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이어져온 대한민국 계파정치 현주소

  • 김명일 mi737@ilyosisa.co.kr
  • 등록 2013.09.02 14:2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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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줄 잘서야 크는 정치판 "줄을 서시오 줄을…"

[일요시사=정치팀] 계파정치를 빼놓고 우리나라의 정치사를 이야기 하긴 힘들다. 1970년대 이후 계파정치는 우리나라의 정치사를 좌우하는 큰 흐름이었고, 4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계파정치는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계파정치는 군사독재정권에 맞서기 위해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지만 이후 정치권은 계파정치로 인한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려 왔다.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대한민국의 정치권을 지배하고 있는 계파정치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가 될까? 대한민국 계파정치의 현주소를 살펴봤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4주기 추도식이 지난 18일 엄수됐다. 김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는 1970년대 이후 한국정치를 좌지우지해왔던 계파정치의 대표적인 사례였지만 김 전 대통령의 서거 4년 만에 뿔뿔이 흩어졌다. 정치권에서 이들이 동고(同苦)는 했지만 동락(同樂)은 하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이유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동교동계의 현재다.

동교동계
상도동계

우리나라의 계파정치에 대해 정치전문가들은 옛 봉건영주가 가신을 보호해주는 데서 비롯된 일본식 파벌정치가 우리나라로 유입돼 군사독재시절 변형되면서 시작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군사독재정권에 맞서기 위해선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했고, 야권은 DJ(김대중)와 YS(김영삼)로 나뉘어 각각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결집하며 이후 우리나라 정치권만의 독특한 계파문화를 만들었다.

계파정치란 특정 정치계파의 이해관계를 놓고 정치적인 해석이나 정치행위를 하는 것을 뜻하는데, 계파정치인들은 계파의 수장이 내세우는 정치적 주장에 뜻을 함께하며 따르고, 보스는 따르는 정치인들의 미래까지 책임져주며 살폈다.

과거 정상적인 정치활동이 어려웠던 군사정권 시절 서슬 퍼런 탄압에 맞서기 위해 결성된 우리나라 특유의 계파정치는 이처럼 불가피한 면이 있었지만 그 부작용은 심각했다. 기본적으로 계파정치는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계파 보스만을 바라보는 정치다. 계파 간의 대립이 치열해지면서 국민은 뒷전이었고, 계파 간 주도권을 잡기위한 정쟁은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됐다.


계파정치 양대산맥 동교동-상도동계
지금은 남보다 못한 사이 '견원지간'

우리나라 정치권에서는 정치인 개개인의 능력보다는 이른바 '줄'을 잘 서는 것이 중요해졌고, 당내 화합을 저해하고 '끼리끼리' 문화를 조장해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더욱 심화시켰다. 게다가 과거 계파정치의 대표적인 사례인 DJ의 동교동계와 YS의 상도동계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던 계파정치는 이후에도 친노(친노무현), 친이(친이명박), 친박(친박근혜)으로 이어지며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여야가 최근 너나 할 것 없이 경쟁적으로 계파청산을 부르짖고 있는 이유다. 지난 5·4전당대회 이후 김한길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의 새 지도부가 가장 먼저 계파청산을 언급한 것도, 새누리당의 차기 당권주자로 거론되는 김무성 의원이 한 언론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됐으니 친박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고 계파도 완전히 없어져야 한다"며 계파청산을 강조했던 것도 모두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불가피한 선택
부작용은 심각

먼저 동교동계는 DJ가 1961년 강원도 인제에서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됐다가 5·16군사쿠데타로 의원직을 상실하고 이듬해 3월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 위치한 단독주택으로 이사하면서 그 명칭의 뿌리가 생겼다.

그러나 동교동계라는 이름이 정치권과 언론에 본격 등장한 것은 지난 1973년 DJ가 일본 도쿄에서 납치사건을 겪고 생환한 뒤 가택연금조치를 당한 것을 당시 언론이 박정희정권의 압력으로 '김대중'이라는 이름 대신 '동교동계 재야인사'라는 익명으로 보도하면서 부터다.

DJ는 동교동 집에서 가택연금 등을 겪으면서 고통과 침묵의 세월을 측근들과 함께 보냈다. 1979년에는 경찰이 DJ를 감시하기 위해 동교동 사저 부근에 주택 3채를 구입해 사용했는데, YS의 집권 후인 1994년에야 감시용 주택이 매각됐을 정도로 동교동은 오랜 세월 군사독재정권의 집중적인 감시대상이었다.


이 과정에서 가신과 비서 그룹이 형성됐고, 이들은 군부정권 하에서 고문과 투옥을 겪으면서도 주군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충실하게 보좌 했다.

이렇게 형성된 동교동계는 YS의 상도동계와 함께 군사독재 시절 제도정치권 내 민주화세력의 양대 축으로서 역할을 해왔고, DJ가 1995년 경기도 일산으로 자택을 옮긴 뒤에도 동교동계라는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DJ가 집권하면서 동교동계는 당정을 아우르는 막강한 파워그룹으로 떠올랐고 집권기간 내내 줄곧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됐다.

