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사람 빠진 ‘AI 고속도로’

시정연설 28번 등장
인공지능의 양날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4일, 내년도 정부예산안을 설명하는 시정연설에서 “AI 고속도로가 늦으면 한 세대가 뒤처진다”고 말했다. 연설 속 ‘인공지능’은 28번 등장했지만 ‘노동자’ ‘존엄’ ‘불안’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미래를 설계했지만, 그 미래까지 걸어가야 할 ‘사람의 속도’는 없었다. 기술이 앞서 달리고 있는 시대, 인간의 속도는 어디쯤에 서 있는가. 이것이 지금 한국 사회가 마주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다.

늦으면
도태된다

기술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 기술의 시간은 직선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뻗어나가며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시간은 원을 그리며 돌아온다. 상처를 받으면 멈추고, 실패하면 다시 시작할 용기를 모아야 한다. 로봇은 고장 나면 재부팅하면 되지만, 인간은 다시 걷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

플랫폼은 24시간 돌아가지만, 사람은 잠들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이 두 시간이 겹치지 못하면 사회는 균열된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바로 그 틈새다.

AI는 코드를 짜며, 로봇은 서빙하고, 챗봇은 감정을 흉내 낸다. 플랫폼은 우리의 소비, 이동, 감정까지 설계한다. 하지만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인간의 불안, 외로움, 존엄은 코드로 환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책의 언어는 ‘혁신’과 ‘속도’를 반복한다. 그러면서 늦으면 도태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길을 뛰어야 할 청년들은 카페에서 취업 준비를 위해 또 하나의 오늘을 버티고, 50대 가장은 재교육과 구조조정 사이에서 삶의 의미를 되묻는다. 스마트폰을 인증하다가 실패한 노인은 은행 창구에서 돌아선다. 기술은 내일을 말하지만, 사람은 오늘을 버틴다. 그 간극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외면해 온 가장 현실적인 틈바구니다.

AI 시대 플랫폼의 편리함과 그림자 = AI 시대의 산물인 플랫폼은 우리에게 편리함을 주지만 그 편리함은 누군가의 밤과 건강, 시간과 감정을 잘라 만든 결과다. 버튼 하나로 새벽에 음식이 도착하고, 클릭 한 번이면 이튿날 아침 택배가 문 앞에 놓인다. 그러나 그 뒤편에서 누군가는 영하 10도의 냉동창고에서 손끝이 얼어붙도록 배송할 물품을 분류하고, 누군가는 비 오는 밤 화물차 안에서 졸음을 참으며 달린다.

플랫폼은 인간을 돕는 기술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노동을 보이지 않도록 숨기는 기술이기도 하다. 택배 기사와 배달 라이더는 ‘개인사업자’라는 이름표 아래 4대 보험도, 정년도, 기본 휴식도 보장받지 못한다. 앱을 끄는 순간 소득도 사라진다.

이들은 노동자가 아니면서 동시에 자유도 없다. 노동과 책임이 노동자에게 있는데, 비용과 위험 역시 그들의 몫이다.

수도권 물류센터에서 심야에 사람보다 로봇이 먼저 움직인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끝단의 분류 작업은 사람의 손으로 이뤄지는데, 그 손은 흔히 데이터나 AI라는 단어 속에서 지워진다. 강의실에선 50대 남성이 다시 엑셀과 코딩을 배우고, 한편에선 편의점·콜센터·배달 일자리가 중년의 새로운 노동시장으로 재편된다.

퇴근 후 퀵커머스를 뛰는 직장인, 낮에는 회사원이지만 밤에는 플랫폼 노동자로 사는 이들이 늘어났다. 기술이 만들어준 건 단순한 일자리가 아니라 쪼개진 생계다.

댓글 창에서는 사람이 사라지고 맥락 없는 말들만 떠다닌다. 얼굴 없는 분노는 알고리즘을 타고 확산된다. 플랫폼은 소통을 확장하지만, 오히려 이해와 존중을 감소시킨다. 누군가의 불행이 클릭 수를 만들고, 타인의 상처가 조회수가 된다.

‘좋아요’와 ‘싫어요’가 인간을 평가하는 점수처럼 작동한다. AI는 감정을 계산하지만, 인간은 그 계산된 감정에 부서진다.

