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최전선엔 늘 눈에 보이지 않는 은행 하나가 있다. 시중은행 간판도 아니고, 영업점도 많지 않다. 그러나 원자재가 끊기고, 수출 시장이 흔들리고, 기업이 해외로 나갈 때 반드시 거치는 은행이 한국수출입은행, 수은이다.
특히 수은이 최근 주목받는 이유는 산업은행과 함께 정부가 미국에 전략 투자하는 3500억달러(5조원)에대해 실무를 맡아야 하는 은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은의 수장을 새롭게 맡은 황기연 행장은 지난 6일 취임식에서 정치권과 언론이 연일 언급하고 있는 3500억달러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숫자보다 역할을 강조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왜 그는 3500억달러에 대해 침묵했고, 그 침묵이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수은은 일반 은행이 아니다. 정부가 100% 출자한 정책금융기관이다. 이 은행은 자동차 할부금융도, 신용카드도 팔지 않는다. 대신 조선소가 초대형 LNG선을 수주할 때 보증을 서줬고, 기업이 사우디·폴란드에 방산 장비를 수출할 때 금융을 제공했다.
해외 플랜트, 글로벌 공급망, 전략산업 인프라 등 민간은행이 감당하지 못하는 위험과 기간, 금액도 대신 떠안는다. 말하자면 ‘국가의 뒷주머니이자 앞지갑’ 같은 존재다.
이 중요한 자리에 오른 황 신임 행장은 1990년 수은에 입행한 정통 내부 출신이다. 기획부장, 리스크 총괄, 서비스산업금융부장, 남북협력본부장을 거쳤다. 현장에서 기업을 만나본 금융인이고, 동시에 국가 정책과 예산을 다뤄본 실무형 관료다.
정치권 낙하산 인사가 아니고, 산업과 금융의 흐름을 모두 아는 ‘통합형 리더’라는 점에서 조직 안팎 모두 그를 신뢰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강점이다.
그는 지난 6일 취임사에서 네 가지 방향을 제시했다.
첫째, 미래성장산업 금융 강화 차원에서 반도체, 2차전지, AI, 우주·방산 같은 분야에 대해 ‘전 성장 경로별 맞춤형 금융지원’을 약속했다. 단순히 수출 대출을 넘어 R&D, 시설투자, 수출, 해외 M&A까지 처음 단계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
둘째, 통상위기 대응에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보호무역주의 강화 속에서 수은이 통상위기 극복의 최전선 조력자가 되겠다”고 말했다. 공급망 안정화 기금을 활용해 핵심 소재·부품 수입 의존도를 낮추고, 자원 확보 프로젝트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셋째, 산업 생태계의 균형을 위해 그는 수은의 지원이 대기업 중심으로 흐르지 않도록, 중소·중견기업을 ‘산업의 허리이자 생태계를 떠받치는 뿌리’로 규정했다. “중소기업의 글로벌화를 위해 금융 문턱을 낮추고 현장 의견을 더 듣겠다”고도 했다.
넷째, 디지털·현장 중심 혁신을 강조했다. AI 기반 자동심사, 데이터 분석 신용평가 도입, 조직 간 장벽 없애기, 보고서보다 현장을 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정책금융은 문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살아야 한다는 취지였다.
이처럼 취임사엔 전략, 성장, 공급망, 현장, 균형이 등장했지만, 정작 언론이 기대했던 3500억달러라는 숫자는 없었다. 왜일까? 취임사는 방향을 말하는 자리지, 외교·재정 책임을 떠안는 자리로 만들면 안 되기 때문이다.
또 3500억달러는 아직 투자 방식이 완전히 확정된 계약이 아니라, 협의 중인 전략 구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말할 수는 있어도, 은행장은 섣불리 숫자를 말할 수 없다. 그가 말을 아낀 이유는 전략적 침묵이지 회피가 아니다.
그러나 숫자는 보이지 않아도 책임은 분명히 존재한다. 만약 정부가 미국에 대한 대규모 투자 약속을 구체화하고, 그것이 정책금융을 통해 실행된다면, 그 실무 책임은 결국 수출입은행과 산업은행이 맡게 된다.
외환 보유액, 국채 발행, 연기금, 정책펀드, 그리고 수은의 글로벌 채권 발행이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황 신임 행장이 취임사에서 숫자를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오히려 진짜 금융인의 태도일 수 있다. ‘말보다 실행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취임사는 조용했지만, 무겁게 들렸다. 지금 그의 책상 위에는 네 가지 파일이 있을 것이다. ‘미래 산업’ ‘공급망’ ‘중소기업’, 그리고 ‘리스크’. 그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다.
수은의 업무는 숫자로 나타나지만, 그 뒤에는 산업, 기업, 노동자, 국가가 있다. 황 신임 행장의 수은이 서 있는 자리, 그것은 더 이상 금융의 자리가 아니라 국가의 자리다. 기술은 미래를 말하고, 외교는 국익을 말한다. 그러나 금융은 지금 이 순간을 견디게 해야 한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은 이렇다. “수출입은행은 앞으로 숫자를 움직이는 은행이 될 것인가, 아니면 국가의 시간을 지키는 은행이 될 것인가?”
황 신임 행장의 취임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답은 이제부터 그의 선택과 실행 위에 놓여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