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정부의 'MB 지우기' 막전막후

  • 김명일 mi737@ilyosisa.co.kr
  • 등록 2013.09.23 10:2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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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국정과제는 MB 5년 발자취 '쓱싹쓱싹'?

[일요시사=정치팀] 박근혜정부에선 요즘 ABM(Anything but MB) 인사라는 말이 유행이다. 'MB사람만 빼고 다 좋다'는 뜻이다. 일각에선 박근혜정부의 최대 국정과제가 'MB 지우기'라는 비아냥거림도  들린다. 어찌된 사연일까? MB 흔적 지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박근혜정부의 실태를 <일요시사>가 낱낱이 살펴봤다.




박근혜정부의 'MB 흔적 지우기' 작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과거 정권에서 있었던 각종 의혹과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가 속도를 내고 있고, 과거 정권에서 임명했던 사람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가고 있다. 인사와 사정, 정책 등 전 분야를 총망라한 과거 정권 지우기다.

MB 사람들
'추풍낙엽' 

박근혜 대통령은 심지어 이명박 전 대통령 내외가 청와대에서 키우던 꽃사슴도 모두 서울대공원으로 돌려보냈다. 이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서울대공원에서 암사슴 2마리와 수사슴 1마리를 데려와 청와대 경내에 풀어놓고 키웠다. 꽃사슴들은 이후 빠르게 번식해 퇴임 무렵엔 26마리까지 불어났다. 꽃사슴들은 청와대를 휘젓고 다니며 녹지원(청와대 정원)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었지만 이 전 대통령 부부 내외는 꽃사슴들을 자식처럼 아꼈다.

박 대통령은 이런 꽃사슴들을 취임식 후 채 한 달도 안 돼 모두 서울대공원으로 돌려보냈다. 게다가 서울대공원 측은 꽃사슴을 수용할 공간이 마땅치 않다며 이마저도 경기도의 한 농가에 모두 팔아치웠다. 한때 대통령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꽃사슴들의 초라한 처지가 왠지 MB사람들의 오늘과 닮아있다.

과거 미국에선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민주당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이어 정권을 잡으면서 ABC(Anything But Clinton·클린턴이 하던 것만 빼고는 무엇이든 괜찮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를 빗대 박근혜정부에서는 ABM(Anything But MB·이명박이 하던 것만 빼고는 무엇이든 괜찮다)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을 정도다.


MB가 하던 것만 빼곤 뭐든 다 괜찮아?
'MB표 정책'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손봐

대표적인 사례가 각종 인선이다. 박근혜정부 들어 MB사람들은 속절없이 밀려나고 있다. 한때 금융계를 쥐락펴락한 '금융계 4대 천왕(天王)'도 새 대통령의 카리스마에 짓눌려 자기 목소리 한번 제대로 못 내고 물러났다. 지난 4월에는 강만수 전 KDB금융지주 회장이, 6월에는 이팔성 전 우리금융그룹 회장이, 그리고 7월에는 어윤대 전 KB금융그룹 회장이 연이어 자리에서 물러났다. 김승유 전 하나금융그룹 회장은 박근혜정부 출범 이전인 지난해 3월 퇴임했다.

알게 모르게 자진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MB계 공기업 사장들도 한둘이 아니다. 실제 장태평 한국마사회 회장은 지난 2일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만나 사표를 제출했다. 임기가 1년2개월이나 남은 상태였다. 정정길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도 임기를 8개월 남겨놓고 지난달 30일 사의를 표명했다.

장 회장과 정 원장은 대표적인 'MB맨'이다. 장 회장은 MB정권 초기 2년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을 지냈고, 정 원장은 비슷한 시기 청와대 대통령실장을 맡았었다. 이지송 전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 김건호 전 한국수자원공사 사장 등도 임기를 남기고 일찍이 사퇴했다.

눈칫밥 먹다
임기도 못 채워

이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이석채 KT 회장과 정준양 포스코 회장의 퇴임설도 꾸준히 들려온다. 이 회장과 정 회장은 2015년 초까지 임기가 남아 있는 상태다. 특히 정 회장의 경우 국세청이 포스코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조사에 착수하면서 사퇴론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

포스코 측은 정기 세무조사라고 밝히고 있지만, 지난 2005년과 2010년 5년 단위로 정기 세무조사를 받은 바 있어 불과 3년 만에 이뤄진 이번 조사가 정 회장을 겨냥한 특별 세무조사라는 소문이 끊이질 않고 있다. KT와 포스코는 민영화된 이후 정부 지분이 전혀 없지만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낙하산 인사' 논란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청와대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달 임기를 무려 1년7개월여나 남겨둔 시점에서 돌연 사퇴한 양건 전 감사원장의 경우는 이임식에서 직접 준비한 이임사를 통해 "외풍을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며 자신의 재임기간 감사업무나 인사 등에 관해 정치적 외풍이 적지 않았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지난 13일 전격사퇴한 채동욱 검찰총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혼외자녀 의혹으로 논란을 겪어온 채 총장의 사의표명은 이날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채 총장에 대한 감찰을 지시한 직후 이뤄졌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사실상 청와대의 사퇴압력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채 총장은 박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은 인사지만 대선 직후 이명박정권 하에서 꾸려진 검찰총장추천위원회의 추천을 받은 인사로 실질적으로는 이명박계 인사로 분류되어 왔다. 청와대 이정현 홍보수석도 지난 6월 "채 총장은 이명박정부가 지명한 검찰총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같은 일련의 사건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박 대통령이 참여정부 인사는 써도 이명박정부 인사는 안 쓴다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다.

