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홀연히 떠난 자승 스님

  • 김성민 기자 smk1@ilyosisa.co.kr
  • 등록 2023.12.04 10:38:10
  • 호수 14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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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입적 의문만 남았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여기서 인연을 달리해 미안하다.” 지난 10여년간 조계종의 실세로 군림했던 자승 스님. 현장에 그가 남긴 유서로 추정되는 메모는 단 2장이었다. 생전에 스님은 ‘상월결사’(霜月結社)와 봉은사 회주 등을 맡으며 조계종의 주요 의사결정을 지휘해왔다. 상월결사는 불교중흥과 국민화합을 이루고 세상의 평화로 나아가자는 그의 뜻을 계승·실천하고자 결성됐다.

지난달 29일 오후 6시50분께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사 요사채에 불이 났다. 요사채는 사찰 내에 스님들이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화재 진압을 위해 요사채 내부로 들어간 소방당국은 숨져 있던 스님 1명을 발견했다. 숨진 채 발견된 법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33·34대 총무원장을 지낸 자승 스님으로 확인됐다. 당시 요사채 안에 있던 스님 4명 중 3명은 밖으로 대피해 화를 면한 것으로 전해졌다.

불탄 칠장사
법구들 발견

소방당국은 화재 발생 후 한 시간여 만인 7시52분께 불길을 잡아 9시48분께 불을 껐다. 요사채 외 다른 사찰 시설로 불길이 번지지는 않았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사찰 내 폐쇄회로(CCTV), 사찰 내 목격자 등을 통해 정확한 화재 원인과 피해 규모 등을 조사했다.

서울 봉은사 회주를 맡았던 자승 스님은 죽산면 아미타불교요양병원의 명예 이사장으로도 활동 중이었다. 아미타불교요양병원은 조계종 스님들의 노후를 돌보는 무료 병원으로 지난 5월 개원했다.

평소에도 자승 스님은 이따금 칠장사에서 머무르곤 했다. 이날도 스님은 칠장사를 방문한 이후 연락이 두절된 것으로 전해졌다. 칠장사는 궁예, 임꺽정, 어사 박문수와 관련된 설화로 유명한 천년 고찰로 1983년 9월19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된 곳이다. 이번 화재로 인한 문화재 훼손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불이 난 요사채는 종무소 등이 있는 사찰 법당과는 직선거리로 100여m 떨어져 있다. 경찰의 현장 통제로 요사채로의 출입은 막힌 상태다. 요사채는 타다만 나무기둥이나 일부 잔해만 남긴 채 모두 소실됐다. 다만, 누군가가 요사채만 타도록 불을 낸 것일 수도 있다는 의구심은 증폭됐다.

칠장사에 주차된 차량에서는 자승 스님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메모가 발견됐다. 이 메모에는 “검시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스스로 인연을 달리할 뿐인데 CCTV에 다 녹화되어 있으니 번거롭게 하지 마시길 부탁합니다”는 문구와 함께 자승 스님 자필 서명이 담겼다.

또 지강 스님에게 “이곳에서 세연을 끝내게 되어 민폐가 많소. 이 건물은 상좌들이 복원할 겁니다. 미안하고 고맙소. 부처님법 전합시다”라는 당부를 남기기도 했다. 

경찰은 방화 등 모든 가능성 열어두고 수사할 방침이다. 합동감식은 지난달 30일 오전 11시부터 이뤄졌다. 칠장사 CCTV 영상을 확보한 경찰은 자승 스님이 혼자 요사채에 들어간 것을 확인했다. 

수사당국 관계자는 이날 “일체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자승 스님의 사망 원인 및 과정에 대해 국가정보원과 경찰이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수사당국은 방화나 방화에 의한 살해, 제3자가 개입한 사고사 위장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아울러 자승 스님이 남긴 유서가 그가 직접 작성하지 않은 문건이거나, 누군가에 위력에 의해 작성됐을 가능성 등을 조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돌연 유서까지 쓰고?…커지는 미스터리
상월결사 지휘…불교 알리기 온몸 던져


이와 관련해 국정원은 전날, 경기도 안성 칠장사 화재 현장을 현장 점검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정원 관계자는 “현장 점검을 실시한 것이 맞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자승 스님이 불교계 유력인사고 사찰 화재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서 경찰 수사와 별도로 테러 및 안보 위해 여부 등을 확인하는 차원서 현장 점검을 실시했다”고 전했다.

