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강화> 철없는 로맨스 판타지

역사적 가치는 ‘뇌 밖’에 있었다

[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JTBC 드라마 <설강화>가 예상대로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당초 제작 단계부터 안기부 미화 논란이 있었던 <설강화>는 방영 2화 만에 폐지 여론이 형성됐다. 드라마에는 안기부 미화와 민주화운동에 남파 간첩이 엮인다는 주장에 부합하는 내용이 일부 담겨있었다. 제작진은 “역사 왜곡 의도가 없었다”며 억울하다는 태도다. 여전히 무슨 잘못을 했는지조차 인지가 되지 않은 모양새다. 그런 가운데 방송계는 <설강화>가 폐지로 이어질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2017년 12월27일 개봉한 영화 <1987>의 흥행은 국내 사회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1987>은 민주주의의 열망을 누르려던 당시 권력의 교만함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눈 감은
진실

박종철(여진구 분) 열사의 고문 치사 사건으로 시작해 이한열(강동원 분) 열사의 죽음까지 보여주면서, 철저히 중립을 지켜오던 연희(김태리 분)가 끝내 도착한 종착지는 시위대 버스 위였다. 이곳에서 엔딩을 맞이하는 <1987>은 진실로서 당시 시대를 바라본다.

영화에는 현 정치계에도 매우 민감하게 영향을 끼치는 1987년 민주항쟁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진실로 당시를 바라보고자 했던 <1987>의 시선은 누군가에겐 최고의 영화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만, 반대 측에는 굉장히 불쾌한 영화로 여겨질 수도 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남파 간첩들의 소행이라며 광주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죽인 것에 일말의 반성 없이 살아간 자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겐 <1987>은 매우 거슬리는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역사적 사건은 역사가 뜻대로 해석하기 나름이니까.


<1987>은 무려 723만명의 관객을 동원했을 뿐 아니라 이듬해 열린 대다수 영화제 및 시상식에서 주요 부문을 모두 석권했다. <1987>의 작품적 가치를 인정하는 영화계의 시선에 반발하는 여론은 없었다. 이는 <1987>이 역사적 사건을 진실에 근거해 재해석한 영화로서 충분히 인정받을 영화라는 사회적 함의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1987년도의 민주항쟁은 국민이 서슬 퍼런 권력에 대항해 피와 땀과 눈물로 대통령 직선제를 일궈낸 사건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치사적 가치를 지닌다는 걸 국민 대다수가 결론지었다는 의미다.

<설강화> 지속되는 폐지 논란
우려했던 역사 왜곡…그대로 공개

최근 논란이 되는 JTBC 드라마 <설강화>의 문제는 1987년도에 발생한 민주항쟁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출발한다. <설강화>의 원제였던 <이대 기숙사>로 시놉시스가 공개됐을 때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당초 안기부 인물을 미화하는 캐릭터 소개글과 남자 주인공이 ‘운동권인 척 하는 간첩’이라고 알려졌다. 드라마로 편성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청와대 게시판에 방영 금지 청원이 올라왔다. 이후 20만명 이상이 동의할 만큼 문제작으로 거론됐다. 

당시 제작진은 “안기부와 간첩을 미화하는 작품이 아니다”라며 “유출된 미완성 시놉시스와 캐릭터 소개글 일부의 조합으로 구성된 단편적인 정보에서 논란이 비롯됐고, 파편화된 정보에 의혹이 더해져 사실이 아닌 내용이 사실로 포장되고 있다”고 해명했다.

방송이 공개되면 이해할 것이라고도 밝혔었다.


그런 가운데 4화까지 방영된 <설강화>에는 논란이 될만한 내용이 많지는 않다. 다만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서 의구심이 드는 부분은 있다. 남자 주인공이자 남파 간첩인 임수호(정해인 분)가 민주화운동과 어떤 관련이 있을지, 안기부 은창수(허준호 분)나 이강무(양승조 분)가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여부다.

제작진은 은창수나 이강무 등 안기부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이 있다고 강조할 뿐 아니라 임수호 역시 민주화운동과 직접적인 연결은 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다만 해당 인물들이 중립적이고 멋있는 모습으로 나온다면, 논란은 가속화 될 것으로 예상된다.

민주항쟁
제멋대로

안기부가 역사적으로 벌여온 행태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강하기 때문이다.

당시 군부권력은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북한의 소행으로 보고 고문과 살인을 일삼았다. 정부에 입바른 소리를 하면 ‘빨갱이’로 낙인을 찍고 목숨을 앗아가는 게 신념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았고, 남산에 소재한 안기부에 끌려갔다가 성착취를 당한 여대생이 적지 않으며, 죽다 살아나 트라우마와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도 여전히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를 토대로 만든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는 포털사이트에 검색만 해도 무수히 나온다. 그럼에도 제작진은 당시의 시대상을 제멋대로 해석했다.

