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진으로 간 사장들 활약상

어제 동지가 오늘 적…친정에 비수 ‘팍’

[일요시사=경제1팀] 재계에 ‘신(新)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너도나도 사령탑을 교체하면서 앙숙이었던 경쟁사 인력을 수혈하고 있어서다. 특히 ‘친정’을 향해 뒤통수를 제대로 날린 이적 CEO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이들은 새로운 경쟁구도를 형성하며 친정과 피 튀기는 맞대결을 펼치고 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 이적 CEO들을 모아봤다.

경쟁사로 이적해 친정 회사와 정면 승부를 펼치고 있는 전문 CEO들이 각광받고 있다. 능력 있는 CEO들이 경쟁사에 스카우트되는 게 일반화된 외국처럼 국내에서도 식품·유통·IT업계를 중심으로 CEO들이 경쟁사로 옮겨 맹활약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준비된 인재
파격 스카우트

SPC그룹은 ‘CJ 인재 모시기(?)’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최근에는 CJ 출신 권인태 부사장을 영입해, 계열사인 파리바게뜨 마케팅BU(부사장)로 선임했다. 영업부서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로 알려진 권 부사장은 CJ그룹 지주회사인 CJ에서 전략지원 업무를 지휘해 왔다.

대구 영신고와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그는 1986년 제일제당에 입사해 CJ푸드빌 경영기획실장, CJ제일제당 영업SU장 등 영업 담당을 거쳤다. 이후 CJ그룹 전략지원팀장(부사장), 홍보실장, CRS팀장 등을 지냈다.

SPC그룹은 그동안 경쟁사인 CJ푸드빌과 CJ제일제당에서 닦아온 권 부사장의 영업 노하우를 높이 평가해 영입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SPC그룹과 CJ는 베이커리와 커피 등 다양한 사업 분야에서 경쟁을 펼치고 있는 라이벌이다. 업계는 이 점 때문에 권 부사장이 우선 계열사 마케팅을 총괄하지만 상황에 따라 그룹의 경영전반에 관여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권 부사장 영입 배경에 윤석춘 삼립식품 사장의 역할이 컸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윤 사장은 CJ에서 권 부사장과 한솥밥을 먹다가 2012년 SPC그룹 계열사인 삼립식품에 먼저 자리를 잡았다.

윤 사장은 당시 CJ제일제당에서 식품과 영업을 두루 거친 인물로, 식품업계 생리에 대해  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신선사업본부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에는 두부사업을 진두지휘했고, 이후 식품총괄본부장을 거쳐 영업까지 총괄한 바 있다.

식품·유통·IT업계 경쟁사 스카우트
영업력 강화·신사업 위해 외부 수혈

삼립식품으로 적을 옮겨 대표이사 부사장을 맡은 후에는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렀다. 지난해 3분기 누적 매출(연결 기준)이 7849억원으로 2012년보다 31.1% 증가했으며 영업이익은 238억원으로 2012년 78억과 비교해 205.1%나 수직상승했다. 지난해 6월 육가공업체 알프스 식품을 인수하는 등 윤 사장의 과감한 투자가 빛을 발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윤 사장은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지난 3일 대표이사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승진됐다.

재계 한 관계자는 “윤 사장이 성공적으로 회사를 이끌어 나가자 SPC그룹이 권 부사장을 영입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안다”며 “평소 앙숙처럼 지내는 경쟁사의 핵심 인력을 영입한 만큼 CJ와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A+’성적표
구원투수 투입

동원그룹의 선택도 파격적이다. 지난해 3월 동원F&B의 동종 업계인 대상의 대표를 지낸 박성칠 사장을 구원투수로 영입했다. 박 사장 스카우트 배경에는 위기에 빠진 동원F&B를 구하려는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의 의중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리건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1980년 외환은행에 입사한 이후 1993년 삼성전자로 자리를 옮겼다. 2000년까지 삼성전자 PI(프로세스 혁신) 총괄, 2003년까지 i2테크놀로지 대표이사,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삼성전자 SCM(공급망 관리) 및 PI, 경영혁신 총괄 등을 역임하면서 ‘혁신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박 사장이 처음 식품업계와 인연을 맺은 건 2009년이다. 대상이 처음으로 외부 전문가 박 사장을 영입해 경영을 맡겼고, 취임 첫해 매출 1조원 돌파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실제로 대상은 박 사장 재임 기간인 2009∼2011년까지 영업이익은 534억원에서 943억원으로 76.6% 늘어났고, 영업이익률도 5.29%에서 6.77%로 상승했다.

위기에 빠졌던 대상을 살려낸 그는 동원F&B 사장 취임 후 온라인몰 규모를 늘리고 공급망 관리를 강화하는 한편 참치캔의 원가 구조를 개선하는 등 혁신을 주도했다.

그 노력에 실적이 화답했다. 동원F&B가 지난해 11월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3분기 누적 매출(연결 기준)은 1조3201억원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1.4% 올라 소폭 증가했으나 영업 이익은 523억원으로 지난해보다 30.4% 증가해 선방했다는 평가다.

업계에서는 이를 ‘박성칠 효과’라고 부를 정도다. 업계 한 관계자는 “주목할 점은 마케팅비와 R&D 비용 등 쓸 때 돈을 아끼지 않으면서 이 같은 결과를 달성했다는 것”이라며 “박 사장 스카우트가 곧 수익성 개선이라는 확실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게 다시 한 번 증명된 셈”이라고 말했다.

