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경찰이 시간 벌어준’ 동대문 분양사기 증거인멸 포착

[일요시사 취재1팀]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날릴 위기에 처한 피해자들이 믿을 건 경찰뿐이었다. 금방 끝난다는 경찰의 말을 동아줄처럼 여겼다. 하지만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피해자들은 이제 경찰을 믿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늑장 수사 절대 아닙니다.” 서울 동대문경찰서 관계자는 <일요시사> 보도(1502호 <단독> ‘빌라 사기’ 동대문경찰서 늑장 수사 내막) 이후 직접 전화로 해명했다. 동대문구 분양사기 사건에 대한 동대문경찰서의 빠른 수사를 촉구하는 집회 현장을 다룬 기사였다. 동대문구 용두동 현장서 분양사기 피해를 본 이들은 지난 10월11일 서울경찰청에 모여 목소리를 냈다. 

“부도 났다”
피해 인지

사건은 지난해 5월 처음 수면 위로 올라왔다.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의 신축 빌라를 분양한 공인중개사가 분양대행을 맡은 또 다른 공인중개사로부터 “부도가 났다”고 통보받은 게 시작이었다. 용두동 1차 현장은 80~90%가량 공사가 진행됐고 2차 현장은 땅만 매입한 허허벌판 상태였다. 

용두동 1차 현장은 15세대, 2차 현장은 13세대로 총 28세대에 이르는 피해가 발생했다. 이른바 선분양을 받은 이들은 계약금과 중도금을 치르고도 빌라의 소유권을 얻지 못했다. 뒤늦게 확인한 등기부등본에는 수십억원의 근저당이 설정된 상태였다. 빚이 덕지덕지 붙은 현장은 순식간에 경매로 넘어갔다. 

재테크를 위해 투자한 사람, ‘내 집 마련’의 꿈을 위해 전 재산을 털어 빌라를 산 사람 등 20여명에 이르는 수분양자들은 피해자로 전락했다. 특히 용두동 2차 현장은 지난 8월 말 경매 처리가 완료되면서 수분양자의 돈 17억2000만원이 공중분해 됐다. 용두동 1차 현장도 현재 경매가 진행 중이다. 


일반적으로 건설 현장에서는 시행사가 사업을 주도한다. 시행사는 시공사를 선정하고 필요한 돈을 댄다. 대부분 올라갈 건물을 담보로 금융권서 돈을 대출받아 사업을 진행한다. 이후 공인중개사 혹은 분양대행사, 매도인과 매수인이 등장한다.

돈이 오가고 권리주체가 바뀌면 그때부터 건물은 재테크 수단 또는 거주 공간이라는 ‘집’의 기능을 하기 시작한다. 

용두동 현장은 등기부등본에 존재하는 건축주(시행사) 뒤에 또 다른 건축주가 있다는 점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됐다. 피해자들은 등기부등본의 건축주는 ‘바지’고, 실소유주가 따로 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들이 지난 10~11월 4차례에 걸쳐 진행한 집회서 구속수사를 해야 한다고 언급한 ‘홍모씨’다.

분양계약은 이른바 바지 건축주와 진행됐다. 은행 대출도 바지 건축주의 이름으로 이뤄졌고 계약금과 중도금도 바지 건축주의 계좌로 들어갔다. 하지만 소유권이 움직이지 않았다. 수분양자는 바지 건축주에게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바지 건축주 역시 실제 건축주로 추정되는 홍씨에게 돈을 받고 명의를 빌려줬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지난해 7월 수사 개시
18개월 동안 지지부진

피해자들에 따르면 이 같은 수법으로 ‘부도가 난’ 현장은 용두동의 2곳을 비롯해 7곳에 이른다.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장안동, 성북구 성북동,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등이다. 현재까지 파악된 피해자는 수십명, 피해 금액은 100억원대에 이른다.