박근혜정부는 정책면에서도 MB지우기가 한창이다. 박근혜정부는 우선 이 전 대통령 시절에 도입된 'A·B 선택형 수능' '니트(NEAT)' '입학사정관제' '자율형 사립고' 등 굵직굵직한 주요 교육정책들을 대폭 수정 또는 폐지하기로 했다.

교육부가 지난달 발표한 '대입전형 간소화 및 대입제도 발전방안'에 따르면 MB정부가 지난해 도입해 올해 처음 실시되는 A·B형 선택형 수능은 정책 결정 1년 만에 폐지 수순을 밟는다. MB정부가 오는 2016학년도부터 대입수학능력시험의 영어 과목을 대체하기 위해 도입을 추진한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인 니트(NEAT)도 수능에 반영하기 않기로 했다.

또 교육부가 이날 발표한 새 입시전형에 따르면 입학사정관전형은 학생부 위주 전형에 포함됨으로써 사실상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MB정부에서는 입학사정관제 장려 등으로 각 대학들이 최대 3000개까지 전형을 늘렸지만, 이번 교육부의 전형 축소 방안으로 전형이 절반 이상 줄 것이라는 계산도 나왔다. 성취평가제가 사실상 연기되고, 자사고 정책이 변경됨에 따라 지역 단위 자사고의 인기도 크게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MB표 정책 
줄줄이 폐기

박근혜정부에서는 새로운 성장동력의 표상이라고 추앙받던 '녹색'이란 단어를 없애는 데도 한창이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녹색이 과거 이명박정부가 시행했던 '녹색성장' '녹색에너지'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박근혜정부도 재생에너지 분야 등에 관심이 있어 정책방향 자체는 이명박정부와 비슷하지만 산업통상자원부와 산하기관들의 정부시책이나 사업보고서 등에서 최근 '녹색'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꼭 유지해야 할 직책은 아예 이름을 갈아치웠다. 녹색대사가 기후변화대사로 바뀐 게 대표적 사례다.

비영리 민간단체에 대한 정부 보조금 지원 사업에서도 녹색 성장 등 MB 지우기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지난 4월 안전행정부는 총 289개 단체에 144억8000만원을 지원해주는 2013년도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을 확정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이명박정부가 주요 국정과제로 추진했던 녹색성장 관련 사업에 대한 지원이 지난해에 비해 크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녹색성장 및 자원에너지 절약 분야는 지난해 45개 사업 22억7100만원을 지원했지만 올해는 34개 사업 16억7900만원으로 5억8000만원 가량이나 줄어들었다. 이 분야에 지원한 시민단체들의 숫자도 지난해 72개 단체에서 58개 단체로 대폭 감소했다.


지난해 여름철 산업통상자원부(구 지식경제부)의 상징이었던 '휘들옷'도 사라졌다. 휘들옷은 휘몰아치는, 들판에 부는 시원한 바람같은 옷이라는 뜻으로 일반소재보다 체감온도가 2~3℃ 시원한 국산 첨단소재가 사용됐다.

지난해 산자부는 여름철 전력난을 맞아 휘들옷에 대해 대대적인 홍보 활동을 벌이며 솔선수범해서 착용했으나 새 정부 들어서는 휘들옷을 착용하고 있지 않다. 지난해 가장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나섰던 산자부가 사실상 착용을 중단하면서 휘들옷은 MB정권의 잔재로 취급받으며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금융부분에 있어서도 지난 5년간 구축됐던 'MB금융' 체계의 흔적은 거의 사라지고, 이른바 ‘근혜금융’ 시대가 시작됐다. 이명박정부 시절 정책금융의 효율화를 위해 산업은행에서 분리됐던 정책금융공사는 4년 만에 재통합하기로 했다.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간 'MB사람들'
MB가 아끼던 꽃사슴까지 내다 버려

과거 정권을 향한 사정바람도 거세다. 박근혜정부 들어 이명박정부에서 특혜를 입은 것으로 지목받아온 롯데와 효성 등의 대기업들이 잇따라 세무조사를 받고 있다. 국세청은 정치적 의도는 없다며 선을 긋고 있지만 정치권에서는 사실상 '친MB기업'에 대한 손보기가 아니냐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국세청은 이 전 대통령의 사돈인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을 탈세 혐의로 출국금지시켰다. 공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롯데월드타워 사업허가 승인을 받은 롯데를 비롯해 현대차그룹도 세무조사를 받고 있다.


여기에 최근 4대강 비리 의혹과 관련해 장석효 도로공사 사장이 구속되는 등 검찰의 수사도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4대강 사업은 새정부 들어 감사원으로부터 사실상 '대운하 사기극'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환경부는 4대강이 물 흐름을 막아 녹조 현상을 심화시켰다며 이명박정부 시절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또 이 전 대통령이 강력하게 추진한 자원외교 탓에 등 떠밀리다시피 해외자원 개발에 나섰던 석유공사는 해외자원 개발의 부실사례가 속속 드러나면서 졸지에 나라살림을 축낸 공기업으로 낙인 찍혀 버렸다.

반복되는
정권 차별화

과거에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전 정권과의 차별화, 혹은 거리두기는 반복되어 왔다. 정권교체를 이뤘을 때는 물론이고 사실상 정권승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YS정권은 '역사바로세우기'를 기치로 내걸고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전격 구속했다. 참여정부 때는 DJ정권의 핵심인 박지원 의원을 구속했고, 대북송금 특검으로 DJ의 최대 치적인 햇볕정책에 큰 오점을 남기게 하기도 했다.

정치전문가들은 "이전 정권에서 잘못한 점이 있다면 이를 바로잡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전 정권의 사람들과 정책들을 무조건 바꾸고 보는 행태는 근절되어야 한다"며 "정책의 연속성이 떨어지면 예산, 행정력 등에서 손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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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