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2팀] 김해웅 기자 = 강 근처는 리버OO, 호수 근처는 레이크OO, 호수공원 근처는 OOOO리버파크, 학교 근처는 에듀OOOO, 도심 시내권이면 OO시티나 OOO센트럴, 언덕에 위치하면 OOOO힐, 공원 근처는 OOO파크, 대로변이면 OO메트로.
현재 분양 중이거나 최근 분양된 아파트들은 이 같은 형식의 명칭을 많이 볼 수 있다. 경기도 동탄 등 수도권이나 지방의 신규 택지단지 등 최근 분양된 아파트들을 중심으로 이 같은 작명 성향이 두드러지고 있는데 지역과 건설사 이름, 브랜드 명칭까지 합쳐지면서 15글자가 넘어가는 경우도 다반사다.
센트럴파크뷰(전 수원영통2단지), 원천레이크파크(전 원천주공) 등 기존의 4~7글자이던 아파트들도 이 같은 추세를 반영, 기존 이름에 브랜드와 아파트 단지의 개성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단어인 이른바 ‘펫네임’ 등 영어를 추가했다.
문제는 이처럼 아파트 글자 수가 늘어나면서 한 번에 부르기도 힘든 데다 단어들이 한글이 아닌 대부분 영어로 이뤄져 있어 일부 입주민들 사이에서 불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사실 아파트 명칭이 점점 길어 불편하다는 지적이 제기된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이미 10여년 전부터 아파트 이름이 길어지기 시작했으며 근래 들어 더욱 두드러졌다.
1960~70년대 아파트가 분양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마포아파트, 동대문아파트, 정동아파트 등 지역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3~4글자를 넘지 않았다. 이후 1990년대 초반이나 후반대까지만 해도 해당 지역과 건설사들의 이름이 합쳐져 보통 5~7글자 선에서 지어졌으며 외국어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1998년 아파트 분양가가 건설사가 분양가를 정할 수 있도록 자율화로 바뀌면서 ‘아파트 브랜드’라는 새운 개념이 도입됐고 ‘삼성래미안’ ‘대림e-편한세상’ ‘GS자이’ 등 기존 건설사에 브랜드명까지 붙으면서 길어지는 추세가 시작됐다.
여기에 ‘상류층’ ‘고급’ 이미지가 풍기는 ‘써밋’ ‘퍼스트’ ‘베스트’ ‘노블’ 등의 펫네임이 기존 지역+건설사+브랜드 네임까지 합쳐지면서 아파트 이름들은 속절없이 길어졌다.
실제로 1990년대엔 아파트 이름이 4.2글자에 불과했지만 2000년대 들어 6.1글자, 2019년에는 9.1글자로 눈에 띄게 늘었다가 10여년 전부터는 대부분 10글자를 넘어섰다.
현재 전국서 가장 긴 이름의 타이틀을 갖고 있는 아파트는 광주광역시 소재의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빛가람대방엘리움로얄카운티1·2차’아파트로 무려 25글자에 달한다. 경기도 남양주 소재의 ‘남양주시 해밀마을5단지반도유보라메이플타운’도 21글자나 된다.
뒤를 이어 경기도 파주시 소재의 ‘가람마을10단지동양엔파트월드메르디앙’(19글자), ‘이천증포3지구대원칸타빌2차더테라스’(18글자), 화성시 소재의 ‘나루마을월드메르디앙반도보라빌2차’(17글자) 등도 20글자에 육박한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경기도 이천 소재의 ‘이천증포3지구대원칸타빌2차더테라스(18글자), 인천의 ’영종하늘도시유승한내들스카이스테이(17글자), ‘평택고덕국제신도시고덕파라곤2차(16글자), 경기도 화성시 소재의 ’화성우방아이유쉘메가시티2단지(15글자) 등도 긴 이름으로 등재됐다(2019년 기준).
조합원들은 자신들이 입주할 아파트에 근사한 이름을 사용하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건설사들 역시 명칭과 함께 자신들이 만든 브랜드를 넣어 보다 아파트의 품격을 높이려고 한다. 기저에는 아파트 이름에 따라 아파트 가격이 좌지우지될 수도 있다는 입주민들과 건설사들의 계산이 깔려 있다.
하지만 정작 입주민들은 실제 지인이나 배달업체, 기업 고객센터 등과 유선 통화 시 15글자 이상인 아파트를 알려줄 때 불편함이 따른다. 이름이 길다 보니 한 번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고 내비게이션에서 검색할 때도 무려 40번의 자음과 모음을 클릭해야 할 수도 있다.
불편한 점은 또 있다.
은행, 동사무소 등 관공서 및 여객터미널 승선명부 작성 시 주소 입력 공간이 모자라 애를 먹는 경우도 다반사다. 시도군 단위를 적는 글자는 그대로인데 아파트 이름 글자 수가 2배 이상으로 길어진 탓이다.
상황이 이쯤 되니 “이러다가는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아파트도 나올 지경”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은 김씨 성을 가진 아버지가 자식에게 오래 사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던 나머지, 실제로 오래 사는 거북이와 두루미를 이름에 넣어 길게 작명한 것으로 ‘긴 이름의 대명사’로도 불린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중견 건설사나 많이 알려지지 않은 지역의 아파트일수록 이름이 화려하고 긴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실제로 아파트 이름이 화려하다고 집값이 더 잘 오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업계 일각에선 아파트 작명보다는 층간소음이나 결로 문제 등 주택 본연으로써의 기능적 하자가 없도록 외형보다는 내실에 더 충실해야 한다는 지적도 들린다. 실제로 일부 분양 중이거나 분양된 신축 아파트에 입주한 입주민들이 층간소음을 호소하거나 결로로 인한 곰팡이 문제로 고통을 호소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현재 아파트 이름의 글자 수를 제한하도록 하는 관련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민들의 생활 불편과 점점 길어지는 아파트 작명에 대해 일각에선 관련 법을 제정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아파트 작명은 건설사와 아파트 브랜드사의 지적재산권인 만큼 보호받아야 한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이와 관련해 근래 들어 ‘시어머니가 아들 집을 찾아오기가 어렵게 하기 위해서 아파트 작명을 길게 한다’는 웃픈 루머가 돌기도 했다.
일부 누리꾼들은 “예전에 숲속마을이라는 아파트가 있었는데 파크포레로 이름이 바뀌었다”며 “숲속마을이 훨씬 이뻤는데 파크포레는 엄청 촌스럽다” “외국 이름이면 무조건 있어 보인다는 잘못된 심리 때문이다. 그걸 깨야 하는데 깰만한 사건도 없고, 생각도 없다” 등 비판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