국회에선 동교동계 실세의 이름들이 각종 비리의혹과 함께 거명됐고, 권노갑-한화갑 두 사람의 '양갑' 갈등 속에서 구파, 신파 등으로 불리며 사실상 계파가 갈리기도 했다.



동교동계와 함께 한국 현대정치의 양대산맥을 형성했던 상도동계도 YS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1998년 YS의 퇴임을 전후해 내부 알력으로 사분오열되면서 사실상 해체의 길을 걸었다. 상도동계 수장이었던 한나라당 최형우 전 고문과 2인자였던 서석재 전 의원은 민주산악회와 나사본 등 사조직 장악을 둘러싼 치열한 다툼을 벌였고, 다른 한편에선 YS의 차남 김현철씨와 김덕룡 전 의원이 세대결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15대 대선과정을 거치며 상도동계는 이회창, 이인제 당시 대선경선후보에 대한 지지여부에 따라 한나라당 잔류파와 국민신당파로 분열됐고, 한나라당 잔류파도 신주류와 비주류로 다시 분류되면서 구심점을 잃었다.

또 작년 18대 대선을 거치면서는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마구 뒤섞여 박근혜 후보 진영과 문재인 후보 진영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한때 대한민국 정치권을 쥐고 흔들었던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는 그야말로 사분오열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러나 대한민국 계파정치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현재 정치권을 크게 보면 새누리당은 친박과 비박, 민주당은 친노와 비노로 나뉘어져 있다. 기존 정치판을 뒤엎겠다며 호기롭게 출발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노계였지만 친노계 조차 정권 중반부터는 서로 반목을 거듭하며 갈라서기 시작했다.

친박 대 친이
반복되는 역사

특히 노 전 대통령의 지지도가 눈에 띄게 하락한 2006년부터는 대권을 노리는 차기 주자들의 차별화 행보가 노골화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퇴임 후인 2009년에는 친노계에 대한 대대적인 검찰수사가 이뤄지면서 노무현정부 시절의 정·관계 인사들이 대거 비리혐의에 연루돼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퇴임 이후 약화되어 가던 친노계는 역설적이게도 그해 노 전 대통령이 비리 수사에 대한 압박감을 이유로 서거하자 이를 계기로 부활하게 된다.

친노계는 여전히 민주당 내 주류이며 민주당 내 계파갈등의 주원인이기도 하다. 민주당 내에서 꾸준히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친노계는 한편으론 민주당을 든든하게 떠받치는 버팀목이기도 하다. 민주당 문희상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대선 패배 직후 친노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민주당 의원 중) 노무현 전 대통령 안 팔고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 있느냐"며 친노계를 적극 옹호하기도 했다.

친박의 분화 "친박에도 급이 있다"
계파정치 청산, 정녕 요원한 꿈인가?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내에서 친이계와 친박계가 새롭게 부상하며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였다. 특히 대선후보경선 당시에는 친이계와 친박계가 계파 수장의 당선을 위해 사활을 걸고 싸웠다. 민주당 후보와의 지지율 격차가 워낙 커 당내 경선에서의 승리가 곧 대권승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경선 당시에는 같은 당이라도 친이계와 친박계는 함께 밥도 안 먹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계파갈등이 극심했다. 결국 대선경선은 이명박 후보의 승리로 끝났고, 경선에서 패배한 당시 박근혜 후보는 이명박 후보에게 적극 협력하기로 하며 계파갈등은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친이계는 집권 초기부터 불협화음을 내더니 결국엔 이상득-정두언계로 쪼개져 사사건건 싸웠다. 게다가 대선 직후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친박계가 공천에서 대거 탈락하자 양 계파간의 갈등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일부 친박계는 한나라당을 탈당해 친박연대라는 이름으로 총선 출마를 강행했다. 친이계와 친박계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끝없는 분화
끝없는 싸움

이후 친박계는 한나라당 내에서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하면서 이명박 전 대통령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4년 뒤 19대 총선에서는 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이 전 대통령이 총선 당시 '살아있는 권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이학살’이라 불리는 공천이 이뤄진 것이다. 현재는 새누리당 내에서 소수인 친이계가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하며 박 대통령을 견제하고 있는 모양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2006년 박 대통령이 임시 당대표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친박계는 그동안 끊임없이 이합집산을 해왔다. 그 절대적인 기준은 박 대통령과의 거리. 친박에서 이탈했다고 해서 탈박(脫朴), 상대적으로 친박성향이 덜한 범박(汎朴), 원조 친박이라고 해서 원박(元朴), 중립성향이지만 박 대통령에게 호감을 가진 호박(好朴), 박 대통령의 영향력 확대로 친이계에서 친박으로 넘어온 월박(越朴) 등의 신조어들이 꾸준히 생겨난 것은 이 같은 세력변화를 잘 말해준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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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