피해자들은 경찰을 찾았고 용두동 관할서인 동대문경찰서에서 사건을 ‘인지 수사’ 형태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수사 개시 시점은 지난해 7월이다. 동대문경찰서는 수사 초기 사건에 굉장한 의욕을 보였다고 한다. 피해자들은 “경찰이 다른 지역의 사건을 가져오고 대대적으로 수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서 고소·고발을 하지 않고 기다렸다”고 주장했다. 


실제 한 피해자는 경찰의 재촉에 해외여행을 갔다가 귀국한 다음 날 조사를 받았다고도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는 “경찰이 3개월 안에 마무리 짓겠다고 하더니 어느 순간 올해(2023년) 말에 마무리하겠다고 말이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18개월이 흘러 현재에 이르렀다. 동대문경찰서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답변만 하고 있다.

결국 피해자들은 직접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먼저 홍씨 등을 사기, 업무상배임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고소장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홍씨 등은 빌라 분양을 빌미로 거액을 편취한 뒤 토지와 건물에 근저당권을 설정해 무가치 상태로 만들어 경매에 부쳐지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지난 10월11일 서울 종로구 서울경찰청 앞에서 진행한 집회를 시작으로 동대문경찰서, 국가수사본부 등지서 피해를 호소했다. 동대문경찰서가 홍씨를 구속하고 수사를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경찰 수사가 늘어질수록 추가 피해와 피해자 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숨어 있는
실소유주

용두동 2차 현장 피해자는 집회서 “홍씨 등은 신축 빌라 분양으로 돈을 챙기기 위해 청량리 인근 개발계획 및 허위 투자 정보를 과도하게 부풀려 홍보했고 빌라를 지을 자금 여력도 없는 상태서 다수의 피해자와 분양계약을 체결해 용두동 2차 현장서만 수십억원대의 계약금과 중도금을 가로챘다”고 주장했다. 

경찰의 수사가 늦어지면서 홍씨 등이 2차 범죄를 계획, 실행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용두동 1차 현장 피해자 가운데 1명은 집회서 “최근 홍○○이 건축설계사무소에 방문해 두 군데 신축 빌라 설계를 의뢰했다는 말을 들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를 느꼈다”며 “얼마나 경찰 수사를 우습게 봤으면 100억원이 넘는 피해 금액과 수십명의 피해자를 양산하고도 새로운 빌라를 두 군데나 더 짓겠다고 설계를 뽑느냐”고 분노했다. 

피해자들은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글을 올려 사건을 공론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게시글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동대문경찰서에서 인지 수사를 하고 있다면서 형사고소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점, 18개월 동안 압수수색을 진행하지 않은 점 등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18개월 동안 피의자에게 방어할 기회와 시간을 줬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피해자들의 집회, 커뮤니티 활동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피해자들은 “첫 번째 집회를 한 직후에는 (경찰로부터)집회 신고를 누가 했냐는 질문을 받았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올린 이후에는 (경찰이)작성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특히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 글에 대해서는 빨리 내리라고 종용했다”고 말했다. 

동대문경찰서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게시글에 사실이 아닌 내용이 있었다”며 “그런 글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오면 수사관이 위축되지 않겠나”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수사를 잘 하려고 하는데 사실과 다른 일방적인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우리 입장에서는 진짜 억울하다”고 반발했다.

게시글에도
민감한 반응

눈여겨볼 대목은 홍씨의 움직임이다. 피해자들은 사건을 외부로 알리기 시작하면서 홍씨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입을 모았다. 한 피해자는 “홍씨는 ‘재수 좋으면 집행유예’라는 말을 자주한 것으로 안다. 하지만 우리가 집회를 진행하고 관련 내용이 언론에 나오자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최근 홍씨가 보관 중이던 문서를 수차례에 걸쳐 버린 사실이 <일요시사> 취재 결과 확인됐다. 피해자들은 지난 10월11일과 24일, 지난달 6일과 28일에 집회를 진행했다. 10월24일은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동대문경찰서 앞에서 집회를 진행한 날이었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이날 홍씨는 피해자 집회 이후 경찰의 연락을 받고 동대문경찰서에 들어갔다가 약 15분 만에 나왔다. 

