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3일, 일본을 방문해 이시바 일본 총리와 한일 정상회담을 갖고, 2025 한일 공동언론발표문을 발표했다. 한일 양국 정상의 공동언론발표문은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방일 뒤 한일 공동언론발표문을 채택한 이후 17년 만이다.
일본 언론이 밝힌 공동언론발표문을 확인해보니, 주요 내용은 정상 간 교류 및 전략적 인식 공유 강화, 미래산업 분야 협력 확대 및 공동 과제 대응, 인적 교류 확대, 한반도 평화와 북한 문제 협력, 역내 및 글로벌 협력 강화 등이었다.
공동언론발표문엔 “1965년 국교 정상화 이래 지금까지 축적되어 온 한일 관계의 기반에 입각해 양국이 미래 지향적이고, 상호호혜적인 공동의 이익을 위해 함께 협력해 발전시켜 나가자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특히 “이시바 총리가 1998년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을 언급했다“는 공동언론발표문의 내용이 눈에 띄었다.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일명 ‘김대중·오부치 선언’이라고 불린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1998년 10월 도쿄를 방문한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오부치 당시 총리가 한일 양국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과거사 인식을 담은 선언이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의미는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줬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문서화했다는 점이다.
이번 한일 정상회담서 이 대통령과 우리 국민이 듣고 싶은 확실한 답은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한다’는 내용은 빼고,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인정한다‘고만 하는 답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오부치 선언 이후에도 일본의 과거사 부정, 경제보복, 군사 갈등 등 행태로 봐선 이 정도 표현한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된다.
사실 이 대통령은 한일 정상회담에 앞서 21일 일본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양국의 가장 어려운 난제인 '과거사 문제'에 대해 "위안부와 강제 동원에 대한 전 정권의 합의를 뒤집을 수 없다"면서 과거사에 묶인 한일 관계를 풀려는 의지를 보냈다. 이 대통령이 먼저 화해의 제스쳐를 보낸 것이다.
필자는 일본이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스스로 인정하게 유도한 이 대통령의 외교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평소 일본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드러냈던 이 대통령이 정상회담 이틀 전 일본 매체와 인터뷰서 자기 모순적인 발언을 한 게, 일본에 외교적 수사가 아닌 진정성 있는 신뢰를 주며 이시바 일본 총리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한일 관계 개선엔 보수 정부가 공을 들였다. 이명박정부는 독도 문제, 교과서 왜곡 문제를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한일 관계 복원을, 박근혜정부는 10억엔의 출연금을 내 화해치유재단을 통해 위자료를 지급하기로 하면서 외교 정상화를, 윤석열정부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와 관련해 우호적으로 대하면서 경제 정상화를 꾀했다.
그러나 보수 정부가 일본과의 화해를 시도할 때마다 진보 진영의 반발이 심했고, 국민적 저항도 거세게 일어났다. 결국 보수 정부는 한일 관계 개선이라는 목표만 있었지 추진력을 얻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재명정부는 상황이 다르다. 반일을 외쳤던 진보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에 나선다는 게 획기적인 발상이고, 거기다 여대야소 상황서 국민적 지지도 받을 수 있다.
보수 정부가 일본에 화해 제스쳐를 보낼 땐 국민적 저항이 심했지만, 이번 2025 한일 정상회담에 앞서 이 대통령이 "위안부와 강제 동원에 대한 전 정권의 합의를 뒤집을 수 없다"면서 전 정부와 같은 입장을 말했는데도, 언론과 정치권은 물론 우리 국민도 조용하다는 게 확실히 다른 점이다.
또 이번 한일 정상회담이 방미를 앞두고 특히 '관세, 안보'의 난제를 안고 오는 25일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가진 정상회담이라 미국에 대해 공동 대처해야 하는 입장 차원에서도 한일 관계 개선 및 새로운 관계 구축이라는 명분이 충분했기 때문에 이번 한일 정상회담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과거사 반성 + 미래 협력’을 담은 상징이었다면, 2025년 공동언론발표문은 ‘과거사 반성’과 ‘미래 실용주의’를 담은 성과라 할 수 있다. 이정부가 이번 한일 정상회담을 통해 한일 관계에서 김대중 정신을 계승하되, 이제 과거를 훌훌 털고 미래와 경제 중심의 관계로 가겠다는 시그널을 보인 것이다.
이 대통령은 취임 이후 한일이 앞마당을 함께 쓰는 이웃이자 평화와 번영을 위해 긴밀히 협력해야 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라고 강조해 왔다. 그 앞마당이 한국일 수도 일본일 수도 아니 세계 어느 곳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양국 정상이 잊지 않아야 한다.
양국 정상은 오는 10월 경북 경주에서 열리는 APEC정상회의와 일본에서 열릴 한일중정상회의에서도 만날 것이다. 이 때 2025년 공동언론발표문을 더 구체화하는 회담이 계속 돼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일 관계 개선에 대해 이 대통령은 자유로운 편이다. 그러나 이시바 총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 정치권은 물론 일본 국민들을 설득해야 하고, 현재 지지 기반도 취약해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데 힘 써야 하는 입장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일 관계 정책도 바뀌면서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는데, 이번 한일 정상회담을 보니 조금은 안심해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