오비맥주는 2010년 1월 ‘진로출신 영업의 달인’인 장인수 하이트주조 사장을 영업총괄 부사장으로 발탁했다. 1993년 만해도 국내 시장 점유율 70%를 기록해온 오비맥주를 3년 만에 2위로 밀어냈던 ‘숙적’인 하이트진로의 최고 경영자를 영입한 것이다. 장 사장은 1994년 당시 오비맥주의 추락을 앞당긴 적장으로 전해진다.

샐러리맨 신화
장수 CEO

서울 대경상고(현 대경정보산업고)를 졸업한 장 사장은 1980년 진로에 입사, 30년 가까이 진로(2005년 이후 하이트진로)에서 영업현장을 누빈 국내 주류업의 산증인이다. ‘정치 깡패’로 불리던 유지광의 주류 도매상을 담당하기도 하고 ‘참이슬’의 성공을 이끌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2008년 하이트주조·2009년 하이트주정의 대표이사까지 올랐다. ‘고졸’ 핸디캡을 극복하고 정상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성공신화는 경쟁사인 오비맥주에서도 계속됐다. 누구보다 오비맥주의 강·약점을 훤하게 꿰뚫고 있던 그는 취임 후 재고를 줄이고 공장에서 막 나온 맥주를 최대한 빨리 공급하기 위해 영업 비용을 30% 이상 늘렸다. 신선한 맥주 생산을 위해 2000억원을 투자해 시설도 개선했다.

그 결과, 취임 2년 만에 ‘맥주본가’의 명성을 되찾았다. 하이트진로를 제치고 만년 2위에서 맥주 업계 1위를 탈환했다. 오비맥주의 시장점유율은 현재 60%에 달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지난 1월 오비맥주를 인수한 세계 1위 맥주 회사 AB인베브의 카를로스 브리토 최고경영자도 “오비맥주 경영진은 지난 몇 년간 회사를 업계 선두 주자로 성장시키는 큰 성과를 이뤘다”며 장 사장을 높이 평가했다. AB인베브는 장 사장에게 오비맥주 경영을 계속 맡기기로 했다.

권인태·윤석춘…베이커리 라이벌 CJ서 이직
‘고졸신화’장인수 카스 앞세워 업계 1위 탈환
‘매직 손’박성칠 취임 첫해 매출 1조원 돌파


화장품·생활용품 업계에선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이 돋보인다.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회계학을 전공하고, 코넬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동종 업종 경쟁사인 한국P&G CEO를 지낸바 있다. 지난 2005년 LG생활건강 CEO로 영입된 후, 코카콜라음료·페이스샵·해태음료 등 11건의 인수합병을 통해 매년 최고의 실적을 실현했다.

그가 LG생활건강으로 부임한 후 회사 매출은 2005년 3·4분기부터 올 3분기까지 34분기 연속, 영업이익은 2005년 1분기 이후 36분기 연속으로 성장하며 LG그룹의 새로운 주력 기업으로 떠올랐다. 생활용품과 화장품, 음료사업 등 각 사업부의 연간매출 1조원 시대를 열었다.

2010년 차병원그룹의 차바이오&디오스텍에서 개발한 인체 줄기세포 배양액 원액을 원료로 공동 개발한 생명공학 화장품 ‘오휘 더퍼스트’는 그의 대표적인 성공 작품이다. 이 제품은 매년 평균 매출이 15%씩 늘고 있는 ‘효자 상품’에 등극했다. 이러한 성과로 차 부회장은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도 대표이사 자리를 10년 째 유지하며, 현재 LG그룹 부회장단 중 전문경영인으로는 가장 오래 CEO 자리를 지키고 있다.

IT업계에서는 ‘삼성 출신’들이 주목받고 있다. SK그룹이 경쟁사인 삼성전자 CTO(최고기술책임자)를 지낸 임형규 전 사장을 SK그룹 정보통신기술(ICT) 부회장으로 영입했고, 서광벽 전 삼성전자 부사장도 SK하이닉스 미래기술전략총괄 사장으로 임명됐다.

자존심 싸움
새둥지서 훨훨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그룹 핵심임원이 경쟁업체에 이직하는 사례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보수적인 업계 분위기 탓에 경쟁사로 둥지를 옮기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될뿐더러, 수년째 이어온 라이벌간 자존심 싸움이 강해 인력 이동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일각에서는 최근 잇따르는 ‘경쟁사 러브콜’ 움직임에 대해 여전히 우려의 목소리를 내놓고 있지만 업계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재계 한 관계자는 “가장 경쟁력 있는 CEO는 해당 업계동향과 경쟁사의 움직임을 잘 파악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동종업계에서 경험 있는 인물을 선호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고 풀이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CEO는 경쟁 업체의 장단점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어 영입을 원하는 회사 입장에서는 ‘준비된 CEO’라고 할 수 있다”며 “기존 회사의 경영 전략에 밝은 만큼 시장 대응과 전략 마련에 매우 유리하다”고 말했다. 이어 “시장 상황이 좋지 않고, 내부에서 수혈이 되지 않을 경우 외부를 통해서라도 이를 해소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자 마지막 퍼즐 맞추기인 셈”이라고 강조했다.

 

김설아 기자 <sasa708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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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