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선감도 (55)지하 감옥 어둠서 내적 변화

  • 김영권 작가
  • 등록 2025.06.09 05:00:00
  • 호수 15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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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럼 반지 찾으러 천천히 서로 나오세요.”

경찰서로 오는 도중 경찰이 용운의 뒤통수를 툭 치면서 말했다.

“꼬마 너 운 좋았다. 만약 금반지 주인이 도난당했다고 한마디만 했더라면 넌 감옥 가는 거야, 임마.”

경찰의 복수

용운은 눈을 똑바로 뜨고 말없이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아무리 힘겨워도 남의 것을 훔치는 짓은 하지 말자고 삶의 좌우명으로 여기며 사는데 도둑이라니!


이제 점점 넝마주이에 요령도 생겨서 앞날에 대한 소박한 희망도 지닐 수가 있었는데…… 모든 게 서글퍼졌다.

경찰서에 도착해서 피의자 조서를 받았다. 하지만 용운의 대답에 구체성이 별로 없을 뿐더러 그런 사소한 일로 소년원으로 보내기는 아무래도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그 경찰은 허탕친 노릇이 좀 분했던지 ‘부랑아 일제 단속기간’이란 점을 내세워 용운을 선감도 감화원으로 보내 버렸던 것이다.

지하감방의 어둠 속에서 용운은 원통한 마음을 못 이긴 나머지 거푸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퍼뜩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혹시 전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착한 자인가? 사회가 아무리 잘못됐더라도 어쨌든 우리는, 나는 뭔가를 위반하지 않았을까? 내가 사소하게 생각한 것도 남에겐 귀중한, 큰 일이었을 수도 있다……. 차라리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겠다. 지렁이를 밟아 죽인 죄…… 나뭇가지를 꺾은 죄…… 바람이 불 때 침을 뱉은 죄…… 내가 모르지만 아마 내가 지은 죄가 있을 거야. 죄가 있기에 여기서 이런 고생을 겪고 있지 않을까?…… 또한 아버지의 죄도 영광도 자식인 내게 지워진 게 아닐까?’

그는 표정을 잔뜩 찡그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그러더니 또다시 깊은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머릿속을 메아리처럼 맴도는 시구였다.


만일 사람들이 제정신을 잃고 네 탓이라 비난해도 냉정할 수 있다면,
사람들이 의심해도 자신을 믿고 그 의심마저 감싸 안을 수 있다면,
거짓에 속더라도 미움을 받더라도 되갚지 않는다면,
악한 자들이 왜곡해도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받아들인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네 것이 되고 그때 너는 비로소 하나의 어른이 되리라…….

용운은 뒤척이다가 저도 모르는 새 잠이 들고 말았다.

그는 꿈을 꾸었다. 어슴푸레한 새벽 들판에 박꽃 누나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용운이 큰 소리로 부르자 천천히 뒤돌아보았는데, 누나의 흰 얼굴엔 눈이 없었다.

용운의 가슴속엔 한없는 비애감이 일었다. 큰 소리로 부르며 뛰어갔지만 누나는 기다려 주지 않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문득 그 뒷모습에서 정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그건 엄마의 목소리처럼도 느껴졌다. 용운이 아무리 소리치며 달려가도 아득히 멀어져 갈 뿐 뒤돌아보지 않았다.

누나가 걷는 속도보다 용운의 뜀박질이 훨씬 빠를 텐데도 이상스럽게 간격은 조금도 좁혀질 줄 몰랐다.

앞에 낭떠러지가 불쑥 나타난 건 그때였다.

용운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걸어보려 했지만 웬일인지 다리가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박꽃 누나는 돌멩이를 하나씩 주워 주머니 속에 가득 채웠다.

그러더니 낭떠러지 앞의 허공을 그대로 걸어 물속으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누나는 물거품만 남긴 채 다시는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돌멩이의 무게 때문이었으리라. 용운은 그 자리에 선 채 울고 또 울었다.


꿈의 장면이 바뀌더니 황량한 사막 위로 라디오가 불쑥 튀어나왔다. 라디오는 피에로의 얼굴로 변하더니 괴이한 목청을 우렁우렁 울렸다.

원통한 마음 못 이긴 한숨
세상의 불의와 부정에 분노

“19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한 장발장을 아느냐? 그는 어린 조카들의 배고픔을 달래려다가 빵 한 조각을 훔쳐 20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억울한 처벌을 받은 존재가 아님을 속으로 인정했다.

도형장의 몽둥이질 아래서, 쇠사슬에 묶인 채, 지하감방에서, 도형수의 초라한 침대 위에서, 그는 웅크린 채 깊이 생각했다.

치사한 짓을 저질렀음을 자신에게 고백했다. 배고파 훔친 빵……


만약 그가 간절히 부탁했다면 그 빵을 거절당했을까? 곧 죽을 만큼 배가 고프다는 건 변명일 뿐이다. 차라리 괴로운 노동을 택해야 했다.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일지언정 사회도덕의 멱살을 마구 움켜쥐면서 도둑질로써 고통을 벗어나려 한 건 미친 짓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그는 또 하늘을 향해 물었다.

‘저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내동댕이친 그 사건에서 과연 저만 잘못을 범했을까요? 우선 일자리가 없었고, 가끔 변변찮은 일을 해도 제 입 하나만 해결하면 되는 게 아니었지요. 참새새끼 같은 조카들이 있었죠.

그리고 제가 빵을 훔쳤긴 해도,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쳤는데, 형벌이 너무 무거워 억울했습니다.

그 억움함을 못 견뎌 탈옥을 하긴 했지만요. 하지만 빵 하나 때문에 20년은 너무 무자비하잖아요.

우리 사회가 의식주를 분배함에 공정하지 않고, 가진 자는 더 많이 차지하고 가난한 자는 더욱 빈궁해져 결국 자살에 내몰려야 하는 악폐는 갈아엎어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죠?’

그는 세상의 불의와 부정에 분노했다. 어떤 분노는 광적이고 부조리할 수 있다. 그리하여 누구든 미친 듯 화를 터트리기도 한다.

그런데 분개한다는 건 내심 어딘가에 옳은 측면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장발장은 스스로 분개하고 있음을 느꼈다. 사회는 자신에게 피해를 주기만 하고 뺏아가기만 했다.

그는 인간사회로부터 한 마디의 다정한 말도 듣지 못했고, 결국엔 처절한 생존경쟁에서 패배했다고 절감했다.

그는 자신에게 불행을 안겨 준 사회를 단죄하고 증오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핍박당하고 고통당한 영혼은 시계추처럼 선과 악 쪽으로 번갈아 흔들렸다.

영혼 한쪽으로는 빛이 들어갔고 다른 한쪽으로는 어둠이 지배해 갔다.

그는 원래 천성이 악한 사람은 아니었다. 도형장에 처음 들어갔을 때만 해도 그는 선량한 마음을 속에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온갖 괴로움을 당하면서 서서히 냉혹해져 갔던 것이다.

추악해진 인간

과연 인간은 선에서 악 쪽으로 극단적인 변모를 할 수 있는가? 착한 영혼이 주변 환경에 의해 악인으로 변형되기도 할까? 인간은 몹쓸 운명의 장난으로 인하여 추악해져야만 하는가?

지독한 압력에 눌리고 찌그러져 기형으로 변하고 결국 불구의 짐승이 되어야만 하는가?

인간 영혼 속에, 이 세상의 악에 부패하지 않고 영원한 빛처럼 반짝이며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 악을 향해 잔잔이 미소지을 수 있는 신성한 요소는 없는 것일까?”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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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