이후 지난달 6일 피해자들은 다시 한번 동대문경찰서 앞에서 집회를 진행했고 이날 방송국서 취재를 나왔다. 그리고 열흘 뒤인 지난달 15일부터 홍씨는 문서를 버리기 시작했다. 피해자들 사이에서 홍씨가 구속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홍씨의 증거인멸 가능성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일요시사>가 확인한 문서는 수천 장에 달했다. 대부분 찢어진 채로 발견된 문서 중에는 분양계약서, 세금계산서, 이행각서, 등기부등본 등이 있었다. 동대문구는 물론 성북구, 구리시 등 수분양자들이 피해를 본 현장 관련 자료도 확인됐다. 심지어 교회 봉투에 쓴 기도문도 반으로 찢어진 채 발견됐다.

홍씨에게 명의를 대여해준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수기로 작성한 A4 용지 1장 분량의 내역서도 있었다.

한 피해자는 “바지들은 세금 때문에 허덕이고 있다. 건물(신축 빌라)이 자기 재산으로 잡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세금 폭탄을 맞은 상태다. 하지만 홍씨가 명의대여 비용으로 바지들한테 주는 돈은 (현장 1곳당)2500만원 정도”라고 주장했다. 


또 피해자는 이런 상황에 놓인 바지 건축주가 10여명에 이른다고 귀띔했다.

피해자 고소·집회 공론화 시도
수천장 분량 문서 찢어서 버려

<일요시사>가 확인한 내역서에 따르면, 명의대여자로 추정되는 인물은 ▲의료보험료 ▲재산세 ▲지방소득세 ▲국세 등 9억원 이상의 채무를 짊어진 상태였다. 또 이들은 민‧형사상 소송에도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분양사기 사건 피해자가 수분양자만이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피해자들은 홍씨의 증거인멸 시도에 분노했다. 또 홍씨가 문서를 버리기 시작한 시점을 두고도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문서를 확인한 피해자들은 수사에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피해자들은 경찰에 홍씨가 버린 문서를 확보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경찰은 문서를 보자고도, 내용에 관해 묻지도 않았다고 덧붙였다. 

피해자들은 아직 피해 사실을 모르는 현장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추가 피해자가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한 피해자는 “지난해 5월 전까지 우리가 사기 피해자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며 “그 시기에 성북구 현장은 이미 고소가 진행돼 수사 중이었다. 이런 현장이 더 존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일요시사>는 지난해 2월 홍씨가 연루된 서울 성북구 성북동서 일어난 신축 빌라 분양사기 의혹에 대해 보도했다(1414호 ‘<단독> 서울 성북동 빌라 사기 의혹’ 1417호 ‘<단독> 성북동 신축빌라 바지 사장 의혹’). 시기상으로 용두동 현장 피해가 드러나기 전이다. 보도 시점에는 성북경찰서에서 수사가 이미 9개월째 진행 중이었다.

동대문경찰서 관계자는 ‘늑장 수사’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부정했다. 수사가 늘어지면서 홍씨가 증거를 인멸할 시간을 벌어줬다는 질문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는 “수사가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면서도 올해 안에 종결되냐는 질문에는 “언제까지 (마무리)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이어 “건설 현장이 여러 군데 있고 관련자도 많다. 자금도 한 군데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여러 군데 걸쳐 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걸린다. 성북(경찰서)은 한 건짜리에 1년6개월 걸렸던데 우리가 그렇게 늦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무리 단계”
대체 언제?

또 “강력범죄와는 달리 사기는 입증이 어렵다.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하나하나 다 들여다봐야 하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또 그 사이에 고소 사건도 병합됐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빨리 진행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대충할 순 없지 않나. 최대한 꼼꼼하고 완벽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수사 자료만 1만 페이지가 넘는다”고 토로했다. 홍씨의 구속 여부에 대해서는 “그 부분은 수사 중인 사항이라 말씀드리기 곤란하다”고 밝혔다.

<jsa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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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