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가 깃든 계곡 ②괴산 화양구곡

굽이마다 아홉 절경 펼쳐지는 곳

더위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계절이 왔다. 폭염에 포위된 처지라고 할까? 열기를 식혀줄 곳으로 잽싸게 피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이럴 때 청량한 물소리 들리는 계곡만한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진녹색 수풀까지 시야에 담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에어컨이 내뿜는 인공의 바람이 아닌, 나무와 강물이 선물하는 자연의 바람이 그곳에는 가득할 테니 말이다.

괴산군은 충북 땅에서도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고장이다. 우뚝 솟은 산과 깊은 계곡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데, 그중 압권은 화양구곡이다. 이곳을 찾은 이의 마음을 무시로 빼앗을 절경이 자그마치 아홉 곳이다. 굽이굽이 드러나는 풍경에 취해 걷다 보면 어느새 더위는 기운을 잃고 저만큼 물러날 테다. 

괴산 화양구곡(명승)은 청천면 화양천 주변 약 3㎞에 흩어져 있는 아홉 장소를 일컫는다. 천천히 걸어도 1시간30분이면 전 구간을 볼 수 있다. 모두를 환영하듯 길이 험하지 않다. 여름에는 허가된 장소서 물놀이도 가능해, 가족 단위 피서객에게 특히 인기다(올해 물놀이 기간은 6월1일~8월31일).

피서객에게 인기

출발은 화양동입구사거리 쪽으로 정했다. 주차장이 넓고, 화양구곡을 안내하는 팸플릿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걷기 시작하고 오래지 않아 1곡 경천벽(擎天壁)을 만났다. ‘하늘을 떠받드는 벽’이란 뜻이다. 저 높고 넓은 하늘을 절벽 하나가 어찌 떠받을 수 있을까 싶지만, 칼로 자른 듯 수직으로 솟은 산세에 마음이 시원했다.

1곡부터 걸작으로 소문난 영화의 흥미진진한 예고편을 본 느낌이다. 남은 여덟 장소가 자못 궁금해졌다. 2곡으로 향하는 길에 나무 덱이 깔려 가볍게 걷기 좋다. 계곡 입구까지 쫓아오던 자동차 소음마저 사라지고, 계곡물과 바람이 내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 귓가에 가득했다.


화양구곡의 맑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깊게 호흡했다. 할 수 있다면 집에 가져가고 싶은 상쾌한 공기가 온몸으로 들어왔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으면 초록빛이 눈앞으로 떠다녔다.

화양이교를 지나니 2곡 운영담이다. 강 건너 절벽에 운영담(雲影潭)이라 쓴 한자가 선명히 보였다. 모래밭으로 내려가 바위에 잠시 앉았다. 운영담은 맑은 계곡물이 모여 소(沼)를 이루는데, 맑은 날에는 구름의 그림자가 수면에 비친다는 뜻이다. 마침 푸른 하늘에 유유히 떠다니는 구름 몇 점이 계곡물에 비쳤다.

조선 후기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이 말년에 화양구곡에 내려와 지냈다. 그가 세상을 뜨고 나서 제자 권상하가 스승이 머물던 이곳의 아홉 경치에 이름을 붙였다. 이 때문에 화양구곡에는 괴산 송시열 유적(사적)이 있다. 만동묘와 암서재, 화양서원 묘정비(충북기념물) 등으로 구성된다. 효종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우암이 매일 새벽 크게 울었다는 3곡 읍궁암(泣弓巖)도 송시열 유적에 포함된다.

화양구곡의 아름다움은 4곡서 절정에 이른다. 이곳은 ‘물속 모래가 금싸라기 같다’고 해서 금사담(金沙潭)이다. 금빛 모래가 수면 아래를 빛나게 한다면, 바위 위에 있는 아담한 건물이 금사담 주변을 환하게 비추는 듯하다. 송시열이 책 읽고 제자를 가르쳤다는 암서재다.

어찌 저리도 절묘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는지, 훌쩍 물을 건너 암서재 문을 열고 들어가 독서 삼매경에 빠지고 싶었다.

아홉 곳의 아름다운 절경
더위를 잊게해주는 산책길

다시 길을 재촉했다. ‘별을 관측하는 자리’라고 해서 이름 붙인 5곡 첨성대(瞻星臺)는 화양삼교를 건너니 자세히 보였다. 6곡 능운대(凌雲臺)는 커다란 바위가 구름을 찌를 것처럼 생겼다. 7곡 와룡암(臥龍巖)은 계곡물에 바짝 엎드려 꿈틀거리는 용의 모습 같았다.