정치는 왜 간극을 못 메우나 = AI 시대의 정치는 기술과 인간의 간극을 메워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는 기술보다 더 느리다. 그리고 사람의 고통 대신 여론의 속도만 읽는다. 국회는 전자투표조차 완전히 도입하지 못했지만 ‘AI 국가 전략’을 말한다. 공무원 사회는 여전히 구두 보고를 하고 있지만, 외부에선 ‘디지털 대전환’을 외친다.

정치는 늘 미래를 말하지만, 정작 현재의 고통을 설계하지는 않는다.

필자는 AI 시대에 정치가 실패하는 주요 이유를 세 가지로 본다.

정치는
더 느리다

첫째, 기술을 경제 성장 수단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AI를 수출품이나 산업 전략으로 말하지만, 노동자의 삶이나 지역 공동체와 연결하려 하지는 않는다.

둘째, 정치가 기술의 속도나 인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지만, 국회는 법안을 두고 다투고 피해는 국민에게 전가된다.

‘노동자’ ‘존엄’ ‘불안’ 언급 없어
한국 사회가 마주한 본질적 고민

셋째, 한국 정치의 언어가 ‘갈등을 조정하는 기술’보다 ‘갈등을 증폭시키는 기술’에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유튜브 정치, 팬덤 정치, 분노 마케팅은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갈등을 키워 정치적 이익을 얻는 방식이다.

이 대통령의 시정연설엔 분명히 미래 전략이 담겼으나 빠진 것도 있었다. “누가, 어떤 조건에서 그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기술만 말하고 사람을 언급하지 않는 정치는 결국 사람을 미래 밖으로 밀어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외국은 기술과 사람의 속도를 함께 설계했나 = 기술의 속도는 전 세계적으로 비슷하지만, 그 속도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나라마다 다르다. 특히 유럽 국가들은 기술을 경제 정책이 아니라 ‘사회적 설계’의 일부로 다뤄왔다.

독일은 인더스트리 4.0을 선언하면서 동시에 노동자를 위한 ‘직업 재설계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자동화로 사라질 일자리를 예측하고, 노동자의 기존 기술을 디지털 산업에 맞게 재배치했다. 단순 교육이 아니라 ‘기계와 일할 사람이 어떻게 존중받을 것인가’를 정책의 전제로 삼았다.

덴마크는 ‘유연 안정성’이라는 시스템을 운영한다. 기업은 필요하면 해고할 수 있지만, 국가는 해고된 노동자가 재교육 뒤 다시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실직이 곧 파탄이 되지 않는 구조다. 기술 변화는 곧 기회가 되고, 정부는 이를 관리하는 ‘신뢰의 중개자’가 된다.

핀란드는 기본소득 실험을 통해 기술 자동화 시대의 삶을 실험했다. 일정 소득을 국가가 보장하자, 오히려 사람들이 더 과감하게 창업하고 재교육에 뛰어들었다. 기술이 삶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삶을 재설계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반면, 한국은 기술은 빠르지만 사람을 위한 시스템은 느리다. AI 고속도로는 이미 설계됐지만, 그 길에서 넘어진 사람을 일으킬 안전망은 아직 공사 중이다. 기술은 국가 전략이 됐지만, 기술 때문에 뒤처진 사람은 각자가 해결해야 할 몫으로 남는다.

기술 진화보다 사회의 체력이 더 중요 = 기술은 앞으로도 인간보다 빠르게 진화할 것이다. 하지만 미래를 진짜로 만드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사회의 체력이다. 미래는 발명이 아니라 버텨낸 시간 위에서 만들어진다.

우리가 지금 묻지 않으면 안 되는 질문은 “기술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더 빨리 소모되게 만드는가” “AI는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존엄을 밀어내는가” 그리고 “국가의 역할은 기술을 설계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것인가”이다.

기술의 속도보다 중요한 건 그 속도를 사람이 견딜 수 있는가다. 이를 위해선 ▲잠시 멈춰 숨 쉴 수 있는 권리와 제도 ▲실패 후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재교육과 복귀의 기회 ▲기술보다 사람의 존엄을 먼저 생각하는 존중의 문화 등을 잘 설계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없다면 기술은 결국 인간을 소모품으로 만들 것이고, 그런 미래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1970년대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필자가 다녔던 중학교 과학 선생님은 “언젠가 문명의 이기가 사람을 지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는 막연한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지금은 AI 기술이 그 서막을 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인간은 지혜로우니 이를 잘 극복하리라 믿는다.