자승 스님은 지난 2002년과 2010년, 2011년 세차례에 걸쳐 남북 불교 교류 활성화를 위해 북한을 방문한 바 있다.

경찰과 국정원은 통신 기록 등을 통해 자승 스님의 행적을 면밀히 확인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칠장사 화재 직전 자승 스님과 함께 있었던 스님들을 상대로 조사에 나서 당일의 상황을 전면 재구성할 방침이다.

또 다른 수사당국 관계자는 “하루 전, 이틀 전까지만 해도 정부 관계자 등 다양한 인사들과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고 했다.

일각에선 자승 스님이 지난달 27일 봉은사에서 언론 간담회를 갖는 등 활발하게 활동한 만큼 유서를 작성할 이유가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주변 관계자들은 자승 스님의 돌연한 입적 선택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다. 최근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보이며 종단 정책에 대한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한 조계종 관계자는 “입적이 믿기지 않는다”며 “일선서 활약하며 힘든 일도 마다치 않고 이끄셨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허망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자승 스님은 조계종 내의 대표적인 사판승(행정 담당 스님)으로 ‘종단 내 최고 실력자’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사흘 전까지…
조계종 발칵

자승 스님은 지난달 27일, 불교계 언론사와 만난 자리서 “나는 대학생 전법에 10년간 모든 열정을 쏟아부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또 2027년 교황 방한이 예상되는 가톨릭 세계청년대회에 맞춰 서울서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자승 스님은 2009년 조계종 33대 총무원장으로 선출됐다. 2013년에는 재선돼 총 8년간 총무원장을 지냈다. 두 번의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던 그는 퇴직 후에도 서울 강남구 봉은사 회주를 맡아 왕성하게 활동했다. 실제로 정치인들도 스님을 찾아올 만큼 상당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여야 국회의원은 물론 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롯해 윤석열 대통령도 봉은사를 방문해 그에게 불교계 현안을 들었다.

자승 스님의 입적 소식을 접한 오세훈 서울시장은 “가르침을 잊지 않겠다”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오 시장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자승 스님의 갑작스런 입적 소식을 듣고 황망하기 이를 데 없다”며 이같이 밝혔다.


오 시장은 “스님은 ‘동심동덕’(同心同德)으로 화합을 강조하셨던 불교계의 큰 어른이셨다”며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말씀은 정치권에 주신 죽비와도 같다”고 되새겼다.

자승 스님은 33대 집행부와 스님 노후를 위한 수행연금 지원, 스님 사후 사유재산을 종단에 귀속시키는 종법 개정, 한국불교수행법 대중화, 해외특별교구 설립 등을 추진했다. 베트남 고엽제 피해자, 동남아 국가의 저소득계층 지원 등 사회활동도 왕성히 펼쳤다.

2021년에는 학교법인 동국대 건학위원회의 고문이자 총재를 맡았다. 사실상 조계종 내 가장 큰 권력 두 개를 모두 잡은 셈이다. 은사인 월암 정대 스님이 설립한 은정불교문화진흥원의 이사장도 맡았다. 

북한 테러?
온갖 소문

지난해엔 상월결사 회주로 부처의 말씀을 전파하는 전법 활동에 매진했다. 2019년 자승 스님을 주축으로 9명의 스님이 모여 시작된 상월결사는 봉암사결사 정신을 잇는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봉암사결사에 참여한 스님들은 소욕지족의 삶을 살며, 어떤 명예나 자리를 탐하지 않고 오로지 “부처님 법대로 살아가자”는 마음이었다.

자승 스님은 지난 봄 40여일에 걸쳐 인도 부처님 성지 1167㎞를 도보로 순례할 만큼 건강했다. 지난 3월에는 조계사 회향법회서 “성불(成佛)보다 부처님 법(法)을 전합시다”며 전국 교구본사별로 대학생 등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전법 캠페인을 벌였다.


