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기획> 망조 들린 '재벌가 집터'의 비밀

쫄딱 망한 회장님 “다 이유 있다”

[일요시사=경제1팀] 한때 재계를 주름잡던 회장님들의 초라한 말년이 눈길을 끈다. 자금난에 시달리다 자택까지 줄줄이 경매로 넘기는 처지가 된 것. 잘 나가던 집 주인들이 하루아침에 망하자 재계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터가 안좋다’는 집터 괴담까지 나돌았다. 과연 이들의 파란만장 인생사는 집터와 연관이 있을까. 경매 굴욕을 맛본 회장님들을 한 데 모아봤다.
 

재벌 일가가 소유한 부동산이 속속 경매 법정에 등장하고 있다. 최근 경매업계에 따르면 과거 잘 나가던 회장님들 자택이 경매에 부쳐지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한동안 잊혔던 이름까지 또 다시 여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기구한 운명
‘아 옛날이여’

고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의 장남 양희원 아이씨씨코퍼레이션 대표가 소유한 성북동 단독주택은 오는 2일 경매에 부쳐질 예정이다. 고급주택이 밀집한 성북동 부촌 중에서도 중심부에 자리 잡은 이 집은 1970년 지어졌다. 대지면적만 1921㎡에 달하고, 지하1층~지상 2층으로 구성된 건물은 777㎡ 규모다. 감정가는 73억 8000여만원. 지금까지 경매시장에 나온 성북동 고급주택 중 규모와 가격 면에서 단연 1위라는 평가다.

국제그룹은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1980년대에는 재계서열 7위까지 한 재벌기업이다. 고무신 생산 업체인 국제고무공장을 전신으로,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스포츠 브랜드 ‘프로스펙스’를 탄생시킨 곳이다. 국제그룹은 이후 중화학, 섬유, 건설 분야 등에 잇따라 진출하고 무려 21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1985년 전두환 정권에 밉보이면서 회사가 1주일 만에 공중분해 당하는 불운을 겪은 바 있다.

국제그룹처럼 이 집 또한 곡절이 많았다. 양 회장이 거주하던 이 집은 1987년 국제상사 명의로 넘어갔고 이후 1998년 11월 양 대표가 다시 되찾은 것으로 전해진다. 10년만에 어렵게 되찾은 집은 다시 15년만에 남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제2금융권 대출을 받았다 갚지 못한 탓이다.
 


양 대표는 2006∼2011년 이 집을 담보로 푸른상호저축은행으로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27억여원을 빌렸다. 하지만 원금은커녕 이자까지 갚지 못해 결국 경매당하는 처지가 됐다. 전문가들은 등기부등본상 채무자가 아이씨씨코퍼레이션인 점을 감안해 봤을 때 양 대표가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자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주인 줄줄이 망해 ‘경매 단골’된 빌라도
집터와 오너 궁합 중요 ‘길흉화복 원천지’

경매법정에 이름을 올린 회장 일가는 국제그룹 뿐만이 아니다. 지난 1월에는 백종헌 프라임그룹 회장 일가가 거주하던 고급빌라가 법원경매에 나왔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 고급빌라 밀집 지역에 위치한 이 빌라는 3층에 위치해 있으며 대지면적 185㎡, 건물면적 316㎡에 달한다. 감정가는 15억원이다.

백 회장은 1998년 문 연 서울 강변역 테크노마트 개발 성공을 발판으로 중견그룹을 일군 부동산 개발 사업자의 효시다. 이후 한글과 컴퓨터, 동아건설, 신안 프라임상호저축은행, 프라임엔터테인먼트 등의 기업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기세 좋게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잘 나가던 프라임 그룹은 글로벌 금융위기 후 직격탄을 맞았다. 부동산 건설 침체와 유동성 위기로 주력 계열사인 프라임개발과 신안이 2011년 8월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가고 말았다. 백 회장이 동아건설 등 계열사와 보유 자산 매각 등을 통해 재기에 나서고 있지만 현재까지 별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줄줄이 파산
나쁜 기운 탓?

백 회장이 내놓은 빌라 역시 기구한 운명은 타고났다. 빌라의 이전 주인은 1980년대 프로야구 삼미슈퍼스타즈 야구단을 운영하기도 했던 삼미그룹의 김현철 회장이었다.


김 회장은 삼미그룹의 부도 후 이 빌라를 경매에 내놨고, 2003년 11월 백 회장이 11억3351만원에 낙찰받았다. 하지만 백 회장 역시 이 집을 담보로 빌린 대출금액을 갚지 못해 빌라는 또다시 새로운 주인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됐다. 백 회장이 소유하고 있던 같은 빌라 1층도 빚을 갚지 못해 지난해 8월 경매에 부쳐진 바 있다.
 

채규철 도민저축은행 회장 소유의 주택도 경매에 부쳐져 지난 1월 낙찰됐다. 서울 강동구 성내동에 위치한 채 회장 소유의 빌라 두 채는 각각 12억원, 12억2000만원으로 3번 유찰 끝에 새 주인을 찾게 됐다. 채 회장은 600억원이 넘는 부실대출로 도민저축은행에 막대한 재산상 손실을 입혀 지난 1월 징역 4년을 확정 받은 바 있다.