인간이 버틸 수 있을 때가 진짜 미래 = 기술은 우리에게 가능한 미래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미래를 실제로 살아가는 주체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다. 로봇은 밥을 나를 수 있지만,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지 못한다. AI는 노래를 만들 수 있지만, 그 노래에 담긴 추억과 감정을 대신 느껴주지 않는다.

따라서 정치의 역할은 분명하다. 기술이 미래를 설계한다면, 정치는 오늘을 지켜야 한다. 이재명정부가 진짜 미래를 원한다면 기술의 속도보다 사람의 속도를 먼저 살펴야 한다. AI 고속도로 위에 설 사람들의 호흡, 체력, 존엄을 지키는 것이 정치다.

기술은 성공하고, 인간은 실패하는 사회가 돼선 안 된다. 미래는 인간이 견딜 수 있을 때만 진짜 미래가 된다. 이 대통령이 시정연설에서 AI 강국이라는 미래 비전을 밝힌 게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AI 고속도로를 걸어가야 할 사람 이야기가 빠져서 안타까웠을 뿐이다. 

<skkim59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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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불사’ 국힘 생존 방정식

‘대마불사’ 국힘 생존 방정식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법원이 주호영 국회부의장의 대구시장 경선 컷오프 관련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그러자 주 부의장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항고할 뜻을 내비쳤다. 주 부의장의 강경 대응은 저조한 국민의힘 지지율과 맞물려 혼란상을 더욱 극적으로 비추고 있다. 과연 국민의힘이란 ‘대마’는 ‘불사’의 존재일까? 주호영 국회부의장이 국민의힘 대구시장 경선에서 컷오프된 것에 반발해 지난달 26일 법원에 가처분을 신청했다. 서울남부지법 민사합의51부(수석부장판사 권성수)는 지난 3일 이를 기각했다. 그러자 주 부의장은 곧바로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법원 결정에 반발했다. 법원 결정 바로 반발 주 부의장은 “저는 그동안 이번 컷오프가 절차·내용 모두 중대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 왔다”며 “법원의 판단과 별개로 이번 공천 과정이 과연 당원·시민의 눈높이에 맞는 공정하고 민주적인 절차였는지는 여전히 엄중하게 따져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주 부의장은 지난 6일 항고를 제기했다. 이어 지난 8일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항고심 판단을 끝까지 지켜본 후 제 거취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리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선 일각에서 제기했던 무소속 출마설을 일단 유보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이어 주 부의장은 “항고심 판단을 기다린다고 해서 이번 공천 난맥상과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 체제의 책임을 덮고 가겠단 뜻은 결코 아니”라며 “이런 공천 구조를 만든 세력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공천은 충성의 대가나 숙청의 도구가 아닌, 오직 국민 앞에 가장 경쟁력 있고 책임 있는 후보를 세우는 과정”이라고 주장하는 등 자신을 컷오프한 것을 ‘숙청’이라고 암시했다. 주 부의장이 대구시장 출마에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에 대해선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6선인 주 부의장은 대구 수성에서만 국회의원을 지냈다. 대구 수성을에서는 4선을 지냈고, 수성갑에선 재선에 성공했다. 이 중 4선을 했던 지난 2016년 총선 수성을 선거에선 친박(친 박근혜)계 주도로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 출마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유 있게 이겼다. 문제는 주 부의장이 당내 최다선인 6선 의원 겸 국회부의장이라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명예가 곧 실권을 보장하진 않는다. 아울러 주 부의장이 차기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구에 출마해 7선에 도전하면,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다. 