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신문고-억울한 사람들>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정주 할머니

전쟁 포화 속 살기위해 달려 ‘참혹 그 자체’ “내 힘든 거 말로 다 못해요”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일요시사>가 연속기획으로 ‘신문고’ 지면을 신설합니다. 매주 억울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담을 예정입니다. 어느 누구도 좋습니다. <일요시사>는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겁니다. 다섯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 노역을 당한 김정주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11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두 분은 그렇게 한날에 별세했다. 수많은 시간 동안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와 역사왜곡을 규탄하는 시위를 펼쳤으나 끝내 반가운 소식을 듣지 못하고 떠나셨다. 일본의 만행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비단 위안부 할머니들뿐이겠는가. 강제로 끌려가 노역을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갖은 오해로 힘든 삶을 살아온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정주 할머니로부터 생생한 증언을 들어봤다.

강제노역 피해 할머니

김정주 할머니는 올해 85세에 접어들었다. 끌려간 장소와 연도는 달랐지만 함께 일본에서 고생한 친언니 김성주 할머니는 87세를 맞았다. 친자매를 강제 노역지로 끌고 간 사상 유례없는 일본의 만행에 맞서 두 할머니는 그동안 끈질긴 법정 싸움을 이어왔다.

“일본에 가서 재판할 때마다 눈물 안 흘리고 온 적이 없어요.”

김정주 할머니는 힘없는 목소리로 운을 땠다.

“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한편으론 시대를 잘못 만나서 끌려갔다고 생각했어요. 언니가 끌려가고 나도 뒤이어 끌려갔으니 참… (힘든 것은) 말도 못하죠.”

꿈 많은 10대 소녀였던 김 할머니는 중학교에 보내준다는 일본인 선생님의 말을 듣고 배에 몸을 실었다. 1년 전 일본으로 갔던 언니를 만나게 해준다는 말도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김 할머니는 교실도, 언니의 그림자도 한 번 보지 못한 채 도야마현에 있는 후지코시 공장으로 끌려갔다.

“순천남국민학교에서 둘이 갔어요. 나하고 한 아이가 같이 갔는데 그 애는 아무래도 일본에서 죽은 것 같아요. 한국에 올 때도 그렇고 오고 나서도 못 만났어요. 수소문해도 못 찾았어요.”

당시 그런 경우가 많았는지 물어봤다.

“병에 걸리기도 하고, 머리(카락)도 빠지고 했어요. 배가 고파서 풀을 뜯어먹고 그랬으니께.”


김 할머니의 슬픈 눈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절박했던 상황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강제노역지에서는 어떤 일이 자행되고 있었을까?

“그때도 키가 작아서 사과궤짝 두 개를 놓고 올라가서 일했어요. 그곳에서 비행기 발통(바퀴)을 깎았어요. 기계가 떨어져서 머리를 다칠 뻔한 적도 있었어요.”

공업용 기계와 산업용 로봇 등을 생산하는 후지코시강재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1945년 한반도에서 12∼16세 소녀 1089명을 근로정신대로 동원해 혹독한 조건 속에서 노역을 강요한 전범 기업이다.

“새벽 5시 기상해서 출근했는데, 가는 길에 일본 군가를 불러야했어요. 아침에는 된장국을 줬는데 파, 두부가 들어간 게 아니라 그냥 국물만 있는 거 줬어요. 주걱으로 밥 한 번, 국 한 숟가락이 끝이었어요. 다른 반찬 하나 없었죠.”

김 할머니는 당시를 회상하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12살 때였고 다들 12∼13살이었어요. 그러니 배가 얼마나 고픕니까? 아침에 그 밥을 먹고는 기계에 가서 일하면 힘이 없어요. 그런데 점심은 식빵 반 조각이 다였어요. 저녁은 밥 한 숟가락에 다깡(단무지) 세조각이 끝이었죠.”

그렇게 소녀들은 철저한 감시 속에서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일해야만 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감시를 했어요. 화장실에 갈 때는 일본 남자가 따라와서는 조금만 늦게 나오면 ‘왜 늦게 나오냐’며 발로 차고 때렸어요.”

85세 노령…강점기 노역 생생 증언
오랜 싸움, 얼마 남지 않은 시간들

갖은 폭력과 학대를 버틴 소녀들은 일과가 끝났다고 좋아할 수 없었다. 더 무서운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허벌판에 철조망 친 것이 우리 기숙사였어요. 중간에 도망친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잡혀서 위안부로 넘겨졌죠. 도망을 가도 어딜 갈지, 한국에 어떻게 갈지 모르잖아요.”

고된 몸을 이끌고 누운 소녀들에게는 죽음의 공포가 찾아와 괴롭혔다.

“신을 벗고 잔 적이 없어요. 미국 비행기가 나타나 공습할까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더 스트레스였어요.”

김 할머니는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말해줬다.

“한번은 사이렌이 울려서 바로 달려 나갔어요. 어떻게든 도망갔어요. 폭탄이 ‘팡’하고 떨어지면 어두운 밤하늘이 환~하게 밝아졌어요. 논에도 떨어지고 개울가에도 떨어지고. 그러다 우린 넘어졌죠. 아침에 (공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면 임신한 여자도 죽어있고 말도 죽어있고 그랬어요. 참혹했죠. 그런 장면을 보면 참 서러웠어요. 우리가 여길 죽으러 왔나 살러 왔나 하는 생각에 힘들었어요.(눈물)”

김 할머니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다잡고 말을 이어갔다.

“많이 울었어요. 한번은 저녁에 밥 먹고 어떤 아이가 저 멀리를 보며 ‘고향의 그리운 어머니’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다 같이 울었어요.”

해방 이후에도 김 할머니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8월15일,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돼 모두가 기뻐할 때도 김 할머니는 소식을 듣지 못한 채 11월까지 일본에서 공장 일을 해야 했다. 한국에 와선 오해와 편견에 지쳐갔다. 일본에 갔다 왔다는 이유만으로 ‘위안부’라며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했다. 결국 파혼당한 할머니는 하나 있는 아들과 함께 힘든 삶을 이어가야 했다.

“일본 때문에 언니나 나나 (5초간 침묵) 남편한테도 멸시당하고 가정도 파탄나고… 떡 장사, 사과장사 안 해본 게 없어요. 청량리 가서 사과 하나 때서 궤짝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팔았어요. 그렇게 33원 벌면 그게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보리랑 쌀 섞인 거 딱 1kg 사서 우리 아들하고 밥해먹었죠. 아들이 ‘엄마, 김치만 먹으니 속이 시려워∼’라고 말하는데… 그 말 한 것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인터뷰 말미 즈음 ‘소원’을 물어보는 기자의 질문에 김 할머니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우리나라에 절대로 전쟁이 없었으면 좋겠고, 후세의 아이들이 우리처럼 고생하는 거 없이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위안부 할머니들 문제만이라도 잘 (해결)되도 좋겠다 싶어요.”

역사 속 산증인들

알려진 바대로 김 할머니를 비롯한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은 지리한 법정공방 중에 있다. 그러나 전범기업인 ‘후지코시’와 ‘미츠비시’는 피해보상을 하지 않기 위해 소송장을 반송하며 시간만 끌고 있는 실정이다. 빼앗긴 청춘을 되찾을 순 없지만 일본정부와 전범기업의 진심 어린 사과와 피해보상을 촉구하고 있는 할머니들의 평균 연령은 80대 후반, 위안부 할머니들을 떠나보낸 것처럼 역사의 산 증인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아 보인다.

 

<chm@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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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