와 관계없이 만약 추가 문건이 발견된다면 ‘적폐청산’의 연장선에서 재조사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청와대 내부에선 문건 내용 공개에 신중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외교·안보 등과 같이 민감한 사안이 아니라면 불법적인 지시가 담긴 것으로 판단되는 문건을 수사기관으로 넘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chm@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찔리는 자유한국당

청와대 캐비닛 문건 공개와 관련해 자유한국당(이하 한국당)이 무력시위를 펼쳤다. 한국당은 보도자료를 통해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과 성명 불상의 청와대 직원들을 공무상 비밀누설 및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 대변인은 “우리가 발견한 문건 중 ‘비밀’ 분류도장이 찍혀 있는 문건은 없다”며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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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