오래된 다리 건너편으로 학이 둥지를 틀고 앉아 알을 낳았다는 전설이 서린 8곡 학소대(鶴巢臺)가 나타났다. 이곳을 지나면서 계곡이 더욱 깊어졌다. 9곡 파곶(巴串)은 너른 바위 위로 흐르는 물결이 용의 비늘을 꿴 형상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더위를 씻어주는 계곡 산책을 마무리하고 괴산읍으로 향했다. 괴산 읍내에는 남북을 경계로 동진천이 흐른다. 하천 북쪽에 괴산보훈공원을 중심으로 걸으며 둘러볼 유적지가 세 곳 있다. 처음 찾은 곳이 괴산 홍범식 고가(충북민속문화재)다. 자그마한 동네 뒷산과 동진천 사이에 앉은 집의 위치가 안정적으로 보였다. 대문으로 들어가니 건물과 뒷산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1730년경 지은 것으로 알려진 이 집에 태인군수와 금산군수를 지낸 일완 홍범식이 살았다. 홍범식은 군수로 재직하던 시절 일제에 저항하는 의병을 보호하는 한편,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펴 군민이 믿고 따랐다. 그의 아들은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다.

홍범식은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겼다는 소식에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했다. 홍명희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이 집에서 1919년 3월 괴산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홍범식 고가 뒤편에 개심사가 있다. 사찰 마당에서 괴산 읍내가 한 눈에 보인다. 개심사는 1935년 도덕암이 사라지면서 목조여래좌상과 목조관음보살좌상(충북유형문화재)을 이곳으로 옮기며 지은 절이다. 두 불상은 현재 극락보전에 모셨다. 가운데 불상이 목조여래좌상이고, 오른쪽이 목조관음보살좌상이다.

조선 후기에 제작한 불상으로 전해지는데 머리와 옷 주름, 표정과 손 모양까지 훼손된 부분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왼쪽에 있는 대세지보살좌상은 현대에 제작한 것이다.

괴산향교

개심사서 내려와 괴산군청 방향으로 마을 길을 따라가면 괴산향교(충북유형문화재)가 보인다. 홍살문 안쪽에 향교를 든든하게 지키듯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가 섰다. 괴산향교를 처음 설립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53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500년 가까이 한곳을 지키며 지역 인재 교육을 담당했다. 여러 차례 새로 짓고 보수를 거듭했으나, 비교적 관리가 잘되어 조선 시대 지방 교육기관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대성전과 명륜당 등이 남았다.

 

<여행 정보>
당일 여행코스
괴산 화양구곡→공림사→괴산 홍범식 고가→개심사→괴산향교

1박2일 여행 코스
-첫째 날: 괴산 화양구곡→공림사→괴산향교
-둘째 날: 개심사→괴산 홍범식 고가→괴산 충민사

관련 웹 사이트 주소
괴산군 문화관광 www.goesan.go.kr/tour/index.do

문의 전화
-괴산군청 문화체육관광과 043)830-3457
-속리산국립공원 화양동분소 043) 832-4347
-개심사 043)832-2633


대중교통
[버스] 서울-괴산, 센트럴시티터미널서 하루 10~11회(06: 45~20:30) 운행, 약 2시간 소요. 괴산시외버스터미널서 괴산 화양구곡까지 택시 이용, 약 20㎞.
*문의: 센트럴시티터미널 02) 6282-0114 고속버스통합예매 www.kobus.co.kr 괴산시외버스터미널 043)833-3355

자가운전
평택제천고속도로 음성 IC서 음성·금왕 방면 오른쪽 고속도로 출구, 359m→음성톨게이트, 105m→음성IC교차로서 음성 방면 왼쪽, 24㎞→괴산교차로서 청주·증평 방면 오른쪽, 2.9㎞→대명리 방면 우회전, 740m→문법1리(원줄기) 방면 좌회전, 2.1㎞→괴산 방면 좌회전, 1.5㎞→문광삼거리서 상주·화양구곡 방면 우회전, 8.3㎞→덕평삼거리서 덕평·운교 방면 우회전, 138m→덕평 방면 우회전, 703m→덕평삼거리서 청천·도원 방면 좌회전, 4.6㎞→도경로후영5길 방면 좌회전, 2㎞→화양로 방면 우회전, 1.2㎞→우회전→화양동계곡 주차장

숙박 정보
-호텔웨스트오브가나안: 연풍면 수옥정길, 043)833-8814, www.westofcanaan.com
-숲속작은책방: 칠성면 명태재로미루길, 043)834-7626, https://cafe.daum.net/supsokiz
-호텔더킹: 괴산읍 읍내로15길, 043)834-3355, https://blog.naver.com/theking3355

식당 정보
-맛고을(도토리칼국수·열무냉면): 괴산읍 읍내로, 043)834-7481
-즐거운날(새뱅이전골·황태찜): 괴산읍 읍내로2길, 043)833-1193
-짚은목맛집(버섯전골·매운탕): 칠성면 산막이옛길, 043) 834-0832

주변 볼거리
산악이옛길, 선유구곡, 각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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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