일각에선 종단 권력이 자승 스님에게 집중된다는 비판도 나왔다. 진보 성향의 명진 스님은 자승 스님이 자신의 승적 박탈을 이끌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불교계 일각에서는 자승 스님이 조계종의 최고 지도자인 ‘종정’이 되려고 한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부정 여론이 일자 자승 스님은 조용한 은퇴를 고민했지만 결국 활발한 포교활동을 선택했다. 생전에 자승 스님은 “퇴임 후에, 은퇴 후에 종단에 얽매이면서 살아온 여러 가지 힘들었던 이런 것들을 여과시키고 어쨌든 정진하고 기도하는 이러한 평범한 대중으로 갈 생각”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10월 새 총무원장이 취임하자 상월결사에 참여한 자들이 대거 요직을 차지하기도 했다. 당시 조계종 노조 박정규 기획홍보부장이 “총무원장 선거에 자승 스님이 개입한다”며 서울 강남 봉은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던 중 승려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갑작스러운 입적 소식에 불교계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며 상당히 큰 충격에 휩싸인 모습이다. 특히, 종단 내 실세였던 자승 스님의 갑작스러운 입적으로 조계종 내부는 혼란스러운 분위기다. 동국대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건학위원회, 봉은사 회주, 상월결사 회주, 은정재단 등이 리더십 공백에 처했다.

‘조계종 실세’ 논란도 잇달아
경찰에 국정원까지 조사 나서

한편, 조계종 측은 “11월29일 안성 칠장사 화재와 관해 대한불교조계종 제33대 제34대 총무원장을 역임하신 해봉당 자승 스님께서 입적하셨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자승스님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분신했다고 판단했다. 

조계종 대변인인 기획실장 우봉 스님은 “(자승 스님이)종단 안정과 전법도생을 발원하면서 소신공양 자화장으로 모든 종도들에게 경각심을 남기셨다”고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소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서 열린 브리핑서 말했다. 소신공양(燒身供養)은 불교서 자기 몸을 태워 부처 앞에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조계종은 자승 스님이 “생사가 없다 하니 생사 없는 곳이 없구나.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구나”라는 열반송(스님이 입적에 앞서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후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남기는 말이나 글)을 남겼다고 전했다.

조계종은 총무원장인 진우 스님을 장의위원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를 꾸렸다. 서울 종로구 소재 총본산인 조계사에 분향소를 마련해 지난 3일 자승 스님의 장례를 종단장으로 모셔 영결식을 엄수했다. 다비장은 자승 스님의 소속 본사인 용주사 연화대서 행했다.

조계종은 조계사 외에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와 전국 각 교구 본사, 종단 직영 사찰인 봉은사·보문사 등에도 지역분향소를 마련할 예정이다. 장례는 종단장 규정에 따라 입적일을 기점으로 5일장으로 행했다.

고인은 1954년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1972년 해인사로 출가해 1973년 첫 은사였던 조계종 3·9대 총무원장을 지낸 경산 스님으로부터 ‘자승’이란 법명을 받았다. 1986년부터 총무원 교무국장으로 종단 일을 시작했다. 1988년 제30대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 스님의 상좌도 지냈다.

1992년 10대 중앙종회의원에 선출된 후 1996년 11대 중앙종회 사무처장, 12·13·14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했다. 서울 관악산 연주암 주지였던 1994년부터 신도는 물론, 등산객들에게 비빔밥 점심 공양을 제공하는 등 불교 교세 확장을 위해 노력해왔다.

4년 임기 두 번
총무원장 유일

이때 1994년 개혁종단 설립 후 분열된 불교계를 하나로 묶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유력한 차기 총무원장 후보로 떠올랐다. 

2009년 10월 총무원장 선거서 전체 317표 중 290표라는 역대 최대 득표로 제33대 총무원장에 당선된 자승 스님은 당시 나이 만 55세로 전 총무원장들보다 젊어 주목을 받았다. 1962년 통합종단조계종 출범 후 청담, 의현 스님이 총무원장을 연임했지만, 4년 임기 두 번을 모두 채운 총무원장은 자승 스님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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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