같은 6선인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조정식 의원은 각각 부산 사하을·경기 시흥을을 지역구로 두고 있다. 부산은 이미 격전지가 된 데다 조 의원은 민주당계 정당과 국민의힘 소속으로 각각 3선 했고, 경기 시흥을은 수도권이다. 국민의힘의 안정된 텃밭으로 분류되는 대구 수성을에서 7선에 도전하는 것과는 상황이 다르다. 설령 7선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오는 6월 지방선거에서도 참패 가능성이 제기되는 국민의힘이 2년 후 총선에서 다수당이 된다는 보장도, 국회의장이 되리라는 보장도 하기 어렵다. 오는 2028년 총선까지 연일 떠들썩하게 이어지는 계파 갈등을 어느 정도 안정시킨 후 대안 야당으로 발돋움하면서 이재명정부가 실정으로 지지율이 폭락하는 상황이 겹쳐야 승리를 노려볼 수 있다. 주 부의장이 국회의장에 도전하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가능성이 희박하다. 불확실한 국회의장…‘텃밭 7선’ 대신 대구? 연이은 공천 가처분 세례 속 서울 지지율 13% 따라서 주 부의장이 대구시장 출마에 집념을 불태우는 것은 필연이다. 대선 패배 후 대구시장에 출마해 당선됐던 홍준표 전 대구시장의 전례도 있다. 주 부의장으로선 “나라고 출마 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고 판단해도 무리가 아니란 분석이 있다. 대구시장으로서 임기를 마친 후 대권에 도전하거나 당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가능성은 일명 ‘주한 연대설’로 통하는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와의 연대설 때문에 불거졌다. 이는 국민의힘 이정현 전 공천관리위원장이 주 부의장을 컷오프한 직후 불거졌다. “주 부의장이 무소속으로 대구시장에 출마해 대구 수성갑에서 재보궐선거가 진행되면, 한 전 대표가 여기에 출마하는 형식으로 연대한다”는 설이다. 한 전 대표 측으로선 손해 볼 게 없다. 한 전 대표는 지난달 25일 채널A <정치시그널>에 출연해 “주 부의장은 보수 재건이 필요하다고 공감하면서 나서겠다고 했다”며 “우린 이미 연대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주장했다. 반면 주 부의장은 신중한 반응을 내비쳤다. 그는 지난달 26일 기자들을 만나던 중 주한 연대설 관련 질문을 받자 “제 코가 석 자인데 딴 생각할 여지가 있겠느냐”고 답변했다. 다만 무소속 대구시장 출마 가능성에 대해선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해 준비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따라서 주한 연대설 성립 가능성 자체를 배제한 것은 아니라는 해석이 나왔다. 주 부의장의 항고 제기는 국민의힘의 치명적 문제 하나를 외부로 노출했다. 국민의힘에선 당내 처분에 대해 연이어 법원으로 달려가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가깝게는 주 부의장과 김영환 충북도지사가 컷오프에 대한 가처분을 신청했다. 김 지사는 주 부의장과 달리 가처분이 인용돼 경선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멀게는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배현진 의원에 대해 각각 결정했던 제명·당원권 정지 1년 징계의 효력도 법원에서 정지됐다. 4건의 가처분 모두 서울남부지법 민사합의51부에서 판단했다. 재판부는 주 부의장 건에 대해서만 국민의힘의 손을 들어줬다. 장 대표는 김 지사가 신청한 가처분이 인용된 다음 날인 지난 1일 기자들과 만나 “법원이 정치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며 “재판장이 국민의힘에 와서 공천관리위원장과 윤리위원장을 하면 될 것 같다”고 비판했다. 국민의힘의 현 상황에 대해선 “정치의 사법화가 심각할 정도로 진행된 것 같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공천 관련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민의힘의 지방선거 승리 가능성을 어둡게 하는 신호들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국갤럽은 지난달 31일부터 지난 2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1001명을 상대로 이동통신 3사가 제공한 무선전화 가상번호를 무작위로 추출해 전화 조사원이 직접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민주당 지지율은 48%로, 국민의힘 지지율은 18%로 집계됐다. 제 코가 석 잔데… 서울에선 민주당 지지율이 51%로, 국민의힘 지지율은 13%로 집계됐다. 