최근에는 채 회장이 소유한 초고가 외제차 4대가 한꺼번에 경매에 나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유종환 성창F&D 대표 소유의 자택이 매물로 나왔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유 대표 소유 집은 감정가 60억6966만원으로 경매에 부쳐졌다. 유 대표는 국내 최초의 대형 패션전문 쇼핑몰인 ‘동대문 밀리오레’ 성공 신화로 한때 주가를 높이던 인물이다.

경매와는 사례가 조금 다르지만 ‘샐러리맨 신화’를 썼던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 자택도 지난 1월 급매물 시장에 나왔다. 서울 서초동 고급 빌라에 위치한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집 중 하나로, 시가만 약 100억원대에 달한다.

강 회장은 당시 STX그룹이 유동성 위기를 겪으며 우리은행 대출금 89억원, 하나은행 30억원 주택담보대출 금액 등을 갚을 길이 없게 되자 최후의 방편으로 자신이 거주하던 집을 매각키로 했다. 이 고급빌라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나 최재원 SK그룹 부회장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 오너들도 소유해 유명해진 곳이다.

부도에 자살
흉흉한 괴담

최근 사례 외에도 회장님 집이 경매시장에 모습을 드러낸 일은 비일비재했다. 2012년에는 고 박용오 전 성지건설 회장 자택이 경매 물건으로 나왔다. 박 전 회장은 1998년부터 2008년까지 그룹 회장으로 두산그룹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서울 성북동 고급주택가에 위치한 박 전 회장의 자택은 대지 310㎡, 건물 240㎡의 복층 주택으로 감정가는 15억원에 달했다.

한 때 대기업 총수를 지냈던 그의 자택이 경매에까지 부쳐지게 된 이유는 사업 실패에 따른 자금난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 자택은 박 전 회장의 두 아들인 박경원·중원 형제가 공동소유하고 있었으나, 이미 2008년 12월 제일저축은행 등 11개 저축은행이 60억원의 근저당을 설정해놓은 상태였다.

수십억대 ‘회장님들 저택’ 경매 쏟아져
국제그룹 회장 일가·프라임그룹 회장 등

‘비운의 총수’라 불리는 박 전 회장은 고 박두병 두산 초대회장의 6남 1녀 중 2남이다. 두산가(家) ‘형제의 난’을 계기로 그룹에서 밀려난 뒤 성지건설을 인수해 재기를 노렸지만 경영에 어려움을 겪어오다 2009년 11월 이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 전 회장이 불운한 삶을 살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자 당시 재계 안팎에선 ‘집터 괴담’이 떠돌기도 했다. 터가 안 좋기 때문에 박 전 회장이 망했고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이다. 이후 이 집은 장남이 2011년 상속받았으며 채무도 그대로 떠안았다.
 


신명수 전 신동방그룹 회장의 성북동 자택 역시 같은 해 강제경매에 부쳐졌다. 청구액 1억원을 갚지 못해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돈으로 1980∼199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 회장이 1억원의 빚 때문에 집을 날릴 위기에 처하자 업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법원이 책정했던 이 집의 감정평가액은 33억1199만이었지만 서울 성북동에서도 손꼽히는 저택에 속하는 거주 여건과 특화성 탓에 감정가격을 뛰어넘는 44억여원에 낙찰됐다. 하지만 이후 신 전 회장 부인 송모씨가 1억1000만원을 법원에 공탁한 뒤 집행정지를 신청하면서 경매는 사실상 취소됐다.

2008년에는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 소유의 서울 신문로 단독주택이, 2007년에는 김중원 전 한일그룹 회장 소유의 서울 역삼동 단독주택, 범양식품 박승주 전 회장 일가의 성북동 단독주택이 각각 경매됐다.
이에 앞서 2003년에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살던 서울 방배동 자택이, 2002년에는 최원석 전 동아건설 회장의 서울 장충동 자택이 각각 경매에 부쳐진 바 있다.

명당 집터가
기업 세운다

과거에는 몰락한 재벌의 집은 소위 ‘망조들린 집’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때문에 경매 시장에 회장 자택이 나와도 제 값에 팔리지 않거나 유찰되는 경우가 많았다. 좋은 집터의 기운이 기업 성장에 영향을 미친다는 시각이 컸다. 풍수 전문가들 역시 기업 미래는 회장의 집터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양만열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평생교육원 풍수지리학 교수는 “그룹의 흥망운을 정단할 때 물론 사옥터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집터”라며 “집터와 회장의 사주가 잘 맞아야 취와 복의 괘를 가지고 길한 영향을 받게된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일종의 ‘경영 나침반’으로 활용되는 집터가 회사의 길흉화복 원천지”라고 거듭 설명하며 “경매에 부쳐진 집이라고 해서 모두 나쁜 기운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며, 그 집에서 살면 줄줄이 파산을 면치 못한다 해도 그 터의 사주와 잘 맞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오히려 파산한 재벌들이 살던 집이 경매에서 인기를 끄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한다. 정충진 법무법인 열린 변호사는 “그룹 회장이 소유한 주택은 내부 인테리어가 잘 돼 있어 실제 가치가 감정가 이상으로 높은 경우도 종종 있다”며 “최근엔 고급주택의 낙찰가도 낮게 형성돼 저렴하게 고급빌라를 마련하려는 실수요자와 투자자들이 늘고 있는 추세”라고 귀띔했다.

 

김설아 기자 <sasa708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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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