시청자들 사이에서 역사 왜곡 논란이 심해지자 제작진은 입장문을 공개했다. 해당 내용을 요약하면, <설강화>는 군부 시절 대선 정국이 배경이며, 기득권 세력이 권력 유지를 위해 북한과 야합한다는 내용이 골자일 뿐 민주화운동에 대한 폄훼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울러 회차가 진행될수록 역사 왜곡의 논란이 해소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월요일 방영되는 <해방타운> 대신 <설강화> 5회분을 방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5회분을 보면 시청자들이 충분히 받아들일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로미오 줄리엣? 
사랑의 불시착?

하지만 역사 왜곡 논란이 불식되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드라마는 지난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tvN <사랑의 불시착>의 형태를 띠는 작품이다. 

<사랑의 불시착>은 남북 단절의 환경을 이용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국판 서사로 환경이 낳은 비극적 사랑이 드라마의 골자다. <설강화>는 <사랑의 불시착>의 기틀은 그대로 가져오되, 배경만 1987년도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제작진이 논란이 될 때마다 “두 남녀의 애절한 사랑을 담은 작품”이라고 강조하는 측면에서 의도가 엿보인다. 


이는 극 중 ‘호수여대 기숙사’의 설정에서 드러난다. 이 기숙사는 1987년 당시 경제력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시스템이 도입됐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자유로운 포지션을 지닌다. 

총 들고 압박하는 안기부 요원에 저항하는 기숙사 사감의 행태는 당시를 살아본 사람들은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장면이다. 실제로 기숙사 시퀀스는 뿌연 조명을 사용하며 판타지로서 장르적 이미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런 이미지를 활용한 이유는 <설강화>는 단절된 시대로 인해 파생된 두 남녀의 슬픈 로맨스를 그리고자 하는 심리로 해석된다. 세계적인 스타인 블랙핑크 지수와 <D.P.> 화제를 모은 정해인의 애틋한 사랑을 보여주는 게 드라마를 만든 목적이다. 

“1987년 상징적 가치 무시한 드라마”
“안기부 풍자하지만, 반전은 없다”

사회적으로 함의가 된 역사적 가치가 있는 1987년 시대상에 가치 판단을 하지 않고 배경으로만 활용하려 했다는 데서 오히려 문제가 생기는 것. 그러다 보니 안기부 요원에게 당당히 영장을 요구하는 기숙사 사감이 등장하고, 하나회가 연상되는 동심회에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서열 다툼이 벌어진다. 

동심회의 모티브가 된 하나회는 군대 내 인사권을 마구 휘두른 사조직이다. 기수 간의 위계질서가 분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무리 군부 독재자가 하나회를 설립한 인물이라 권력이 쏠려 있다고 해도 “코드1의 신뢰가 곧 권력이 된다”는 대사가 나올 정도의 콩가루 조직은 아니었던 것. 


하지만 <설강화> 제작진은 이러한 이해도가 전혀 없는 듯 후배 남태일(박성웅 분)이 선배 은창수(허준호 분)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장면을 비중 있게 다룬다. 

이후 <설강화> 줄거리는 집권 여당과 청와대 및 안기부가 북한 정권과 야합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회차가 진행되면 오해가 해소될 것”이라는 제작진의 언급은 군부정권이 북한정권과 야합하는 대목에서 안기부에 대한 안 좋은 시선이 담겨있을 것이란 의미로 해석된다.

그럼에도 드라마틱한 반전은 없을 거라는 게 작품에 참여한 관계자의 전언이다. 

<설강화> 제작 관계자라고 밝힌 A는 “<설강화>는 안기부 측 사람들도 보통의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고 만든 작품이다. 그 시절 정권을 풍자하는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아주 나쁜 사람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후반부에 ‘총풍 사건’과 연관된 내용이 나오는데, 안기부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강하지 않다”고 말했다.

뒤죽박죽
얼렁뚱땅

이어 “역사 왜곡 논란은 1987년의 시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문제로 보인다. <설강화>는 1987년도의 안기부를 정치적인 측면에서 중립으로 바라보는데, 이러한 중립적인 시선에 불만이 있는 시청자가 많다면 오해는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intellybeast@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설강화’ 불붙은 폐지론
“시대극 이제 못 볼 수도”

시놉시스 단계부터 우려를 낳은 <설강화>는 SBS <조선구마사>처럼 폐지의 위기에 놓였다. <조선구마사>는 동북공정 역사관에 해당하는 장면이 공개돼 단 2회 만에 폐지됐다.

<설강화> 역시 시청자들 사이에서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제작진은 편성을 바꿔서라도 어떻게든 폐지만큼은 피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모양새다.

<조선구마사> 뒤이을까?
방송계의 뜨거운 감자

방송계는 <설강화>의 폐지를 매우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역사를 분명히 폄훼하는 장면이 분명히 나오지 않은 상황에 폐지까지 이어진다면, 시대극 제작 자체가 위축될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작품의 성공은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폐지까지 이어지는 건 오히려 드라마 시장의 시스템을 망치는 결과가 될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한 제작 관계자는 “시청자가 작품에 불만을 제기할 수 있듯이, 이야기를 만드는 건 시장의 자유일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고 해서 조기 종영을 하는 건 다른 문제”라며 “<설강화>가 논란의 여지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폐지가 된다면 시대극은 당분간 보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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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