부산·울산·경남에서도 민주당 지지율은 42%로, 국민의힘의 지지율은 27%로 집계됐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 바람). 영원한 격전지 서울에서도 양당의 지지율 격차가 크게 벌어지는 여론조사 결과 수치가 공개되자, 국민의힘의 현 상황에 대한 지적이 날로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조선일보>는 지난 4일 자 사설을 통해 “국민의힘은 지금 수도권에서 후보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며 “현행법상 15% 이상 득표해야 선거 비용을 전액 보전받을 수 있는데 그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한다는 것”이라며 현실을 짚었다. 이어 “말로만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절연’을 선언했을 뿐 실제로는 반대로 하고 있다”며 “공천 혼란에 대해서도 가처분을 인용한 법원 탓만 할 뿐, 어떻게 수습하고 책임질지 방향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등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조선일보>의 주장대로라면, 수습·책임을 맡을 당 대표는 보이지 않는 셈이다. 해당 매체는 “어렵게 나선 후보들은 국민의힘 상징색인 빨간색을 포기하고 흰색 점퍼를 입고 다닌다”며 “인구가 1300만명에 달하고 국회의원 의석수도 가장 많은 경기도에선 지사 출마자를 구하지 못해 공천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는 현실도 짚었다. <조선일보>가 짚은 국민의힘의 현실은 신체를 통제할 두뇌 없이 거대한 군집을 이룬 채 각자의 역할을 맡은 군집 생물에 비유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관해파리를 들 수 있다. 관해파리는 겉으로 볼 땐 덩치 큰 해파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각의 역할을 맡은 독립 개체들이 모인 군집이다. 이 개체들은 먹이 섭취·이동·번식 등 각각의 역할만을 담당한다. 각각의 개체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연결돼있지만, 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뇌는 없다. 개체 중 누군가가 제 역할을 못하면 모두 죽는다. 단세포생물인 점균류도 먹이를 찾을 때, 각자의 세포가 알아서 효율적인 길을 찾는다. 이를 통제할 뇌는 없지만, 화학적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최적의 경로를 결정한다. 그런데 잘못된 경로를 찾으면 방향을 틀 능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는 것은 군집 전체가 굶어 죽는 일이다. 페로몬을 통해 신호를 주고받는 군대개미 집단도 선봉에 선 개미가 길을 잃으면 모든 개미가 원을 그리다가 지쳐 죽는다. 제 역할 못하면…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조반니 사르토리는 원심적 경쟁 이론을 주장했다. 보통의 민주주의 국가에선 정당이 중도층의 표심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강경한 여당과 무책임한 야당이 양립할 땐 정당이 중도층을 설득하기보다 진영 결집에 따른 조직표 구성에 몰두한다. 이런 구도에선 중도층이 정치에서 배제되고, 정치적 대화도 단절된다. 이런 상황에선 후보자들은 당의 승리와 중도 확장을 포기하고, 강성 핵심 지지층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중도층이 정치에 냉담해지면서 설득 가능 대상으로 강성 핵심 지지층만 남기 때문이다. 가성비 높은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아울러 후보자들이 지도부를 거부하면서 강성 핵심 지지층에게만 구애하는 각자도생에 몰두한다. 이는 결국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지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국민의힘의 지방선거 준비 과정에서 서울시장·경기도지사 경선에선 구인난에 빠졌지만, 대구시장·경북도지사 경선은 열기가 과도한 것도 이와 비슷하다. 특히 대구시장 경선엔 국회부의장·경제부총리·원내대표 등 당정의 핵심을 지낸 인사들이 모두 출마했기 때문에 더욱 눈에 띄고 있다. 미국의 정치학자 리처드 카츠와 아일랜드의 정치학자 피터 메어는 정당을 카르텔·프랜차이즈 기업에 비유하는 독특한 이론을 발표했다. 카츠와 메어는 “현대 정당이 시민의 자발적 후원보다 국가의 정당 보조금·공천권 등 국가의 자원에 의존해 서로 담합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중앙당과 지역구 후보의 관계를 본사와 가맹점주 관계로 규정했다. 따라서 중앙당이 자원을 적절히 배분하지 못하거나, 시장에서 자원의 가치가 폭락하면 가맹점주의 불만이 폭발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을 매개로, 캐나다의 정치학자 켄 카티는 “정당이 실제로 프랜차이즈 시스템으로 바뀌고 있다”고 주장했다. 카티에 따르면, 정당은 브랜드로서만 기능하고, 선거에선 후보가 중앙의 브랜드를 빌려온다. 공천은 결국 이들 간 계약 관계 역할을 한다. 이는 실제 정치적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2일 서울 쌍문역 일대 쌍리단길을 방문했다. 오 시장의 현장 방문에 동행한 국민의힘 소속 서울시의원들과 도봉구의원들은 국민의힘의 상징색 빨간색이 아닌 흰색 점퍼를 입었다. 오 시장도 서울시 로고가 새겨진 흰색 점퍼를 입고 현장을 돌아다녔다. 지난달 31일 진행된 국민의힘 서울시장 본경선 후보들 대상 첫 토론회에서도 후보들은 장 대표를 비판했다. 이들은 “흰색 점퍼에 눈이 간다면 동그라미 푯말을, 빨간색 점퍼에 눈이 간다면 엑스 푯말을 들어달라”는 진행자의 요구에 일제히 엑스 푯말을 들었다. 오세훈 ‘흰색 점퍼’ 현장행 “빨간색 입고 싶다” 대우그룹·프랑스 사회당 등 한순간에 망한 대마들 하지만 말은 날카로웠다. 오 시장은 “빨간색 점퍼를 입고 싶은 마음을 엑스 푯말을 들어 표현해 봤다”고 말했다. 미래통합당 윤희숙 전 의원은 “흰색 옷을 입어야 하는 사람은 장 대표”라며 “이번 공천이 마무리되면 백의종군을 결심해 달라”고 요구했다. 국민의힘 박수민 의원은 “빨간 당 출신이 빨간색을 안 입는 자기모순은 이해할 수 없다”면서도 “장 대표가 확장하지 못했다면 후보들이 확장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지난달엔 장 대표의 지원 유세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의견을 밝혔다. 본사에 대한 가맹점주들의 집단행동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서울시당위원장을 맡은 배 의원도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의 서울 지지율 13%의 주역 장동혁 지도부가 기초단체장 후보를 못 구한 지역의 후보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방선거 패배 가능성이 내·외부에서 연이어 제기되고 있지만, 국민의힘 지도부에 대해선 “변화할 의지도, 대책도 없는 것 같다”는 평이 나온다. 이 같은 상황은 카츠와 메어가 이미 이론적으로 짚었다. 이들은 “카르텔 정당은 국가 자원을 독점하기 때문에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고 지적했다. 바둑으로 치면, 국민의힘은 여러 개의 돌로 넓게 자리 잡은 곤마인 ‘대마’와 비슷하다. 시사 분야에서 관용적으로 잘 쓰는 표현 중 하나는 ‘대마불사’다. “대기업이나 대형 금융기관은 국가의 지원을 받아 망하지 않는다”는 관용 표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1990년대 후반 IMF 금융위기는 대마불사로부터 비롯됐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상황은 당시 재계 2위였던 대우그룹의 해체였다. 김우중 당시 회장은 ‘세계 경영’이라면서 해외 업체를 공격적으로 인수했다. 그러다 IMF 금융위기를 맞아 구조조정을 거쳤지만, 삼성자동차를 받고 대우전자를 주는 빅딜 과정에서 엄청난 빚을 져 결국 워크아웃을 선언했다. 김 전 회장도 해외로 도피했다. 대우그룹은 그렇게 해체됐다. 국제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1990년대 초반 캐나다의 집권당 진보보수당은 경제 실정과 내부 갈등 끝에 구심력을 잃고 연이은 당원 탈당 사태를 겪었다. 그 결과 150석을 넘게 보유했던 거대 여당이 선거 한번에 2석만 건지는 참패를 당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프랑스에서도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을 극복하지 못했던 사회당은 지난 2017년 대선을 앞두고 강경한 좌파 성향 브누아 아몽 대선후보를 선출했다. 그러자 사회당 소속 정치인 다수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창당했던 신생 정당 앙 마르슈로 옮겼고, 당은 선거에서도 참패했다. 반대로 민주당은? 민주당은 대구시장 선거 승리를 위해 대구에서 일정한 기반을 갖추고 있고 선거 승리 경험도 있는 김부겸 전 총리를 대구시장 후보로 선출했다. 이어 지난 8일엔 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김 후보와 함께 대구 농수산물도매시장을 방문하는 등 승리 의지를 드러냈다. 구인난을 겪고 있는 국민의힘과 달리, 민주당에선 추미애 의원이 치열한 경선 끝에 경기도지사 후보로 선출돼 주목받고 있다. 대마불사는 과연 영원한 걸까. 대마불사만 믿고 배짱 영업을 해도 되는 걸까. 대우그룹 해체는 국민의힘에 어떤 의미를 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